소설리스트

몽혼설 (34)화 (34/138)

34화

***

낯익은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담한 별채. 병약한 아씨가 머무는 거처.

아무개는 커다란 보퉁이를 한가득 품은 몸종 소녀의 안에서 깨어났다. 타박타박 중문을 넘어서려던 몸종이 돌연 걸음을 멈추고서 담장 뒤로 숨었다.

몸종의 시선을 따라 아무개도 상황을 엿보았다. 제 키만 한 싸리 빗자루를 들고 비질하는 노비. 그 앳된 얼굴에 가슴이 잘게 요동쳤다. 뜻하지 않은 심장의 떨림을 견디며 아무개는 자각했다.

또 꿈이로구나.

먼젓번 것이 꿈장수가 의도하여 자아낸 것이라면, 이번에는 아무개 자신의 악몽이렷다.

힐끔힐끔 훔쳐보던 몸종은 노비가 비질도 잊은 채 넋을 놓고서 어딘가 보고 있음을 눈치챘다. 그 시선이 향한 곳은, 열린 창 너머로 언뜻언뜻 보이는 아씨였다. 눈이 있다면 누구든 알아차렸으리라. 저 종놈이 주제넘은 연심을 품었음을.

심장이 아렸다.

“바보.”

몸종이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멍청이. 감히 우리 아씨께 언감생심이라니.”

아씨를 갈망하는 노비. 그런 노비를 훔쳐보는 몸종. 통제력을 잃고 상황을 강제당하는 엿 같은 꿈속에서 아무개는 우습지도 않은 감정놀음의 당사자가 되고 말았다.

아무개는 몸종이 모르는 사실을 알았다. 수를 놓는 데 집중하던 아씨는 곧 뒤를 돌아본다. 비질하는 노비와 눈이 마주치고는 꽃이 피듯 화사하게 웃어 줄 테지.

머지않아 둘은 야음을 틈타 도망을 친다. 산속 금역에 숨어들어 나비를 만나고, 환상을 덧씌워 멀쩡히 돌아올 것이다. 결코 어울릴 수 없을 듯하던 주종은 한 지붕 아래 부부 가약을 맺으며 슬하에 아들까지 둔다.

그러니 이건 ‘악몽’이 틀림없다.

“잡아라!”

“노비가 도망친다! 서둘러!”

숨이 턱턱 막힌다. 사력을 다해 내달렸으나 점차 다리 힘이 빠졌다.

어쩌다 이리 되었을꼬. 돌이켜보아도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애금이 너밖에 적임자가 없더구나.」

무시무시한 귀장군에게 차마 신부가 도망갔다 고할 수 없었던 어르신이 비밀리에 제안하였다. 아씨를 대신하여 시집가기를. 온종일 지척에 머무른 덕에 아씨 흉내를 가장 잘 낼 수 있는 몸종 소녀에게 종용한 것이다.

아무개가 보기에 몸종은 제법 영리했다. 어르신께서 한낱 노비를 불러 독대한 시점에서, 이미 선택권 따위는 없다는 걸 깨달았으니.

「하면, 저희 가족을 면천시켜 주세요.」

더불어 가족 앞으로 전답과 거금을 요구하기도 했다. 천것이 날벼락처럼 상민이 되어도 생계에 지장이 없도록.

또 달포에 한 번은 가족의 안부 편지를 보내어 잘 지내는지 알게 해 달라고도 청했다. 어차피 정해진 일이라면, 얻어 낼 건 최대한 얻고 가자는 계산이었으리라.

하찮은 몸종이 주제도 모르고 감히 주인 나리께 거래하듯 요구하자 어르신은 노기로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르신은 억지로나마 웃는 척하며 애금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혼례가 코앞이다. 촉박한 시간은 무서운 주인어른마저 잠시나마 약자로 만들었다.

하나 지레 겁을 먹은 게 우습게도. 소문과 명성만으로 일대 지방을 공포로 물들인 예의 귀장군은 초례청에 오지 않았다. 애금은 신랑 없는 고독한 혼례를 치르고 시댁으로 향했다.

애금은 미처 알지 못하였으나, 귀장군에겐 본부인을 포함한 내자가 셋이나 있었다. 네 번째로 들어와 첩이 된 애금은 따가운 눈총과 날이 갈수록 더해가는 조롱, 박해를 근근이 버텨 냈다. 작은 지옥이 도래한 듯한 현실. 몇 차례나 극단적인 선택을 고려할 만큼 궁지에 몰렸으나, 달포에 한 번씩 받아 보는 가족의 서신이 비루한 삶을 버티게 해 주었다.

서신을 하도 펼쳐 본 탓에 얇은 종잇장이 닳아 버릴까 노심초사하며 이미 외워 버린 글월을 머릿속으로 회상하기만 하던 어느 날.

상황이 역전되었다. 임신을 한 것이다.

귀장군은 전쟁터를 전전하느라 본가로 귀택하는 일이 드물어 처첩이 부군의 얼굴 한 번 뵙기가 여의치 않았다. 그런 중 애금이 첫아이를 가진 게다.

하루아침에 대접이 달라졌다. 본부인을 넘어선 위상을 거머쥐고 잔뜩 도취된 애금은 그만 선을 넘어 버렸다. 저가 당한 일을 고스란히 되갚아 준 것이다.

하인들이 보는 앞에서 교육 명목으로 본부인을 매질했다. 자신이 쓰던 골방을 넘겨주기도 했다. 그밖에 무수한 보복을 감행했으나, 화무십일홍이라. 애금의 천하는 오래가지 못했다. 복중의 아이를 잃어버린 탓에.

하루아침에 상황이 역전되었듯, 순식간에 모두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절망하는 애금의 발 언저리로 본부인이 돈주머니를 던졌다.

「비천한 몸종이 감히 원산의 백가를 속이다니. 이 일이 알려지면 어찌 될 성싶으냐?」

애금은 아무런 대답도 못 하였다. 대신하듯 아무개가 속으로 대꾸했다. 차라리 죽느니만 못한 꼴이 되겠지.

본부인의 친가는 상당한 세력가였다. 겉으로는 몸을 웅크린 체하며 뒤로는 친가를 통해 유산약을 구해 손을 쓰고, 애금의 고향인 주경으로 사람을 보내어 뒷조사를 시켰다. 그리하여 본래 신분을 알아낸 것이다.

「내 오라버니께서 증좌와 함께 사람을 보낸다 하였다. 네게 남은 기회는 지금뿐이다.」

맘이 바뀌기 전에 당장 꺼져라.

서슬 퍼런 기세에 짓눌린 애금은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본부인이 내던진 묵직한 돈주머니 대신 가족의 편지를 챙겨서.

하나 저자를 벗어나기도 전에 본부인의 오라비가 보냈다던 친가 쪽 사람들과 마주치고 말았다. 아무개에게 신체적 자유가 주어졌다면, 한숨이라도 대신 쉬고픈 불운이었다.

그리하여 현재.

애금은 숨이 턱 끝까지 차도록 애써 달렸다. 하나 추격자와의 거리는 줄어들기만 했다.

본부인의 오라비가 보낸 자들은 노비가 도망간다며 고함을 질렀다. 돈주머니를 쥐여 주고 조용히 보내려던 부인의 처신과 상반된 행태에 아무개는 자못 의아해졌다. 혹, 본부인은 친가 쪽 의견을 거스르고 독단적으로 애금을 내보낸 걸까.

노비가 추노꾼에게 쫓긴다 여긴 사람들은 애금을 외면했다. 일부는 되레 나서서 잡으려 들기도 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제발, 제발······!

탓, 누군가 고의로 다리를 걸었다. 애금은 달리던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넘어져 굴렀다. 품에 가득 안은 서신이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흩어지는 종이 더미 속에 주저앉은 애금을 사방의 군중이 힐끔거렸다. 도망쳤으나 곧 잡힐 노비. 사람이 아닌 타인의 재산을 보는 그 눈길은 무감하고 차가웠다.

“도, 도와주세요.”

누구든 상관없다. 애금은 얼굴도 보지 않고 무작정 제 앞에 선 남자의 도포를 붙잡고 애원했다.

성큼 다가온 추격자들의 아우성이 소름 끼치게 꽂혀 들었다. 됐다! 표적이 넘어졌어! 환희에 찬 그들의 외침이 애금에겐 절망으로 다가왔다.

“제발··· 살려 주세요.”

젖은 목소리로 사정사정하자 남자는 애금의 손에서 도포 자락을 살며시 잡아 뺐다. 다 끝났다. 절망하여 무너지던 애금의 시야를 넉넉한 소맷자락이 휙 뒤덮었다.

세상이 빙글 돌았다. 좌절감으로 머리가 핑 도는 건지 실로 세상이 뒤집히는 중인지 구분이 어려웠다. 애금이 허우적거렸으나 아무개는 이러한 현상을 알고 있었다. 축지술.

눈앞을 가리던 소맷자락이 거두어지고. 도로 시야가 트인 애금은 놀라 기함했다. 시끌벅적한 저잣거리는 어디로 가고 드넓은 초원이 넓게 펼쳐졌으니.

“급해 보이기에 우선 산 하나를 넘어왔어요.”

상냥한 음성이 머리 위에서 떨어졌다. 그제야 애금이 고개를 들고, 아무개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삿갓을 쓰고 너울을 내린 남자가, 유랑술사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뒤로 무수한 백지 부적이 새처럼 애금의 편지를 물고서 팔랑팔랑 공중을 떠다녔다.

“혹 따로 갈 만한 곳이 있나요.”

모두가 외면할 때. 유일하게 내밀어진 손 하나.

스스로를 떠돌이 술사라 밝힌 그는 원하는 어디든 데려다줄 수 있다 하였다. 그 말에 애금은 고향을 떠올렸다. 이미 본부인의 오라비에게 발각되었다고는 하나, 힘든 시기에 몸을 의탁할 만한 이는 피붙이밖에 떠오르지 않은 탓에.

그리하여 애금은 수년 만에 고향 주경으로 돌아왔다. 술사가 떠나고 다시 혼자가 된 애금은 물어물어 가족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애금이? 혹시 애금이냐?”

빨래터에서 만난 아낙이 애금을 알아보고 사색이 되었다.

“네가 어, 어찌··· 예까지 돌아왔니?”

“왜 이제 와 가족을 찾는 게냐. 설마··· 어르신이 돌아가시길 기다렸던 건가.”

반기는 기색일랑 조금도 없고 께름칙한 반응뿐이었다. 애금이 꼬치꼬치 캐묻자 그네들이 하나둘 실토하였다.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고 나니 약조한 전답도 금전도 아까워진 모양이다. 어르신은 애금이 시댁으로 떠난 다음 날 가족을 때려죽였다.

애금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가족들이 보낸 편지가 버젓이 있잖은가. 부모님은 글을 모르셨으나, 자신이 아씨의 곁에서 어깨너머 배운 바를 동생들에게 가르쳐 주었더랬다.

가족의 서신을 보여 주며 거칠게 항변하자 시꺼멓게 죽은 낯을 하던 아낙 몇이 냅다 엎드려 사죄했다. 미안하다고, 어르신의 명이라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고.

서신에 쓸 내용을 매번 거짓으로 지어내기란 골치 아픈 일이다. 하여 어르신은 애금이네와 비슷한 환경의 가정을 몇 골라 그들의 사정을 달마다 보고하도록 하였다. 이를 통해 애금에게 보낼 글월을 위조한 것이다.

힘든 삶을 간신히 잇게 해 준 가족의 편지가, 묵직한 돈주머니조차 외면하고 챙겨온 서신이,

모두 거짓이었다.

손에 힘이 빠졌다. 와르르 쏟아진 서찰 뭉치가 빨래터 물가에 젖어 들었다. 검은 먹으로 쓰인 허구가 하얀 종이에 멍처럼 번졌다. 마지막 미련이 씻겨 내려갔다.

애금은 비틀비틀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마감할 목숨. 빨래터에서 혀 깨물고 죽어도 상관없을진대. 희한하게도 최후의 순간, 죽을 자리만큼은 아무렇게나 정하고 싶지 않았다. 시신을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속인 세상을 향해 내세우는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그리하여 애금은 뒷산으로, 붉은 천을 감은 금역으로, 터벅터벅 나아갔다. 우측에 삼잎이 무더기로 있었으나 코웃음만 나왔다. 애금이 좌측으로 걸음을 옮긴 바로 그때.

⎯ 이상한 인간이로구나. 산삼을 보며 어찌 그리 웃는 게냐.

인간의 것이 아닌 의념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었다. 몽환의 신령이다.

보통 인간이라면 두려움을 느끼고 움츠러들 터. 하나 이미 최후를 각오한 애금에겐 산신령이든 수호지신이든 관계없었다.

“신경 끄시오. 곧 죽을 인간에게.”

⎯ 곧 죽어? 어찌하여?

귀찮고 거슬렸다. 애금은 짜증이 일어 성을 냈다. 금역에 제 발로 들어온 인간이 죽으러 왔지 뭐 하러 왔겠냐고.

하나 신령은 오히려 반문했다.

⎯ 진정 죽으려거든 그쪽이 아니라 예로 와야지. 내 너의 눈을 트여 주마.

일순 개안하듯 눈앞이 맑아졌다. 덕분에 애금은 환상 너머에 자리한 실체를 목도하였다. 무수한 삼잎이 아닌, 보는 것만으로 어지럼증이 일도록 아찔한 절벽을.

금역의 실체를 알게 된 애금은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다. 욕망의 결실로 남은 백골 더미는 우습기만 했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나 저 치들과 같은 수준으로 남고 싶지는 않았다. 애금은 귀찮게 떠드는 신령을 무시하고 하산했다.

마을로 돌아오자 시끄러운 소란이 귀에 꽂혀 들었다. 초례청에서 흘러나오는 소음이다.

예전 생각이 난 탓일까. 애금은 홀린 듯 다가갔다. 인파를 피해 비척비척 구석진 담벼락에 기대 있자니 가마가 들어왔다. 신부가 내리고 신랑과 맞절을 했다.

한데··· 신랑 신부 얼굴이 낯설지가 않았다.

“······아씨?”

그들은 귀장군과 혼례를 앞두고 사라진 아씨와 노비였다.

이해할 수 없었다. 당연하다는 듯 축하하는 사람들, 수줍게 미소 지은 신랑과 신부.

당신네는 어찌 그리 웃을 수 있지?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애금은 초례청을 뛰쳐나갔다.

모두가 그랬듯 거짓으로 꾸며 낸 환상을 보았더라면, 그리하여 신랑 신부의 본모습을 알지 못했더라면, 차라리 나았을는지 모른다. 하나 몽환의 신령은 환상을 꿰뚫는 눈을 주었고 애금은 똑똑히 목도하고 말았다.

걸인처럼, 정처 없이 떠도는 부평초처럼, 이리저리 배회했다. 도저히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었다. 온종일 먹지 못해도 허기가 느껴지지 않고 마시지 않아도 갈증이 나지 않았다.

어찌 그리 웃을 수 있지? 나는 이제 울 수도 없는데. 당신네는 어찌하여 웃는 게지.

그러면 안 되잖나. 내가 왜, 누굴 대신하여 이리되었는데.

온몸이 저며지는 듯한 고통이 치밀었다. 이대로는 손을 쓰지 않고 가만있어도 죽어나겠다 싶었다. 애금은 생각했다.

죽기 전에 할 일이 생겼구나.

눈에 띄는 초가 아무 곳에나 들어갔다. 광에 놓아둔 쟁기와 가래, 호미 따위의 농기구 사이에서 유독 시퍼렇게 날이 선 낫이 보였다. 애금은 낫을 쥐어 들었다. 하늘은 어둑했고 작은 절도는 어둠 속에 묻혔다.

애금은 초례청이 열렸던 곳으로 향했다. 자신은 신랑 없이 홀로 외로운 여정에 오르느라 겪어 본 적 없는 그곳, 신방으로.

“···아씨.”

아씨. 거기 계세요?

마루에 주저앉아 톡. 톡. 장지문을 두드리며 애금은 치마폭에 낫을 감추었다. 이제는 까마득히 잊고 살던 호칭이 들려오자 아씨는 적잖이 놀란 모양이다. 두려움에 떨며 누구냐 묻는 아씨께. 애금이 나직이 말했다.

“저예요. 애금이.”

당신이 야반도주한 탓에 대신 팔려 간 몸종.

애금은 자신이 겪은 불행과 부조리를 하나하나 털어놓았다. 평생 누구에게도 말해 본 적 없는 인생사를, 저가 이 꼴이 된 원인에게.

“이상하지요. 저는 이리되었는데. 어찌하여 아씨는 웃고 계실까요.”

그럼 안 되지요. 제가 겪은 모든 비참함은, 본래 아씨의 몫이잖아요.

고을의 안위를 대신해 팔려 가는 건, 비천한 몸종 따위가 아니라 장중보옥으로 온갖 호사를 누린 아씨여야지요. 당신이 외면하고 피한 업보는, 결국 누군가 대신해야만 하거늘.

온갖 저주와 원망을 털어놓자니 벌컥 문이 열렸다. 눈물 젖은 얼굴로 아씨가 사과했다.

난 네가 그리될 줄 몰랐어. 나를 대신할 줄도, 시댁에서 모진 고초를 겪을 줄도······ 내 아비가 너희 가족에게 그리 잔혹한 짓을 저지른 줄도.

“좋으시겠네요. 아무것도 몰라서.”

아는 게 없으니 그리 속 편하게 살았겠지. 근심 걱정 없이 해맑게 웃으면서. 나의 불행을 초석으로 삼아.

애금은 낫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아씨라면 껌뻑 죽는 종놈이 어쩐 일로 자리를 비웠는지 모르나, 이는 기회였다. 녹초가 된 애금이 건장한 사내의 완력을 이길 수 없을 테니. 결심을 굳히고 낫을 들려던 찰나.

“엄마!”

멀리서 앳된 목소리가 울렸다.

어째서일까. 애금은 과하게 소스라치며 일어났다. 서둘러 뛰쳐나가 몸을 숨기자마자 어린 사내아이가 마당으로 들어섰다. 아씨를 똑 닮은 얼굴에 묘하게 노비가 떠오르는, 어린아이가.

“아···.”

그래, 그렇지. 흘러간 지난 세월이 얼마인데. 아이가 없을 리가.

“아아······.”

아아, 아아아··· 아아아아악⎯!

소리 죽여 절규했다. 입술을 찢을 듯 벌리고서 전신의 모든 숨결을 토해 낼 듯이. 그 처절한 비명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목구멍 언저리에서 꺽꺽대기만 하였다.

애금은 낫을 질질 끌며 길목에서 벗어났다. 싸리문을 너머 마당 안쪽에서 어린 사내아이와 어미가 부둥켜안고 우는 소리가 들렸다.

지독히 피로했다. 애금은 걸었다. 걷고 또 걸었다. 그리하여 다다른, 어느 인적 없는 외딴곳에서. 애금은 제 곁에 남은 유일한 물건인 낫을 높이 들어 올렸다.

지긋지긋한 삶을 끝낼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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