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아무개는 목화도 벗지 않고 대청에 털썩 드러누웠다. 푸른 단령이 넓게 흐트러지고 사모가 벗겨져 데구르르 굴러갔다. 천장의 들보를 물끄러미 보며 아무개가 중얼거렸다.
“이건 좀··· 아닌 것 같아.”
화촉을 밝히고 원앙금침에 몸을 누인 후 다시 눈을 뜨면 혼례가 한창이다. 이게 벌써 몇 번째던가. 열셋? 열다섯? 여하간 열 번을 넘겼음은 틀림없다. 첫 혼례에서 대실패를 거둔 술사는 이제 술을 마시는 척하며 몰래 버리기의 달인이 되었다.
「아버지께선 생에 가장 행복한 순간을 영원토록 꿈꾸고 싶다 하셨답니다. 그날은 바로 어머니와의 혼례일이었죠.」
가장 행복한 순간, 혼례일을 영원토록.
아무개와 술사는 이 하루의 꿈에 갇히고 말았다.
“서방님.”
이제는 서방님 소리에 자연스레 반응하게 된 아무개가 벌떡 일어났다. 눈을 가린 비단을 풀고 간만에 삿갓을 쓴 술사가 연못가에서 손짓했다.
“이리 와 보시겠어요?”
쪼르르 다가가자 술사가 무릎 한쪽을 굽혀 앉았다. 아무개도 덩달아 웅크려 앉았다.
“이거, 보이시나요?”
술사의 옆모습만 빤히 보던 아무개는 그의 손짓을 따라 연못으로 시선을 돌렸다. 곧게 뻗은 술사의 손은 끝에 자리한 손톱마저 가지런하고 반듯했다. 그 너머로 잉어 한 쌍이 느리게 헤엄치고 잔잔한 파문이 번지는 수면에는.
“······?”
낯선 여인의 얼굴이 비치었다.
붉은 활옷에 면사를 두른 삿갓, 비녀에 댕기를 감아 양어깨 위로 내린 모양까지. 술사와 같은 행색을 하였으되 얼굴은 전혀 다른 여인이 수면에서 자신을 응시했다.
“어어···?”
그 옆에는, 푸른 단령을 입은 남성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무개와 동일한 표정으로.
아무개는 제 뺨을 꼬집어 보았다. 수면에 비친 남성도 자신의 뺨을 꼬집었다. 옆에서 술사가 손을 내어 만류했다. 수면에서는 여인이 남성을 말렸다.
“꿈장수··· 부모일까?”
“그럴 거예요. 주술적으로 물은 순수와 정결, 참을 뜻하니까요. 아마 꿈속의 다른 분들께는 저희가 이 모습으로 인식되는 듯싶어요.”
현실의 본래 의식을 유지하는 아무개와 술사, 소영과 재효 네 사람에게는 서로 본모습이 보였다. 하나 꿈장수가 안배한 몽중의 인물들에겐 달랐다. 그리하여 본 역할에 어긋나는 언행을 하면, 즉시 예의 정적이고 무감한 시선을 보내왔고.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어요.”
그동안 눈을 가리어서 몰랐는데, 하고 술사가 수면을 가리켰다.
“연배가 조금 있으신 듯하죠?”
듣고 보니 그랬다. 수면에 비친 눈매와 입가에는 세월의 흔적이 주름져 남아 있었다.
아무개는 파리한 안색으로도 숨길 수 없는 고운 미색의 여인을 물끄러미 보았다. 초면일진대 묘하게 낯이 익었다. 왜일까.
“슬하에 자녀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데···.”
고민하던 아무개는 술사의 혼잣말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자녀라고?
“있···을지도 몰라.”
아무개는 첫 혼례 당시를 회상했다. 합근례 도중 취한 술사가 모든 걸 부서트리고, 군중이 서둘러 도망가던 그때. 소영의 품에 안겨 엄마를 부르짖던 꼬마. 수면에 비친 여인과 꼬마가 제법 닮았던 것이다.
아무개는 안대로 눈을 가려 보지 못했을 술사에게 자신이 목격한 것을 설명했다. 술사는 긍정적인 반응을 하였다.
“어쩐지. 어린아이 장난감이 있더라니.”
색실공을 한 손으로 가볍게 던졌다 받으며 술사가 확증을 더하자 아무개는 재차 눈을 키웠다. 저건 또 어디서 찾은 걸까. 수차례 혼례가 반복되는 동안 아무개는 보지도 못했건만. 그는 방금 막 안대를 풀어헤치고서 잘도 찾아냈다.
“집에 아이가 없는 거로 보아 어디 다른 곳에 맡겼겠지요? 혼롓날이니만큼 이 하루는 부부끼리 보내고 싶어 그리하였을 테고.”
휘리릭. 색실공이 술사의 손 위에서 팽이처럼 회전했다. 아무개는 공을 세 번째 손처럼 자유로이 가지고 노는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이대로는 아니 된다. 끝없이 반복되는 몽중에 언제까지 갇혀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무언가 방법을 찾긴 해야 할 터인데.
“어우, 죽겠다아.”
그때 염재효가 앓는 소리를 내며 담을 타 넘었다.
“드디어 성공하셨네요.”
꿈속에서 재효의 역할은 일꾼이었다. 혼례 준비나 뒤처리 등으로 정신없는 중에 시간을 내기란 쉽지 않았다. 슬쩍 뒤로 빠지려고만 하면 누가 잡아채는 바람에.
“소··· 저는 아직 못 오셨나 보오?”
소영이라 부르려다 서둘러 말을 바꾼 재효에게 술사가 미소했다.
“어투가 변하셨네요.”
“이런 씨. 원래 말투 쓰면 자꾸 고상한 척하지 말라고 지랄해서 어쩔 수 없었어! 요!”
염재효는 상스러운 표현을 종종 쓰곤 했으나, 그래 봐야 곱게 자란 세가 도령이었다. 온갖 쌍소리가 판을 치는 상놈들에게 재효의 말투는 낯간지러운 지경에 지나지 않았다.
十八 二十八 十八 十八 염불 외듯 하던 재효가 흙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마침 중문 너머로 소영이 들어왔다. 둘은 서로를 발견하고는 놀라워했다.
“처음으로 모두 모였네요.”
각자 자신이 맡은 역할에 자연스레 녹아들려다 보니 시간 맞추기가 어려웠다. 특히 재효 쪽이.
어쨌거나 간신히 모인 그들은 각자 위치에서 알아낸 정보를 공유하였다.
“저는 이 댁 부부가 아이를 맡긴 포목점 주인입니다.”
소영이 이 사실을 알아낸 건 여덟 번째 혼롓날이라 한다. 그 후 줄곧 말을 전하려 했으나 통 기회가 나질 않아 오늘은 아예 점포를 닫아 버리고 왔다.
“두 분의 아이, 꿈장수와··· 제 아이들이 친한가 봅니다. 혼례에 잠시 참석하고 저녁까지 놀러 나간 바람에 늦게 알아차렸습니다.”
혼인은커녕 약혼도 않은 소영에게 아이 여럿을 키우는 부모 역할이 불쑥 주어졌다. 여태 어색한 듯 소영이 말을 늘어뜨렸다.
“혹시 첫 혼롓날 직접 안고 도망친 그 아이인가요?”
“어찌 아셨습니까?”
술사가 정확히 콕 집어 언급하자 소영이 놀라 되물었다. 아무개의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소영은 자신이 찾아온 정보를 그들이 이미 추측해 냈다는 점에 약간 아쉬움을 느꼈다.
“한 번은 아이를 붙잡고 부모님께 관해 물은 적 있습니다. 특별한 소득은 없었습니다만.”
소영이 부부에 대해 알아낸 사실은 이러했다.
첫째로, 아내가 몸이 약하다. 특히 올 초에는 아예 몸져누워 버린 바람에 아이도 남편도 많이 힘들어하였다고.
둘째로, 남편이 아내를 극진히 모셨다. 부부 사이가 아니라 주종관계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셋째로, 아이는 부모 둘 중 누구도 닮지 않았다. 어른들이 널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 놀릴 적에 정말로 믿고 펑펑 울어 버렸을 만큼.
“······아닌데···?”
아무개가 소영에게 답했다. 비록 반문이었으나, 어쨌든 소영의 존재를 취급해 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애··· 엄마 닮았는데···?”
술사는 일행을 연못가로 이끌었다. 서로의 모습을 수면에 비춰보며, 술사는 붉은 활옷을 입은 중년 여인을 가리켰다.
“어떤가요. 아이와 어머니가 닮았나요?”
눈을 가리었던 술사는 보지 못하였으니. 대신 다른 이들에게 확인을 부탁했다. 소영이 눈을 크게 떴다.
“네. 닮았습니다. 이 정도면 모친이 틀에 넣어 찍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소영이 심각한 논조로 평하자 재효가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이 동네 사람들은 죄다 눈이 삐었나? 모자가 똑 닮았는데 왜 그럴 소릴 한대?”
“마을주민뿐 아니라, 아이 또한 저가 부모와 닮지 않았다 여긴다. 그 때문에 우울해하였지.”
아이, 즉 어린 꿈장수를 가까이서 직접 돌본 바 있는 소영의 확언이다. 이게 어찌 된 일일까.
“에휴. 나는 그다지 건진 게 없어.”
일꾼 염재효가 투덜거리며 서두를 뗐다.
“남편이 엄청난 애처가라네. 아내분 건강이 썩 좋지 못하다는 거, 주종인 양 부인을 깍듯이 뫼시는 것도 이미 말했고··· 남편만 부인에게 존대를 한대. 참, 그리고 이 고을 출신이 아니라는 거? 어느 날 돌연 이사를 왔다더라.”
아무래도 전란이 한창이라 타지에서 유입되는 사람들이 많다 한다.
“사는 게 팍팍해서 저자의 상인들이 만만해 뵈는 외지인 부부를 등쳐먹으려고 작정했는데, 이 동네 시세며 지리까지 토박이 수준으로 잘 알아서 실패했다더라.”
마을 사정을 훤히 꿰고 있는 외지인 부부. 슬하의 자녀가 모친을 쏙 빼닮았음에도 모두 입을 모아 닮지 않았다 주장하는 것.
조각조각 흩어진 정보들. 잘 이으면 무언가 나올 법도 하나, 지금으로선 알알이 흩어진 구슬이었다. 꿰기 전까지는 서 말이라 해도 보배가 될 수 없는.
“슬슬 불러 볼 때가 된 듯싶은데, 어떤가요?”
삿갓을 매만지며 술사가 하는 말에 재효가 반문했다.
“뭘 부른단 거예요?”
“물론, 꿈장수님이지요.”
아무개는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가··· 불러낼 수 있어?”
“이 꿈의 토대를 제공한 장본인이시잖아요. 분명 저희를 지켜보고 있을 거예요.”
⎯ 맞습니다!
웅웅. 두개골 안쪽에서 울리는 듯한 외침. 예고도 없이 불쑥 내리꽂힌 꿈장수의 의념에 일행이 소스라쳤다.
⎯ 여러분이 열심히 삽질하는 모습. 잘 봤습니다요.
“아니 저 새끼 분이?”
세가 도령으로 나고 자라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던 막노동을 감내했던 재효가 뻗치는 울화를 참지 못했다. 주먹을 불끈 쥐고 하늘을 향해 치켜드는 그 행동에 꿈장수가 깔깔 웃었다.
⎯ ······후우, 후아···. 너무 웃었다. 푸흡, 키킥···
일견 참아 보려는 듯하나 여전히 경박하고 시끄러운 웃음에 아무개의 눈매가 희미하게 좁아졌다. 뭐라 할까. 그들의 손이 닿을 수 없는 현실에 남아 안전이 보장되고서야 본색을 드러낸 듯싶었다.
⎯ 실은 몇 번이나 말을 걸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 참았습니다요. 손님들 몰입이 떨어질까 봐서요.
이 또한 결국은 상상의 영역인지라. 이곳이 단지 몽중일 뿐, 현실이 아님을 강하게 자각할수록 꿈의 형태를 유지하기 힘들어진다고. 꿈장수가 토로했다.
⎯ 아무리 그래도 유랑술사 나리께는 정말이지 감탄했습니다요. 혼례복을 입고 신부가 되셨는데 어찌 그리 태연하신 겝니까? 너무 자연스러우셔서 제가 기절초풍할 뻔했습죠!
“그야 의도가 보이니까요.”
미소한 술사가 이어 말했다.
“이 꿈은 전주님 홀로 구성하시기엔 규모가 상당하지요. 저와 다른 분들께 영력을 나눠 받아 유지시키는 중일진대, 하면 당연히 꿈의 핵심부에 영력이 가장 넘치는 쪽을 심어야겠죠.”
그래서였구나.
아무개는 지금에서야 술사와 자신이 이 꿈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부부가 된 까닭을 알게 되었다.
⎯ 역시. 유랑술사는 자잘한 설명을 생략해도 척척 다 아시는군요.
과장된 탄성을 내뱉은 꿈장수가 겨우 본론에 들어갔다.
⎯ 하여간에 저는 어쩐 일로 찾으신 겝니까?
“저희에게 보여 주신다는 꿈은 이 혼롓날이 전부인가요?”
⎯ 일단은 그렇습죠? 신령님께서 과거 아버님께 선사한 꿈을 빌려주신 거라서요.
“그럼 몽환의 신령께서 허락하신다면, 다른 꿈도 보여 주실 수 있다는 뜻인가요?”
⎯ 오오! 미처 생각을 못 해 봤습니다만, 아주 불가능하진 않을 듯하네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꿈장수의 의념이 끊기고, 술사가 입을 열었다.
“몽환의 신령이라고 하였지요.”
그는 마주 잡은 손에 깍지를 꼈다.
“꿈장수라는 호칭 때문에 ‘몽’에만 신경을 썼어요. 한데 여러분의 이야기를 듣자니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술사가 고개를 들었다.
“몽환(夢幻)이 한 단어가 아니라, 몽(夢)과 환(幻)인 게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