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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혼설 (30)화 (30/138)

30화

“······!”

홀연히 들려온 부름에 술사의 발이 미끄러졌다. 덩달아 기겁한 아무개는 황급히 담장 아래로 달려갔다.

“아씨! 괜찮으신···.”

“쉿!”

담장을 덮은 기왓장에 몸을 걸친 술사는 어깨를 심하게 들썩이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흘러내린 귀밑머리가 축축하게 젖어 뺨에 들러붙었다.

“······못 본 거로. 해 주면··· 안 될까.”

거칠게 스며드는 작은 미성.

며칠간 밤새 울음을 삼키느라 잔뜩 쉰 목소리는 뭐라는지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엉망이었다. 자택 담벼락이 아니라 높은 산마루라도 오른 듯 힘겹게 헐떡이느라 더욱 그러했다. 아무개는 가까이 다가서서 작게 속삭였다.

“몸도 성치 않으신 분이 어딜 가려고 그러십니까요.”

“어디든. 여기만 아니면 돼.”

“혼인 때문에 이러시는 겝니까?”

“······응.”

이제 와 무얼 숨기겠냐는 듯. 술사는 선선히 인정했다. 매일 밤 홀로 눈물 흘린 아씨를 지켜본 노비는 턱을 단단히 굳혔다.

“아씨께서 이리 가 버리시거든, 어르신께서 가만있지 않으실 겝니다.”

“그래.”

“새벽닭이 울기도 전에 들킬 테지요.”

“그렇겠지.”

“어르신께선 사람을 풀어 아씨를 찾아낼 겝니다. 아씨 걸음으론 금방 잡히겠지요.”

“그럴 거야.”

“분풀이 삼아 쇤네들을 쥐잡듯 죽어라 팰지도 모릅니다. 상전을 똑바로 모시지 않고 팔자 좋게 퍼질러 잤다고 말입죠.”

“······그럴지도.”

“한데도 가시렵니까?”

바람이 불었다. 그새 식은땀으로 젖은 술사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고작 담장 하나 넘으면서 죽을 둥 살 둥 하는 주제에. 별당 밖으로는 걸음 한 적도 없으면서. 작고 약해빠진 몸뚱이로. 금방 잡힐 걸 알면서도.

“그래.”

술사는 결연히 단언했다.

아무개는 고개를 젖혀 들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짙은 구름에 달마저 숨어 버린 밤.

야반도주하기 딱 좋은 날이 아닌가.

아무개는 벽의 요철을 딛고 훌쩍 담을 넘었다. 자신은 한참 힘겹게 끙끙댄 담벼락을 손쉽게 타 넘는 모습을 술사는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남루한 옷자락을 툭툭 털어 낸 아무개가 담장 위에 매달린 어린 술사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뛰세요. 잡아드리겠습니다.”

술사는 얼떨떨한 듯 아무개를 한참이나 주시했으나 재촉을 받고는 어쩔 수 없이 뛰어내렸다. 풀썩, 떨어지는 몸을 서둘러 안아 들자 품 안에서 술사가 올려다보았다. 선이 고운 앳된 얼굴에 혼란이 가득했다.

“왜, 네가···?”

“아씨 걸음으론 금방 잡히실 거라니까요.”

“내가 잡히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이니. 난, 난 그냥, 모른 척해 주는 거로 충분한데.”

“······얘기는 나중으로 미루죠. 지금은 서두르시는 편이 좋겠네요.”

아무개는 떨어지지 않으려는 손을 애써 술사에게서 떼어냈다. 그리하여 둘은 함께 걸음을 옮겼다.

“어디로 가실는지 정하셨습니까?”

“······아니.”

노비의 발이 멈칫했다. 아무개는 그 이유를 대번에 알아차렸다.

목적지도 없이 무작정 나온 건가. 정말이지 대책 없는 아가씨잖아.

“너도 알다시피 난 어릴 적부터 몸이 건강하질 못해서··· 외출도 그다지 할 수 없었고, 내가 아는 장소라 봐야 아버님도 알 만한 곳뿐이야.”

변명처럼 웅얼거리는 말소리는 여전히 깔깔하고 탁해서. 아무개는 온 신경을 집중하고서 겨우 알아들을 수 있었다.

자박자박. 두 사람분의 발소리가 어두운 골목길에 잔잔히 울렸다. 낮게 우짖는 밤새만이 그들의 도피를 지켜보았다.

“일단은 사람이 적은 곳으로 모시겠습니다요.”

얼마나 걸었다고 벌써부터 술사의 호흡이 가빠졌다. 덜 여문 얼굴에 식은땀이 가득하여 흘러내린 머리칼이 이마에 들러붙었다. 그것을 한 올 한 올 떼어 정리해 주고픈 듯 손끝을 움찔하면서도 묵묵히 나아가던 노비가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고개를 홱 돌렸다.

“안 되겠습니다. 느려도 너무 느려요.”

이러다간 마을 어귀를 벗어나기도 전에 붙잡히겠다 하니 술사가 당황하였다. 어찌하느냐며 웅얼대는 그의 앞에 아무개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작지만 판판한 등을 내보이고서.

“업히세요.”

“뭐···?”

“차라리 제가 아씨를 업고 가는 게 훨씬 빠르겠습니다.”

“아, 아니야. 나 무거울 거야······. 느린 게 문제라면, 내가 더 빨리 걸을게.”

“그러다 아씨 숨넘어갈까 무섭습니다요. 잔말 말고 업히세요.”

“하지만···.”

“저희끼리 설왕설래할 시간 없습니다요. 이러는 동안에도 어르신께서 점점 가까워지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거의 협박처럼 나온 말에 술사는 하는 수 없이 업히고 말았다.

“네, 네가 하겠다고 한 거야. 나 무겁다고 흉보면 안 돼?”

“걱정 마세요. 하나도 안 무겁습니다요.”

평소 지게 위에 키보다 높이 쌓아 올리던 나무에 비하면, 이쯤이야 별거 아니다. 등에 와 닿은 온기와 무게를 고스란히 느끼며 아무개가 일어설 때였다.

끼이익⎯ 고요한 밤 중에 문짝 열리는 소리가 천둥마냥 크게 울렸다. 큼직하게 하품을 하며 쪽마루로 나온 사내는 뒷간에 갈 요량으로 일찌감치 허리춤을 느슨히 풀고 있었다. 비몽사몽한 채로 마루 밖에 한 발만 내밀고서 짚신을 찾듯 대강 휘적이던 그는 발끝에 아무것도 걸리지 않자 성을 내며 흐리멍덩한 눈을 부릅떴다.

“······?”

시선이 마주쳤다.

“너는 저어기 어르신 댁 종놈 아니냐? 이 시간에 어인 일로······!?”

사내의 시선이 제 등 뒤로 옮겨가고, 그 눈이 함지박만 하게 커졌다.

“서, 설마!”

두말할 거 없이 아무개는 냅다 뛰쳐나갔다.

“잠깐! 이놈아, 게 섰거라!”

야심한 시각 줄행랑치는 노비와 그 등에 업힌, 고상한 자태의 소녀. 누가 봐도 수상하기 짝이 없는 조합이렷다.

사내가 고성을 지르자 주변 이웃들이 슬금슬금 깨어났다. 서서히 번져 가는 소란. 하나둘 켜지는 등불에 아무개는 내심 한탄했다. 어쩜 운이 없어도 이리 없을 수가. 거의 아무개 자신 급이었다. 이래서야 처음 엄포를 놓은 대로 마을을 나서지도 못하고 도로 잡힐는지도 모르겠다.

“어, 어쩌면 좋지?”

불안으로 떨리는 물음이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아무개는 서둘러 발을 놀리면서도 연신 주변을 살피었다. 그래 봐야 마땅한 방도를 찾기란 불가능할 진대도.

빠르게 휙휙 지나가는 풍경 속. 이래저래 어지럽게 헤매던 눈길이 한쪽에 머물렀다. 짙은 어둠에 묻힌 산등성이. 꿀꺽 마른침을 삼키고서 아무개는 그곳으로 향하였다.

무슨 속셈일까. 야밤에 산행이라니, 실족사하기 딱이잖은가. 아무개는 궁지에 몰린 노비가 아씨와 함께 최후를 맞이하려는 건가 의심스러웠다. 심회가 변한 것은 산어귀에 다다를 무렵이었다.

눈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발목 위로 돌출된 굵직한 뿌리, 눈을 찌를 듯 위험천만하게 뻗어 나온 가시나무, 사냥꾼이 놓아둔 덫까지. 어둠 속에 숨은 위협을 아무개는 손쉽게 피해갔다. 밤중의 산은 모두에게 위험천만한 곳이건만, 매일 나무하러 다니는 노비에겐 제집 마당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지게를 지고 다니던 길에 사람을 업고 오르자 숨이 턱턱 차올랐다. 본래 아무개의 몸은 어린 술사쯤이야 가뿐하게 들어 올릴 수 있으나, 노비의 기억을 되새김질하느라 불필요하게 헐떡이고, 과하게 진이 빠졌다.

“찾아라!”

“얼마 못 갔을 게다. 샅샅이 뒤져!”

그새 쫓아온 추격자들의 고함이 메아리쳐 울렸다. 그때마다 등 뒤의 몸이 움찔거렸다.

“괜찮아?”

전신이 땀으로 범벅이 된 아무개는 물기 어린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했다. 뒤에 업힌 상대가 이리 작은 고갯짓을 알아보았을까. 어쩌면, 이때 당시 노비는 미처 거기까진 생각을 못했을는지도.

일렁이는 횃불 무리가 밤중의 산속을 밝혔다. 아무개는 길쭉하니 늘어난 수목 그림자에 뒤에서 숨을 골랐다. 나무 밖으로 고개만 내밀어 살펴보려는데 하늘하늘한 무언가가 눈가에서 살랑였다. 목을 뒤로 빼고 보니 금(禁)이라 적힌 붉은 천이었다. 붉은 천이 나뭇가지에 친친 감겨 있었다.

뻣뻣하게 굳은 얼굴로 아무개가 좌우를 돌아봤다. 그제야 시야에 들어왔다. 그물처럼 온 사방의 가지를 동여맨 붉은 금이. 이 동네에 첫발을 들인 문외한이라도 모를 수가 없는, 명백한 금역이었다.

「아무래도 이 동네는 처음인가 본데. 혹여나 여기 뒷산에는 들어가지 말어. 거기 갔다 돌아온 작자가 없어 금역으로 정해 놓았으니, 얼씬도 말어야 해. 알았나?」

아무개는 미처 듣지 못하였으나, 소영과 재효는 일찌감치 경고를 받은 바로 그곳이었다. 발을 들인 자는 누구도 빠져나오지 못했다던, 출입 금지 구역.

앞은 금역, 뒤는 추격자.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양자택일을 강요받는다. 아무개는 차마 앞으로도 뒤로도 발을 떼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만약 잡힌다면, 난 두고 가.”

그때 술사가 입을 열었다.

“최대한 시간을 끌어 볼게. 아버님께도 내가 협박해서 너는 어쩔 수 없었다고 말씀드릴게.”

만약, 이라고 가정을 달았으나 쉬어빠진 음성에는 결연한 각오가 서려 있었다. 이미 잡히리라는 건 기정사실로 받아들인 듯이.

“뒷일은 생각 말고 무조건 도망쳐야 해. 알았지?”

어찌하여 그런 말을 하는 걸까. 길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주종은 함께 도망쳤으나, 그 앞날은 판이했다. 귀하디귀한 아씨는 기껏해야 눈물 쏙 빠지게 혼나고 혼례까지 허튼짓 못 하도록 감시받겠지.

하나 노비는 죽을 것이다. 멍석말이든 몽둥이찜질이든 필시 곱게 죽지는 못하리라.

“······고마웠어.”

두 팔을 아무개의 목에 감으며, 축축하게 젖은 등에 몸을 기댄 술사가 작게 속삭였다.

“난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해서··· 집 밖으로 나와 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야.”

말하지 않아도 안다. 별당에 틀어박혀 수를 놓고 난을 치다가도 담장 밖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 따위에 귀 기울이던 모습을 봐 왔으니.

“이리 멀리 나와 본 건 태어나 처음이야. 도와줘서 고마워. 산보는 충분히 했어.”

횃불의 주홍빛이 가까워졌다. 누군가 외쳤다. 여기 발자국을 찾았어!

“이제 그만하자.”

두 팔에 힘을 주어 아무개의 목을 한 차례 끌어안은 술사가 손을 풀었다. 내려줘도 된다는 듯이.

목구멍에 덩어리가 맺힌 듯 꽉 막혔다. 가슴이 답답하게 미어지는 가운데 아무개는 혼란에 빠졌다. 이리 심장을 두드리는 먹먹함은 대관절 누구의 것이던가. 내 것인가, 너의 것인가.

아무개의 혼동과 별개로 육신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저었다. 술사를 한 차례 고쳐 든 후 정면을 응시했다. 붉은 천이 피에 젖은 거미줄처럼 드리워진 어두운 숲속. 그곳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금역에 제 발로 뛰어들며 아무개는 노비의 내심을 어렴풋이 유추했다.

추격자들이 턱밑까지 쫓아왔다. 잡혀서 죽나 금역에서 죽나 어차피 같은 죽음이라면, 이판사판인 마당에 도박이라도 해 보는 게다. 이리 요란하게 표시해 둔 거로 보아 산속 금역에 대한 악명은 이 고을에서 공공연할 테지. 저곳으로 가면, 누구도 쉬이 쫓아오지 못할 것이다.

실제로 금역에 발을 들인 후부터 뒤를 쫓던 장정들의 기척이 확연히 줄었다. 주홍빛 횃불이 차츰 사그라지고 시린 달빛이 나무 그늘 사이를 어슴푸레 비추었다. 깊은 숲으로 얼마간 더 들어갔을까. 아무개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 왜 그러니?”

등 뒤에서 술사가 의아한 듯 물었으나 미처 대답할 겨를도 없었다. 몸이 제멋대로 우측을 바라본 덕분에 아무개도 발견했다. 저건 삼잎, 그러니까 산삼이다.

「주경 인근이던가, 꿈장수가 있다고 들은 적 있어요.」

이곳에 당도하기 전. 술사가 제게 한 말이 떠올랐다.

「주경은 산삼으로도 유명한 곳이죠.」

한두 뿌리가 아니다. 수십이 군락을 이뤄 한눈에 담아내기 힘들 정도였다. 이 무렵 산삼의 값어치는 같은 무게로 금의 스무 배에 달했다. 단번에 인생을 역전할 기회가 버젓이 나타난 것이다.

“저기에 산삼이 있습니다요.”

“······그래? 잘됐구나.”

아무개의 어깨를 톡톡 두드린 술사가 힘겨운 듯 쌕쌕 거칠어진 호흡으로도 웃음을 지었다.

“넌 여기 있으렴. 내가 가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 보마.”

“네?”

“어차피 아버님께 중요한 건 나야. 혼례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나만 돌아가면, 네게는 신경 쓸 여력이 없을 거야. 너는 삼을 캐고 나서··· 다른 고을로 넘어가렴.”

급히 나오느라 마땅한 패물도 챙기지 못하여 걱정했건만, 잘되었다며 술사가 덧붙였다.

“저 산삼은 산신령께서 날 대신하여 네게 준 선물일 거야.”

그리 말하는 어조에는 미안함과 안도가 섞여 있어서. 여타 사심 없이 오롯한 진심임을 능히 알 수 있었다.

“전에 들은 적이 있어. 우리 마을은 옛날부터 산삼으로 유명했다지. 전국 각지에서 심마니들이 찾아왔다며? 워낙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 금역으로 지정하고부터는 발길이 뚝 끊겼다지만······.”

시야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우측에 자리한 삼잎 군락과 좌측의, 희미하게 남은 길의 흔적. 두 선택지 사이에서 고민하던 노비는 잠시 후 어렵사리 결정을 내린 듯 이를 악물었다.

술사를 고쳐 업은 몸이 좌측으로 발을 내디뎠다. 산삼을 뒤로하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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