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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혼설 (23)화 (23/138)

23화

“악몽을 꾸는 거라면, 차라리 깨워드리는 편이 낫지 않을까 했어요.”

잠들지 않으려고 일부러 벽에 기대앉았건만. 앉은 채로 깜빡 졸아 버린 듯싶었다.

“······술사님.”

“네.”

“나는··· 안 자. 그러니까··· 혹시라도, 내가 잠들면······ 주저하지 말고 깨워 줘.”

술사는 잠시간 아무개를 응시했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모습이 가만있어도 미소 지은 듯했다. 그의 얼굴은 어떤 순간에도 느긋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아무개 님께서 수면이 불필요한 존재는 아니지요?”

“으응··· 내가······ 안 자고 싶어서, 안 자는 거야···.”

“어째서인가요?”

아무개는 망설였다.

나는 잠을 자면 반드시 꿈을 꿔. 한데 그 꿈이 하나같이 엉망진창이야. 괴롭고 힘들고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것밖에 없어. 허구조차 아니야. 명백히 실존했던 자들의 기억이지. 마치 이 기억, 이 감정을 결코 잊어선 아니 된다 강요하듯이.

그렇게 꿈에서 깨어나면, 나는······

“말하기 싫으면 하지 않으셔도 돼요.”

침묵이 길어지자 술사가 물러날 기미를 보였다. 아무개는 어쩐지 다급해져 서둘러 입을 열었다.

“꿈! 꿈을, 꾸는데···.”

“꾸는데?”

“······안 좋아. 그래서··· 자기 싫어.”

대강 얼버무렸더니 잠투정하는 어린아이 같은 모양새가 돼 버렸다. 아무개는 말 한번 또박또박 조리 있게 못 하는 스스로에게 자괴감이 들었다.

“아무개 님 눈 밑이 어두워요. 처음 뵀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술사는 제 눈가를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평소에도 멍하게 넋 놓고 있다 반응이 늦죠. 말을 할 때도 더딘 편이고. 하나 다른 술사들을 제압하실 때 보여 준 모습을 고려하면, 원래 둔하거나 느린 편은 아닌 듯해요.”

그는 하루 이틀 만에 알아낸 사실을 조목조목 짚어 냈다.

“계속 잠을 자지 않으면, 몸에 심한 부담을 줄 거예요.”

세상에는 수면이 불필요한 신령이 널리고 널렸으나, 안타깝게도 아무개는 해당되지 않았다. 만성적인 수면 부족에 시달리는 흉신은 가만히 고개만 주억였다.

“다른 방법을 찾으셔야지 않을까요.”

반사적으로 고개를 까딱이려던 아무개의 목이 덜컥 멈췄다.

“다른··· 방법?”

그런 게 있기는 하려나.

더듬더듬 생각의 흐름이 뚝뚝 끊겼다. 아무개는 멍하니 방법? 다른? 다른 방법? 하고 반복했다.

“문제는 수면이 아니라 악몽이잖아요? 그러니 꿈을 손보면 될지도 몰라요.”

어슴푸레한 동이 텄다. 새벽의 푸르스름한 빛이 창호지를 넘어 아른거렸다. 낮과 밤이 뒤바뀐 함 장군 댁 아씨는 그새 잠이 든 건지 아무개의 시야는 까무룩 하기만 했다.

“주경 인근이던가, 꿈장수가 있다고 들은 적 있어요.”

“꿈··· 장수······?”

밝은 어둠 속에서 아무개는 그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꿈을 사고파는 장사꾼이라지요. 저도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요.”

꿈을 사고파는 건 일상에서 평범한 사람들도 간혹 장난처럼 하는 일이다. 하지만 업으로 삼아 전문적으로 한다니 제법 신선했다. 먼 옛날에 어느 강물을 제 것이라 속여 비싸게 팔았다던 희대의 사기꾼이 생각나지 않나.

“주경은 산삼으로도 유명한 곳이죠. 전에 가 본 적 있으니 축지로 금방 도착할 수 있을 거예요.”

아무개는 별다른 기대가 없었으나, 술사가 제게 보여 주는 호의가 좋아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던 중 불현듯 의문이 들었다.

“술사님···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 줘?”

유랑술사가 남녀노소 불문곡절하고 조건도 대가도 없는 선의를 베푸는 것쯤은 안다. 단언컨대 아무개보다 더 잘 아는 이는 없을 터였다.

그런 아무개조차도. 근자에 술사가 제게 보인 친절은 조금··· 아니, 상당히 과분하지 않나 싶었다. 그에겐 자신이 생면부지나 다름없을 텐데.

“흐음. 글쎄요?”

막상 장본인인 술사는 별다른 자각조차 없었던 듯했지만.

“굳이 이유를 꼽자면, 옛 친구와 닮아서려나요.”

“······친구?”

“네에. 단금지교하는 사이는 아니지만, 저를 벗이라 칭한 유일한 사람이라서요. 조금 신경이 쓰였던 걸지도 모르겠네요.”

설마 얼굴 덕을 보게 될 줄이야. 당혹스러운 한편, 뿌리 깊은 안도가 내면에서 차올랐다. 만에 하나 이 얼굴이 아니었다면······ 상상만으로도 모골이 송연했다.

“기침하셨습니까.”

으슬으슬 소름 돋은 몸을 그러안던 중. 밖에서 소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난날 주막에서 극적인 타협을 이룬 후. 세가의 술사들은 유랑술사와 아무개를 전담하여 감시할 이를 뽑기로 했다. 당연하게도 무진 힘들고 고단한 일이 될 터라 나서서 원하는 자가 별로 없었다.

결국 처음 화두를 꺼낸 당사자이자 단둘뿐인 지원자, 소영과 재효가 감시자 겸 동행인이 되었다. 술사가 일어나 문을 열었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몸은 좀 어떠신가요?”

대강 합의를 마친 후. 수호단의 효과가 다한 순간, 소영을 비롯한 세가의 술사들이 기절하듯 쓰러져서 또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흔한 고뿔 한 번 걸린 적 없던 건강체, 석소영도 하루 종일 몸져누워야 했다.

“괜찮습니다. 버틸 만합니다. 그리고 저희 집안에선 모두 이 시각에 기상합니다.”

“성실하시네요. 염 공자께선 아직 취침 중입니다만, 깨워드릴까요?”

“아닙니다. 재효라면 당연히 자고 있을 줄 알았습니다. 아침잠이 많으니까요.”

소영이 이른 새벽부터 찾을 상대라면, 당연 염재효이리라 여긴 아무개는 의아해졌다. 유랑술사도 같은 생각을 했으리라.

“하면 무슨 일이신지요?”

“귀인··· 선배님과 따로 나누고픈 이야기가 있습니다. 혹 지금 괜찮으십니까?”

동행이 결성되자 남은 것은 호칭 정리였다. 유랑술사는 ‘귀인’이 너무 거창하다며 사양했다. 소영이 까마득한 배분의 귀인을 평범하게 부르는 것도 이상하다 반론하자, 유랑술사는 하하 웃으며 ‘그리 따지면 조상님이라 불러야지 않을까요?’라는 파격 선언을 함으로써 선배님과 후배님이라는 평이한 호칭을 얻어 냈다.

“저는 언제든 상관없으나···.”

술사가 고개를 뒤로하여 방안을 돌아봤다. 지난날 흉신이 허튼짓을 감행하는지 밤새 감시하겠다며 눈을 부릅뜨던 재효는 배까지 내놓고 퍼질러 자는 중이었다. 반대편에서는 진정 밤을 새우다시피 한 아무개가 멀뚱멀뚱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고.

“술사님··· 괜찮아.”

“뭐가요?”

“술사님이··· 이야기하고 올 때까지······ 안 죽일 테니까.”

걱정할 필요 없다고 안심시키려던 건데. 어째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열린 문틈으로 굳어 버린 소영의 낯을 보지도 못했으나, 아무개는 주저하며 덧붙였다.

“···정말이야.”

태어난 이래 줄곧 살심을 억눌러 온 아무개다. 술사가 소영과 이야기 나누는 동안 참는 것쯤은 어려운 일도 아니다. 어차피 염재효는 한창 자고 있으니 별일도 없을 테고.

코 고는 소리가 거슬려서 죽이고 싶어질지도 모르나, 그 정도는 무어. 이불이라도 뒤집어씌우면 해결될 터. 아무개는 굳게 다짐하며 팔짱을 단단히 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술사는 신장보다 너무도 작은 문으로 나가고자 허리를 한껏 굽혔다. 문지방을 넘어 툇마루에 선 그의 뒤로 장지문이 닫혔다.

의관을 정제할 필요도 없었다. 애초에 옷을 갈아입지도 않았으므로. 밤새 뜬눈으로 지새운 아무개는 알았다. 새벽녘 자신이 깜빡 졸기 전까지도 술사는 잠들지 않았다. 하나 유랑술사의 말끔한 얼굴에선 피로한 기색을 일절 찾아볼 수 없었다.

석소영은 술사와 함께 주막을 벗어났다. 갈대와 싸리를 엮어 만든 울타리를 따라 걸으며 소영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저는 가풍에 따라 1)묘초에 기상하는 것이 습관입니다만, 오늘은 그보다 일찍 눈이 떠졌습니다.”

바자울에 가리어진 주막을 돌아본 소영이 눈을 감았다.

“살기가 느껴진 탓입니다.”

이른 새벽. 잠에 취해 혼곤한 정신을 단숨에 일깨울 만큼, 피부를 저밀 듯 선명한 살기가.

“선배님과 재효가 머문 방에서 느껴졌습니다. 저는 그 살기가 흉신에게서 비롯된 게 아닐까 싶습니다만.”

제 추측이 맞습니까?

소영은 진정 의문이 들어 여쭤본 게 아니다. 자신이 내린 답안에 확신을 줄 근거를 원할 뿐.

“후배님께서 무얼 느끼셨을지 짐작 가는 바가 있습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더니 동이 틀 무렵에서야 벽에 기대앉아 꾸벅꾸벅 졸던 아무개. 얼마 지나지 않아 괴로운 신음을 흘리던, 메마른 입술. 무언가 피하려는 듯 몸을 한껏 웅크리고서 연신 움찔하며 앓던 얼굴. 보다 못해 다가가 부르자 그제야 눈을 뜨던.

“아무개 님께서 잠깐 선잠이 드셨는데, 그새 흉몽을 꾼 모양이에요. 눈을 뜨시고도 기분이 썩 좋지 않아 보였어요.”

“악몽이 문제였던 겁니까?”

얼마나 끔찍한 악몽이기에 그리 지독한 살기를 내비치는가. 미심쩍은 부분이 아주 없진 않았으나, 얼추 말이 되는 듯하여 소영은 납득했다.

“악몽에서 깨어난 후 현실을 인지하고 살기를 거둔 거로군요. 어쩐지 너무 일찍 사그라들었다 했습니다.”

아니. 그건 아니다.

술사는 보았다. 곱게 내려앉은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치켜 올라간 후. 색채가 뒤바뀐 듯 까맣게 물든 공막과 하얗게 번뜩이던 홍채. 그 역안에 담긴 것은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분노와 방향을 잃은 증오, 뚜렷한 살의였다. 방금 막 일어나 흐린 정신으로 초점을 잃은 눈동자가 품었다고는 믿기 어려우리만치 짙고 어두운 감정이.

눈 녹듯 홀연히 사라졌다.

잠에서 깨어나 살기를 거둔 게 아니다. 흉신은 유랑술사의 존재를 인지하자 저절로 기운을 흩트렸다.

“이만 돌아갈까요?”

술사는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의 제안에 소영이 묵묵히 따랐다.

“참, 저희 다음 목적지가 생겼어요. 혹시 꿈장수에 대해 들어 보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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