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느닷없는 제안이 자못 당황스러웠으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아무개는 서둘러 땅에 이마를 대고 엎드려 절했다.
“제 불민한 눈으로 보건대, 신령님께선 환영을 만들어 내는 권능이 있는 듯합니다요.”
⎯ 그래. 나는 몽환(夢幻)에서 태어난 호접(胡蝶). 꿈과 환상이야말로 나의 본신(本身)이니라.
“하면··· 혹, 아씨와 제 겉모습을 바꿔 주실 수 있습니까?”
뒤쪽에서 술사가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개는 간절함을 담아 고했다.
“쫓기는 중이오나 아씨께선 멀리 떠나기 힘든 몸이십니다요. 하니 저희 모습을 바꾸어 추적의 손길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외모가 변하면 애써 먼 길을 떠날 필요가 없다. 등잔 밑이 어둡다잖은가. 이 고을에 그대로 머물러도 잡힐 걱정은 사라지리라.
⎯ 그쯤이야 별반 어려울 것도 없지.
나비는 아무개의 머리 위를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나붓나붓한 날갯짓에서 흘러나온 은은한 입자가 전신으로 스며들었다. 나비는 술사에게로 날아가 같은 행위를 반복했다. 노비의 낡고 헤져 군데군데 기운 옷이 새것처럼 말끔해지고 아씨의 녹의홍상이 장터에서 흔히 보이는 수수한 차림새로 변하였다.
하나 아무개의 눈에는 술사의 얼굴이 여전히 또렷하게 보였다.
⎯ 진실을 아는 너희에겐 서로가 변함없는 그대로이나, 알지 못하는 자들에겐 달리 보일 게다.
나비는 술사의 머리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호접을 본뜬 뒤꽂이라도 꽂은 양 자연스러운 위치였다.
⎯ 이만 돌아가려무나. 예서 더 있다간 이 아이가 견디지 못할 듯하니.
그리하여 아무개는 술사를 업고 지나온 길을 되돌아갔다. 붉은 천으로 겹겹이 두른 나뭇가지 너머 횃불을 들고 서성이는 장정들이 보일 때까지.
아무개는 걸음을 멈추었다. 환영으로 외양을 바꾸었다 한들 이리 야심한 시각에 금역으로 지정된 깊은 숲에서 나오는 한 쌍의 남녀란, 존재만으로도 의심받기 십상이므로.
⎯ 걱정하지 말아라.
술사의 머리맡에 앉은 나비가 다시 의념을 보내왔다.
⎯ 내 잠시 저들의 눈을 가리었으니. 누구도 너희를 보지 못할 게다.
고민하는가 싶던 아무개는 망설인 끝에 재차 걸음을 옮겼다. 횃불의 궤적을 따라 시야가 환히 점멸했다. 꿀꺽, 긴장한 목울대가 상하로 움직이며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귓가에 천둥처럼 울리었다.
“미련한 놈.”
눈썹에 칼자국이 선명한 험악한 인상이 저를 노려보며 말하였다. 반사적으로 어깨가 펄쩍 튀며 소스라쳤다.
“제 발로 금역에 들어가다니. 죽고 싶어서 환장한 게지.”
하나 칼자국의 사내는 아무개를 보고서도 미간을 찌푸릴 뿐이었다. 그는 소리 높여 동료를 불러 모으지도 않았고 아무개에게 냅다 달려들어 패대기치지도 않았다.
“이보게! 아직도 게 있는가?”
칼자국의 동료가 한 명 더 나타났다. 아무개는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그래. 예 있다만, 왜 그러나.”
“방금 꼬맹이가 여쭙고 왔는데, 어르신이 길길이 날뛴다나 봐. 금역이고 자시고 산을 뒤엎어서라도 찾아 내랍신다.”
추격자들은 아무개와 술사가 지척에 있음에도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떠들어 댔다. 나비가 웃음기 머금은 의지를 전했다.
⎯ 내 말하지 않았느냐. 보지 못하리라고.
그렇다. 나비가 호언장담한 대로 추격자는 그들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바로 옆을 지나가는데도.
“이리 야심한 밤에 어인 야단법석이라냐. 어휴, 웬 미친놈이 아씨를 보쌈해 갈 줄이야.”
“쉿, 쉿. 벌써 잊었나? 어르신께서 입조심하라 단단히 윽박질렀잖나. 혼례를 앞둔 여식이 정결치 못한 게 알려지면 파혼당할지도 모른다고.”
“차피 금역으로 들어갔으면 돌아오지 못할 터인데. 어디 숨긴다고 될 일인가 그게?”
“낸들 아나? 어찌 됐든 간에 사라진 건 종놈 하나뿐일세. 우리가 찾는 건 도망친 노비야. 아씨께는 아무 변고도 없네.”
아무개는 묵묵히 산에서 내려갔다. 폭이 좁은 길목을 따라 아름드리나무를 지나 돌다리를 건너. 산 전체를 빙 둘러 진을 친 추격자들을 코앞에서 스쳐 가며.
간신히 마을로 되돌아올 즈음, 나비가 다른 이들의 눈을 가린 장막을 거두었다. 하늘 끝자락에 푸르른 쪽빛이 넘실거리는 이른 새벽. 아침을 맞은 주민들이 저자에 붙은 방을 보며 수군덕거렸다.
“대관절 이놈이 누구기에 어르신께서 야밤에 난리법석을 떨었대?”
“도망간 종놈이라던데. 듣기로는 진귀한 보배를 훔쳐 달아났다나 봐.”
도망간 종놈. 그 말에 무의식적으로 몸이 반응했다.
아무개는 인파의 틈바구니를 헤집고 들어갔다. 거뭇거뭇한 머리 사이로 벽에 붙은 용모파기가 보였다. 노비의 용모파기가.
“저놈 때문에 지난밤부터 어찌나 시끄럽던지. 통 잠을 잘 수가 없더라니까.”
용모파기를 보고 수군대는 주민들. 그들 가운데 당사자가 떡하니 있거늘 누구 하나 알아보지 못하였다. 나비가 꾸며 낸 거짓 모습은 그토록 완벽했다.
화선지에 세필 붓으로 그린 노비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아무개는 이내 몸을 돌려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아무도 그들을 막지 않았다.
몽중몽은 다시 이어졌다. 꿈장수가 그들에게 보여 준 혼롓날로.
슬하에 자녀를 두고서도 노비와 아씨는 정식으로 혼례를 올리지 못하였다. 마을 주민 모두가 전란을 피해 타지방에서 건너온 부부로 알고 있으니. 뒤늦게 혼인하는 모양새가 의심을 살까 차일피일 미루었던 것이다.
마침내 결심을 굳힌 것은 어르신, 아씨의 부친이 작고한 후였다.
아무개가 보기에 아씨는 친부에 대한 정이 썩 깊지는 않은 듯싶었다. 어미는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릴 적에 돌아가셨다 하고 아비란 작자는 제 욕심만 그득하여 정붙이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었다니.
한데 그놈의 핏줄이 무어라고. 본가에서 지낼 적에도 달포에 두어 번이면 많이 뵌 거라던 선친께서 별세하자 아씨도 덩달아 몸져누워 버렸더랬다. 최근에서야 겨우 자리를 떨치고 일어난 아씨께 노비는 뭐든 해 주고 싶어 했다. 그러던 중 우린 매번 국수를 얻어먹기만 한다며 아씨가 농처럼 건넨 핀잔이 맘에 걸렸던 노비가 늦게나마 혼례를 올리기로 하였다.
아이를 친구댁에 하루 맡아 달라 부탁하며 혼례를 입에 올렸을 적에, 의외로 이웃들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세상이 하 수선하다 보니 이런저런 사연이 있겠거니 지레짐작한 덕이다.
여하간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아무개는 초례상을 곁에 두고 섰다. 서로 얽힌 청실과 홍실. 불을 밝히는 청사초롱. 밤과 대추, 쌀을 올려둔 상. 너른 마당과 푸른 잎이 무성한 나무. 한쪽에는 붉은 잉어가 헤엄치는 연못이 마련되어 있고 기와를 얹은 지붕 처마에는 풍등이 걸린, 익숙한 광경.
초례상 너머 반대편 방석은 비어 있었다. 가례에 참석한 손님들 덕에 주위가 북적이며 소란했다.
가마가 초례청에 들어섰다. 신부가 도착한 것이다.
네 명의 가마꾼이 짊어진 사인교가 땅에 내려앉았다. 문이 들려 올라가자 붉은 활옷을 입고 머리에는 족두리를 얹은 신부가 나타났다. 곱게 분한 새신부가 가마에서 내리자 환호성이 더욱 짙어졌다.
아무개와 술사가 십수 번이나 반복하여 치른 바로 그 혼례였다.
아무개는 익숙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옆에는 술사가 나란히 누운 채였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저는 몰라도 노비는 아씨와 한 이불 덮고 살아 온 세월이 한두 해가 아닐진대 이리 심장이 약동하는 것이 신기했다. 슬하에 자녀를 두었어도 혼례 후 첫날밤이라는 상황은 익숙하다 여긴 모든 일상을 돌연 생경하게 만들어 버리는 듯했다.
한참 만에야 결심이 선 듯, 아무개가 이불 속에서 손을 뻗었다. 손끝에 술사의 손목이 살며시 와 닿은 찰나.
“여보게! 게 있는가!?”
마당에서 외쳐 부르는 소리가 산통을 깼다.
“오늘 같은 날 방해해서 미안하네만, 큰일 났네. 자네 애가 사라졌어!”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아무개는 불안해하는 술사를 다독여 주고 서둘러 신방을 나섰다. 아이를 맡긴 포목점 주인, 석소영이 발을 동동 구르며 나섰다.
“초저녁 즈음 우리 애들이랑 방에서 자는 걸 보았네. 한데 좀 전에 뒷간 들르는 김에 들여다보니 감쪽같이 사라졌지 무언가! 애들을 깨워 물어보았는데 아무도 모른다 하네.”
포목점 주인은 초조함과 미안함을 담아 상황을 설명했다. 겨우 하루 맡겼을 뿐인데 그새 아이를 잃어버리다니. 입이 두 개라도 할 말이 없으렷다.
아무개는 평소 가깝게 지내던 이웃 몇을 불러 아이를 찾아다녔다. 늦은 밤 횃불을 들고 마을을 쏘다닌 지 한 시진이 넘어갈 무렵, 아이를 찾았다. 우습게도 아이가 발견된 곳은 자택 인근이었다.
“어휴, 이 말썽꾸러기가. 고작 하루를 못 참고 엄마 아빠 보고 싶다고 오밤중에 말도 없이 쪼르르 가 버리냐?”
이웃 주민들은 허탈함과 안도감에 한두 마디씩 던지고는 돌아갔다. 아무개는 그들에게 연신 허리 숙여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날 술사는 아이를 품에 안고 섧게 울었다.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안타까워 아무개는 안절부절못했다. 안 그래도 병약한 몸이잖은가. 부친상 이후 몸져눕고 다시 일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이러다 큰일 날까 조마조마한 가운데 술사는 울다 울다 실신하듯 쓰러졌다.
그리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숨이 찼다. 헉헉대며 산길을 올랐다.
아무개는 지팡이를 쥔 손을 보았다. 마르고 주름진 손등이 지나간 세월을 짐작게 했다.
과거 한 사람을 등에 업고 훌쩍 뛰어다닌 산길을. 이제는 지팡이에 의지하고서 천천히 걸어 올랐다. 후들후들 떨리는 발로 아무개가 향한 곳은, 붉은 천으로 친친 감은 금역이었다.
간만에 걸음 한 금역에서 기억을 되짚듯 찬찬히 주변을 살피자 이번에는 바로 보였다. 깎아지른 듯 아찔한 낭떠러지가.
절벽을 타고 오르는 거센 돌풍에 비틀거리던 중. 나비가 날아들었다.
⎯ 어인 일로 예까지 걸음 하였느냐, 아이야.
아이라니. 이 나이 먹고는 도통 듣기 힘든 호칭에 옅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몽환의 신령께서 보시기엔 이팔청춘이나 환갑노인이나 똑같이 어린 것일 테지.
“······감히 청을 드리고 싶어 찾아뵈었습니다.”
흙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아무개는 노비의 삶을 덤덤히 반추하였다. 종놈의 자식으로 태어나 당연한 듯 종놈이 되었던 삶. 주제에 맞지 않게 품은 연심. 뜻하지 않은 사건과 우연으로 귀한 분과 가약을 맺은 일. 하루아침에 어미를 잃고 너무 이르게 어른이 되어 버린 자식까지.
“슬슬 느낌이 오더이다. 나도 곧 아씨를 뒤따르겠거니, 하고.”
지팡이에 앉아 날개를 팔랑이는 나비를 보며 이어 말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디다. 죽을 때만큼은 행복하게 가고 싶다는.”
⎯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환상뿐이다.
“예. 알고 있습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아무개가 입을 열었다.
“하면, 제 생에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환상으로나마 보여 주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더냐.
“······아씨와 혼례를 올리던 날. 저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놈인 줄로 알았습니다.”
나직한 넋두리가 이어졌다.
“하나 바로 다음 날. 저는 지옥에 떨어졌지요.”
이해할 수가 없습디다.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삶이라지만, 이리 천당과 지옥을 오가야만 할는지요.
만일 행복의 크기만큼 불행이 주어진다면, 그리하여 생의 저울을 맞추어야 한다면, 때문에 아씨를 데려가신 거라면.
“저는 차라리······ 혼인을 하지 않았을 겝니다.”
기억을 복기할수록 북받쳐 오르는 듯 호흡이 가쁘게 치솟았다. 하나 금세 기력이 다하여 헐떡였다.
⎯ 나는 네게 행복한 나날만을 선사할 수 있다.
나비의 날개에서 은은한 입자가 가루처럼 부스러졌다.
⎯ 혼례를 올리던 날을 되풀이해 줄 수도 있지. 지옥이 찾아올 수 없도록.
가까스로 고개를 들어 올린 아무개는 나비를 향해 슬피 웃었다.
“그리해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 환상은 꿈꾸는 자에게만 임하느니라. 너는 언제까지 행복한 꿈을 꾸고자 하느냐.
“가능한 한 계속······ 영원히.”
이 숨이 다하는 날까지.
⎯ 좋다.
하얀 실타래가 사방에서 쏟아져나오더니 씨실과 날실처럼 교차했다. 물레도 베틀도 없는 허공에 순식간에 피륙이 직조되었다.
⎯ 잊지 말아라. 내가 줄 수 있는 건 단지 허상일 뿐. 본질은 변함없으니.
그 순간, 아무개는 눈을 떴다.
가마가 땅에 내려앉고 붉은 활옷의 신부가 나타났다. 비단 안대로 눈을 가린 신부가 내딛는 첫걸음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아무개는 술사를 향해 반사적으로 손을 뻗다 멈칫했다. 허공에서 꼼지락거리는 다섯 손가락이 생경했다. 내 몸이 뜻대로 움직인다는, 당연한 감각이 무척 낯설었다.
아무개는 술사를 돌아보았다. 붉게 칠한 입술이 익숙한 미소를 그렸다. 아무개는 미묘한 차이를 구분해 냈다. 지금 웃음은 아씨가 아니라 술사님이다. 그도 자신처럼, 과거에 정해진 대로가 아닌 본인 의지로 웃음 짓는 것이다.
마침내 꿈속의 꿈에서 깨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