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몽혼설 (31)화 (31/138)

31화

“잘됐습니다요. 저걸 보자마자 다들 눈 돌아갈 테니 그 틈에 도망가야죠.”

밥상 차려 주는 거로 모자라 수저로 떠서 대령해 줘도 못 먹는 얼간이가 여기 있다. 눈앞에서 인생역전 일확천금의 기회를 날려 버리는 머저리가.

아무개는 재차 생각했다. 누가 봐도 지금 노비의 선택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하나······

“······후회하지 않겠어?”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등 뒤에서 들려오는, 술사님의 목소리.

몽환의 신령이 농간을 부려 몽중몽에서조차 노비와 아씨 역할을 수행하였으나, 그 실체는 아무개와 유랑술사였다. 어린 술사의 미성이, 무력해진 그가 제게 의지하고 기대는 몸짓이 가슴에 박혀 들었다.

그래. 나라도 술사님이 고맙다고, 충분히 해 줬으니 이만 가도 된다고, 그런 말을 하면 산삼이고 자시고 죄다 내팽개치겠지. 머저리가 별거 있나. 아무개야말로 바보 맹추였다.

“후회 안 합니다요.”

‘후회 안 해.’

입 밖으로 꺼내는 동시에 아무개는 결심했다.

“정말로 후회 안 할 거야?”

“글쎄 안 한다니깐요.”

“왜? 왜 후회를 안 하지?”

“거 참. 무얼 그리 꼬치꼬치 캐묻고 그러십니까. 민망하게스리.”

더운 피가 목을 타고 뺨까지 올라오는 느낌이 선명했다. 할 수만 있다면, 손부채질이라도 하고픈 심정으로 아무개가 꿍얼대자 술사가 음? 하고 되물었다.

“뭐가 민망하니?”

“후회 안 합니다요. 안 하는데, 이유는 말씀드리기 쬐끔 거시기하니 자꾸 묻고 그러지 마십쇼.”

“자꾸 안 물었는데.”

“······네?”

“후회하지 않겠냐고. 나는 한 번밖에 안 물어봤어.”

뭐?

발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서늘한 밤바람이 달아오른 얼굴과 젖은 이마를 차게 식히며 스쳐 갔다. 절로 몸이 부르르 떨릴 만큼.

“하, 한 번밖에 안 물어보셨다고요? 허면,”

정말로 후회 안 할 거냐고. 왜 후회를 안 하느냐고. 두 번이나 연달아 물은 것은, 대체······?

모순이 빚어낸 섬뜩함에 술사마저 몸을 움츠리고 제 등에 한층 가까이 붙어 왔다. 바로 그때.

⎯ 이상한 인간이로구나.

귀가 아닌, 머리로 꽂혀 드는 음성.

⎯ 산삼을 보았으면서 어찌 그리 지나치는 게냐. 심지어 후회를 하지 않는다니?

정확히 따지자면 ‘음성’이라는 표현은 옳지 않다. 상대의 정신에 직접 의사를 전달하고 소통하는 방식. 아무개는 누가 이런 식으로 교류하는지 알고 있었다.

“시, 신령···님?”

신령.

개중에서도 조음기관이 없는 자연체 혹은 정신체 신령들이 즐겨 쓰는 유형이다.

풀썩. 힘이 풀려 비틀거린 아무개는 가까스로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어 지탱했다. 놀란 술사가 작게 비명을 질렀으나 미처 달래 줄 겨를이 없었다.

눈앞에 나비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팔랑팔랑 날갯짓하는 나비는 칠흑 같은 먹물에 실수로 떨어트린 한 방울의 타락(駝酪:우유)마냥 야밤의 산속을 은은히 빛냈다.

아무개는 나비를 유심히 살폈다. 언뜻 눈처럼 희었으나, 표면에는 무지개를 닮은 오색빛깔이 아롱거리는 오묘한 형상. 그것은 몽중몽이 펼쳐지기 전, 반복되는 혼롓날의 끝에서 본 나비였다.

⎯ 알고는 있느냐.

나비의 형상을 띤 신령이 의념을 보냈다.

⎯ 살아서 예를 벗어난 건 너희가 처음이다.

나비가 두 주종의 곁을 하늘하늘 춤추듯 스쳐 갔다. 나비가 지나간 자리마다 은은한 빛 가루가 궤적을 그리며 반짝이자 무의식중에 그 흔적을 따라 옆으로 옆으로 시선을 옮겼다. 마침내 뒤쪽으로 완전히 고개를 돌렸을 때. 아무개는 흡, 하고 숨을 들이켰다.

무수한 삼잎이 머문 자리. 일확천금의 노다지 밭인 줄로 알았던 그곳은, 다름 아닌 절벽이었다.

“어, 어찌 이런. 이런 짓을······.”

돌아오는 이 없는 금역의 실체는, 환영을 덧씌운 낭떠러지였다.

아무개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더듬거렸다. 그럴 수밖에. 술사가, 아씨가 없었다면 노비는 산삼을 캐러 가다 낙사했을 테니. 제 발로 묏자리를 찾아가는 셈이잖은가.

신령이 어찌하여 이리 악독한 짓을 저질렀을까. 그 의문에 답하듯 몽환의 나비가 재차 의념을 전했다.

⎯ 이리 와 보겠느냐.

벼랑 끝에서 나부끼는 날갯짓. 불안하여 망설이자 웃는 듯한 감각이 머릿속에 울렸다.

⎯ 겁내지 말아라. 헤치지 않을 터이니.

한참 주저한 끝에 간신히 결심이 선 듯. 술사를 조심조심 내려놓은 아무개는 홀로 낭떠러지를 향했다.

⎯ 좀 더 가까이.

⎯ 더.

겁 많은 노비는 갈수록 다리를 후들후들 떨었다. 그 탓에 종국에는 엎드려 기고서야 벼랑 끝에 다다랐다.

⎯ 이제 밑을 내려다보렴.

나비가 유도한 대로 절벽 아래를 보자 까마득한 어둠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나비는 낭떠러지의 경사를 따라 나풀나풀 내려가더니 가파른 벼랑에 덧니처럼 비죽 도드라진 좁은 면으로 향했다. 마침내 나비가 가쁜 날갯짓을 멈추고 내려앉자 새까만 암흑 속, 한 마리 나비만이 점점이 빛을 밝혔다.

아무개는 사색에 잠겼다. 진실을 명명백백 밝히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낳지만은 않는다. 때때로 어떤 일은 야음에 묻혀 잊히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지금 나비가 앉은 백골 따위가 그렇다.

“······!”

아무개는 비명이 나올 것 같은 입을 제 손으로 틀어막았다. 해골바가지 위에 살포시 자리 잡은 몽환의 신령이 날개를 나부꼈다.

⎯ 옛날얘기를 하나 해 주마.

병든 노모를 모시던 형제가 있었다. 우연히 지나가던 어느 영험한 술사가 자식 삶은 물을 드리면 낫는다 하자, 고심 끝에 아우의 아들을 솥에 넣어 삶았다. 손주 삶은 물을 마신 노모는 병석을 떨치고 일어났다.

한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다음날, 어제 삶았던 아우의 아들이 멀쩡히 돌아온 게 아닌가?

아이는 친구네에서 놀다 깜빡 잠이 들었다 하였다. 혼비백산한 형제가 부리나케 솥뚜껑을 열어보니 그곳엔 동자삼 한 뿌리가 둥둥 떠다녔다.

다환에서는 제법 흔한 이야기였다. 효심에 감동한 신령이 산삼을 내어주고 그 덕에 건강을 회복한 노부모의 일화.

한데 함께 솥을 들여다본 아우네 아이가 소스라치더니 동자삼을 가리켜 말했다. 제 친구라고. 어제 놀러 갔다 깜빡 잠이 들어 하룻밤 신세를 지고 온 바로 그 댁 아이라고.

기이하게 여긴 아우는 아들을 다그쳐 친구네 집으로 향했다. 옹기종기 모인 초가지붕을 지나 고을 뒷산으로. 오고 가는 걸음으로 다져진 길이 사라지고 인적이 끊긴 후에도 한참을 더 나아간 부자지간은 깊은 산 속 벼랑 끝에 다다랐다. 바로 여기, 이곳에.

아이는 험준한 절벽 아래 홀로 도드라진 부분을 가리켜 말했다. 저기가 친구네 집이라고.

⎯ 아우는 보았단다. 제 아들이 가리킨 곳에 자라난 동자삼들을.

산양도 뒷걸음질 칠 가파른 벼랑 한가운데에 집을 짓고 산다니. 얼토당토않은 소리다.

하지만 그게 사람이 아니라면?

⎯ 아우는 형에게 도움을 청했다. 보다시피 여기는 인간의 육신으로 다다르기엔 퍽 어려우니.

나비가 팔랑 날아올랐다.

⎯ 새끼줄에 소쿠리를 묶어 벼랑 아래로 내렸지. 아우가 소쿠리를 타고 가 동삼을 담아 올렸고 그동안 형은 줄을 잡았단다.

“허면, 저 백골은······.”

말끝을 흐렸다. 아무개는 대략적인 사정을 짐작하였다.

⎯ 동삼을 모두 캐어 담자 형은 소쿠리만 들어 올리고서 떠나 버렸다. 아우는 절벽 아래 버려두고.

벼랑을 거슬러 오른 나비가 아무개의 코앞까지 날아들었다. 허공에 희뿌연 궤적을 그리며 나비가 이야기를 끝맺었다.

⎯ 누구도 아우를 도우러 오지 않았다. 육신이 썩어 문드러져 진토가 되고 백골만 남을 때까지.

대개 구전설화에선 이시미라도 나타나 아우를 돕고 형을 징벌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권선징악의 교훈을 주곤 할 테지.

하나 현실의 아우는 죽었다. 그냥 그렇게.

“아들은요? 아우에겐 길을 알려 준 아들이 있지 않습니까. 아들이 아비를 구하러 오지 않았습니까?”

⎯ 자신을 삶아 죽이려 한 아비를 위해?

형제 외에 이곳을 유일하게 알던 단 한 명. 아우의 아들.

아비는 명확한 의도를 가지고 아들을 죽였다. 놀라운 운이 따라 주어 아이는 살았으나, 이는 결과적인 이야기일 뿐. 아이는 분명 살해당했다.

⎯ 자신을 죽이려 한 자를 살리고자 하는 이가 과연 있을까 싶으나, 놀랍게도 아이는 감감무소식인 아비를 찾아 예까지 왔단다.

어려서, 저가 당한 일이 무언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여 가능한 행동일 테지.

⎯ 하지만 아이는 아비를 찾을 수 없었단다. 그때는 이미 내가······

순식간에 낭떠러지가 사라지고 익숙한 산속 풍경이 펼쳐졌다. 그 앞에 놓인 것은 삼잎 군락이었다.

⎯ 이리 만들었거든.

나비가 자아낸 환상은 너무도 생생했다. 잎맥이 고스란히 보이는 삼잎, 코끝을 스치는 풀 향과 멀리서 들려오는 부엉이 울음까지. 오감을 완벽하게 속이는 환영.

“어찌하여 그러셨는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요?”

⎯ 산 주인이 진노하였기 때문이지.

이 산의 신령은 제 아이들을 무척 아꼈다. 한데 인간들에게 무슨 소문이 돌았는지. 어느 날부터 산을 드나드는 머릿수가 수십 배는 늘어나더니 애지중지 키운 동자들을 모조리 잡아갔다.

산삼으로 유명세를 타자 전국 각지에서 심마니가 몰려든 것이다.

산 주인은 고심 끝에 인간의 눈에 띄지 않게, 그들의 발이 닿지 않을 위치를 고르고 골라 벼랑 한가운데서 다시 아이들을 길렀다. 하지만 결국 형제의 눈에 띄고 말았다.

“아들을 대신하여 솥에 삼긴 동자삼은··· 산신령께서 보내신 게 아니었습니까?”

⎯ 그럴 리가. 동자삼은 친구를 대신해 스스로 찾아간 게다. 산 주인의 반대를 무릅쓰고서.

거기서 그쳤다면 좋았을 것을. 나비가 탄식하듯 일렀다.

⎯ 병든 노모를 치유하고도 욕심을 내어 아이들을 데려가 버리니. 그 화가 지금껏 미치는구나.

산 주인의 덕목은 나눔과 베풂이기에 겉으로 내색은 않았으나, 속으로는 무척 화를 내었다. 결국 산의 주인은 몽환의 나비에게 청을 한다.

더는 인간들이 내게서 아이들을 빼앗아갈 수 없도록 해 달라고.

⎯ 식객 노릇이나 하던 내가 거절할 수는 없지.

절벽 위로 환상을 덧씌운 나비가 보낸 의념 속에는 웃는 듯한 감각이 섞여 있었다. 낭떠러지를 향해 제 발로 뛰어든 탐욕을 조롱하듯.

환상에 속은 심마니들이 스스로 절벽에 몸을 던졌다. 그리하여 누구도 돌아오지 못하자 사람들은 이곳을 금역으로 정하였다. 세월이 흘러 그들의 기억 속엔 과거의 사건은 잊히고 금역의 존재만이 남겨졌다.

⎯ 하여 나는 너희에게 흥미가 있단다. 이 환상을 보고도 유혹에 빠지지 않은 건 너희가 처음이거든. 말해 보렴. 어찌하여 산삼을 보고도 지나쳤지?

아무개는 반사적으로 술사를 힐끔 보았다. 눈치를 보고 있으려니 술사가 허락하듯 고개를 끄덕였고, 아무개는 그간의 사정을 간략하게나마 털어놓았다. 나비는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였다.

⎯ 저 낭자를 위해 욕심을 버리고 목숨마저 걸었다는 게냐?

흥미롭구나, 진정 흥미로워. 그리 중얼거린 나비가 반응했다.

⎯ 너희 이야기 속 신령들은 언제나 교훈을 주지.

연못에 도끼를 빠트린 나무꾼이 진실을 고하면 금도끼 은도끼를 덤으로 주지만, 거짓을 고하면 쇠도끼마저 돌려주지 않는 것처럼. 사람의 상상 속 신령이란 자상하고 선하며 인애를 지녔다.

⎯ 기대에 부응해 주마. 어리고 기특한 것에겐 상을 주어야지. 인간 아이야, 원하는 게 있느냐?

말해 보아라.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이뤄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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