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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혼설 (29)화 (29/138)

29화

아무개는 소름이 돋았다. 깜깜하던 시야가 순식간에 트이며 흩어진 구슬들이 하나로 꿰맞춰지는 듯한 전율.

“몽환이랑 몽과 환이 무어 다른가?”

“전혀··· 다르지.”

그래서였다. 아직 깨닫지 못한 듯 어리바리한 재효에게 무심코 대꾸해 버린 것은.

“꿈과 환상··· 두 영역을 다룰 수 있다는 뜻이니.”

무시 혹은 경멸이 아닌, 평범한 말을 아무개에게서 처음 들은 재효가 얼떨떨해했다. 아무개는 그를 무시하고 홀로 추측을 이어갔다.

“꿈장수의 부모는··· 신령의 힘을 빌려, 환상으로 외형을 꾸며 낼 수 있어. 그러면, 본래 모습을 물려받은 꿈장수랑··· 닮지 않아 보이겠지.”

염재효가 한 대 얻어맞은 듯 멍한 얼굴을 했다. 술사가 이어 부연해 주었다.

“만만한 외지인 부부에게 바가지를 씌우려다, 이 마을 사정을 잘 알기에 실패했다 하였죠? 어쩌면, 외지인이 아니라 정말로 이곳 토박이였을지도 몰라요.”

환상으로 외형을 바꾸었기에. 누구도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였을 뿐.

그때. 어디선가 나비가 날아왔다. 팔랑이는 날개는 순백색이되 표면이 은은한 무지갯빛으로 반짝였다. 나풀나풀 날갯짓할 때마다 하얀 가루 같은 입자가 뒤따라 흔적을 남겼다.

⎯ 신령님께서 허락해 주셨습니다요!

돌아온 꿈장수가 다시 외쳤다.

⎯ 몽환의 신령께서 저희 아버지와 나눈 기억은 두 가지. 처음 만났을 적과, 작고하시기 전 유언을 청하러 왔을 때입니다.

나비는 겁도 없이 아무개의 앞으로 날아들었다. 나비의 날개에서 흘러나온 입자가 바람결에 불어와 눈가를 간지럽혔다.

⎯ 그때 당시의 기억을 보여 주겠다 하셨습니다. 하니 놀라지들 마십쇼!

조금은 눈에 들어간 것도 같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은 아무개가 손등으로 비볐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낯선 곳에 놓여 있었다.

‘술사님?’

아무개는 곧장 술사부터 찾았다. 그러나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좌우로 고개를 돌리고 더 멀리까지 보고 싶은데. 육신은 의지를 배신하고 얌전히 비질이나 했다. 이상하다.

내가 왜 빗자루를 들고 있지?

그뿐 아니다. 좀 전만 해도 푸른 단령에 혼례복 차림이던 자신이 지금은 거칠한 무명천으로 지은 옷을 입었다. 시야도 한층 낮아졌다. 몸이 작아진 듯이.

불안이 덜컥 밀려왔다. 낯선 장소,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육신과 그에 갇혀 버린 이질적인 의식. 모든 것이 익숙했다. 아무개의 악몽은 언제나 이러했으므로.

‘아니야.’

혼란스러운 중에도 아무개는 일말의 판단력을 잃지 않았다.

‘이건 내 악몽이 아니야.’

몽환의 신령이 보여 주는, 과거의 기억. 꿈장수의 부친과 연이 닿은 시절의 연연

몽중몽(夢中夢)이 펼쳐진 것이다.

쓱쓱 비질을 하던 몸이 우뚝 멈추었다. 고개를 든 시야 너머에 아담한 별채가 자리하고 있었다. 열린 창으로 언뜻, 자수를 놓는 고운 아씨가 보였다. 가지런히 땋아 내린 머리끝의 댕기만 보아도 심장이 거칠게 맥동했다. 아무개는 즉시 깨달았다. 꿈장수의 부친은, 저 사람을 좋아했구나.

비질하는 것도 잊고 시선을 빼앗겼다. 가슴에 난데없는 훈풍이 불어 따스한 가운데 아렸다. 당연했다.

저 소녀는 귀한 집안의 금지옥엽이었으나, 이 육신은 노비의 것이었으니. 감정은 닿을 수 없고 전해서도 안 된다. 조용히 삭이고 짓밟아 없애야만 했다. 들키기 전에.

한데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누가 그랬던가. 연심은 기침과 같아 숨길 수가 없다고. 어리석은 노비는 제 감정을 뚝뚝 흘려 대고 있었다.

시선을 느낀 듯, 소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아.”

술사님?

분명 유랑술사였다. 곱디고운 양갓집 규수의 차림새로, 열서너 살 즈음 됐으려나 싶은 앳된 얼굴이었으나, 그렇다 한들 자신이 술사를 몰라볼 리 없으니.

그의 얼굴을 보자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술사 또한 마찬가지로, 여전히 몽중몽의 주연이 된 것이다.

눈을 내리감은 술사가 제 쪽을 보며 생긋 미소했다. 그 웃음에 심장이 아프게 뛰었다.

그는 다시 수틀로 고개를 돌렸다. 고운 매화잎이 한 장 두 장 늘어갔다. 아무개는 그러고도 한참을, 그 뒷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기묘한 꿈이었다.

아무개의 악몽은, 타인의 육신이라는 옥에 갇혀 무력하게 당하는 과정을 감내하는 것이다.

반면 몽환의 신령이 자아낸 몽중몽에서는 영육 모두 제 것이되 행동의 자유가 없었다. 마치 패관소설의 등장인물처럼. 말과 행위는 물론 신체적 반응까지 모두 이미 정해진 서사를 따르듯,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였다. 필시 꿈장수의 부친 되는 노비의 기억을 훼손 없이 온전히 보여 주기 위함이리라.

심부름을 다녀오고 나니 저택이 어수선했다. 행랑 마당 구석에 모인 노비들이 쑥덕공론을 벌이는 모양새가 어째 심상치 않았다.

“무슨 일인데?”

“흐아악!?”

아무개가 묻자 노비들이 숨넘어갈 듯 소스라쳤다. 그 행색에 아무개가 재차 물었다.

“왜들 이래, 죄지었어?”

“아니, 그. 별건 아니고···.”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말꼬리를 흐리는 몸짓이 영 어설펐다. 다들 제 눈치를 보고 있음을 깨달은 아무개가 근처 노비의 어깨를 단단히 붙들어 잡고서 추궁했다.

“말해. 무슨 일이야.”

“······너도 알지? 원산의 백가가 한창 북진 중인 거.”

원산의 백가. 원산을 터전으로 군사를 일으킨 가문. 그들은 이백여 년 전 외침과 대지진의 여파로 황실이 무너진 후, 온 땅에서 군웅이 우후죽순 할거하던 시기. 다환의 서남 지방을 평정하였다.

즉, 대강 어림잡아도 2세기 전의 인물이었다.

아무개는 섬뜩한 상념이 떠올랐다. 이 꿈은 몽환의 신령이 타인의 기억을 읽고 엮어 낸 것. 몽중몽 속 상황이 실제 현실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하면 자신이 만난 꿈장수는 대체······

“항복을 권했다나 봐. 우리 주인 어르신이야 재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납죽 엎드리셨고.”

“난 또 뭐라고. 그런 얘길 하면서 내 눈치는 왜 봐.”

아무개는 긴장의 끈을 풀고 허탈한 듯 읊조렸다. 내심 신경이 곤두섰으나, 정신과 괴리된 육체는 이렇듯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 세상이 하 수선하다곤 하나 몰아닥친 풍파를 직접 겪어 본 바 없는 그네들 노비는 여직 심각성을 뚜렷이 느끼지 못하였다.

“그게··· 아까 중매쟁이가 다녀갔다지 뭐야?”

하나 본론은 지금부터였다.

“우리 아씨가 미인이시지 않으냐. 아마도 백가에서······.”

이상하다.

참 신기하기도 하지. 눈앞의 녀석이 무어라 지껄이는 게 빤히 보이는데. 뭐라는지 하나도 안 들렸다. 그러나 아무개는 더 듣지 않아도 뒷얘기를 알 것 같았다. 원산의 백가와 아씨, 중매쟁이.

온몸의 피가 차게 식는 듯했다. 시간이 어찌 흘렀는지, 무얼 했는지, 기억이 흐릿하고 모든 감각이 희미해졌다.

정신을 차렸을 적엔 이미 늦은 밤이었다. 행랑의 비좁은 처소에 몸을 누인 아무개는 멀거니 천장만 들여다보다 대뜸 일어났다.

서둘러 자야 한다. 노비의 삶은 힘겨웠다. 다음 날 새벽같이 일어나 고된 노동을 이어 가야 하니 지금 자 두지 않으면 내일 일을 제대로 못 할 테고, 그럼 모진 호통과 매질을 받는다. 한데도 잠이 통 오질 않았다.

아무개는 한방에서 자는 다른 노비들을 피해 발뒤꿈치를 들고서 살금살금 행랑을 나섰다. 사위가 고요한 가운데 몽롱한 걸음으로 어둠 속을 헤집던 찰나.

울음소리가 들렸다.

우뚝 멈추어 선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아무개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씨?”

구석진 뒤꼍. 숨죽여 눈물짓던 어린 술사가 고개를 들었다.

심장이 철렁했다.

실제 술사님이 우는 게 아니라, 자신과 노비처럼 그 또한 아씨의 행적을 따라갈 뿐임을 아는데도. 하얀 속곳만 입고서 흐느껴 우는 모습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가슴이 미어졌으나 할 수 있는 게 없다. 몽중의 아무개는 제 뜻대로 움직일 수 없고, 노비는 의복을 갖추지 못한 아씨를 마주한 것만으로 몽둥이찜질을 당해 마땅한 신분이었으니.

“몸도 성치 않은 분이. 이리 나와계시면 아니 됩니다요.”

결국, 들키지 않게 멀찍이 떨어져서는 전하지도 못할 어설픈 위로나 외고 말았다.

“고뿔 들면 어쩌시려고요.”

노심초사하며 발을 굴렀으나 서글픈 울음은 그칠 기색이 없었다. 아무개는 담장에 몸을 숨기고서 여린 흐느낌을 귀에 담았다. 소리 죽인 울음에 심장이 짓이겨진 듯 아프게 조여들었다.

그날부터 기묘한 만남이 이어졌다. 별도 달도 숨을 죽인 이슥한 밤. 홀로 나와 울음을 삼키는 아씨와, 위로를 건넬 수도 무시할 수도 없어 먼발치서나마 지켜볼 따름인 어리석은 노비의 일방적인 조우.

어릴 적부터 몸이 약했다던 아씨의 체질이 옮기라도 한 듯 술사는 날이 갈수록 수척해졌다. 매일같이 차가운 밤바람을 쐬며 심력을 소모한 탓일까. 야위어 가는 모습이 역력했다. 다들 안타까워하였으나, 누구도 역성을 들어주진 않았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아씨 혼처가 정해졌다던데.”

“나도 들었네. 원산의 백운이라며?”

“허어, 설마 귀장군?!”

백운. 그는 이 무렵 다환에서 제일로 위명을 떨친 장수였다. 하늘이 내린 무재라 하여 천무지체라 일컬어지는 자. 단신으로 백에 달하는 적을 상대하고 맨손으로 머리를 터뜨려 버린다는, 말 그대로 일당백의 괴물. 사람이 아니라 귀신같다 하여 귀장군(鬼將軍)이라 불리는 사내.

“키가 팔 척이 넘는다더이.”

“시뻘건 홍안에 도째비처럼 머리에 뿔이 났다던데.”

“눈이 네 개라지. 뒤통수에도 눈이 달려서 몰래 습격하려던 놈들 모가지를 따부렀다고.”

“팔이 여덟이라 도, 검, 창에 활까지 한꺼번에 휘두른다던데.”

“예끼, 이 사람들아. 그런 헛소문을 믿는 겐가?”

행랑 앞에 모인 노비들은 서로 눈길을 교환하더니 히죽 웃었다.

“소문이 과장되었을 테지?”

“팔척장신에 뿔 돋은 홍안에 눈이 넷이고 팔이 여덟이면, 그게 어디 사람이라 할 수 있겠나.”

“무어. 그만큼 무시무시하다는 뜻이겠거니.”

“사실 귀장군의 전적을 보면, 그런 괴물이 아니고서는 말이 안 될 정도로 어마무시하잖나.”

“그런 자가 우리 고을에 쳐들어오기라도 하면······.”

싸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곧 노비들은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었다.

“설마 마누라 고향을 짓밟겠나?”

“고럼 고럼. 아무리 귀장군이라도 그럼 쓰나.”

“그나저나 요즘 아씨께서 아주 편찮으신 듯허이. 안색이 좋질 않으셔.”

“혼례를 올리기도 전에 몸져누우시면 아니 될 텐데.”

그들은 아씨를 안타까워했으나, 개중 누구도 혼인을 물리자고는 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귀장군이 쳐들어오는 것보다야 아씨 한 명을 보내는 게 모두를 위한 길이니.

아무개가 보기에 저들은 진정 아씨의 건강을 염려하기보다는, 건강 문제로 혼사가 물 건너갈까 두려워하는 쪽에 가까웠다. 아무개는, 노비는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손바닥에 핏기가 가시고 하얗게 질리도록.

한낱 노비의 심경과 무관하게 혼례 준비는 순조로웠다. 신랑의 사주단자가 도착하고 신붓집에선 택일단자를 보냈다. 마침내 함진아비가 신붓집에 들어섰다.

유시(酉時). 낮과 밤이 엇갈리는 시각. 함진아비가 저녁놀을 등지고 왔다. 마른오징어를 가면처럼 쓰고 실랑이 벌이는 모습에 모두들 깔깔대고 웃었건만, 아무개는 조금도 웃을 수 없었다. 섬섬옥수가 납폐함 깊숙이 사라지는 걸 끝으로.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어 뒤돌아 가 버렸다. 그날 밤.

“······아씨?”

아무개는 담을 타 넘는 술사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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