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보다 못한 재효가 또다시 빽 소리치자 소영이 다시 나섰다.
“실력 면에서나 상호 관계로 보나. 저희보다는 귀인께서 흉신을 잘 통제하실 겁니다. 만약 귀인께서 흉신을 책임지고 맡으시겠다면, 저는 동의합니다.”
“소영아아⎯”
“어찌 됐든 자유롭게 풀어 두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요. 하지만 죄송하게도, 흉신의 말이 진심인지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소영이 단호한 눈으로 직시해 왔다.
“지켜보게 해 주십시오.”
“······엥?”
사전에 합의된 사항이 아닌지 염재효가 얼떨떨한 반응을 보였다.
“실제로 흉신이 귀인의 통제하에 안전한지 확인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만일 흉신이 통제 불능의 악이라 판단되면, 그때는 귀인께서도 저희를 막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그래! 거머리처럼 찰싹 달라붙어서 감시해 주마!”
더는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아무개는 피곤으로 절은 눈가에 짜증과 경멸을 담아 두 사람을 흘겨보았다. 어차피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파리 두 마리가 앵앵대며 거슬리게 구는 것 같았다.
“아무개 님은 어떠세요?”
죽일까.
“저랑 같이 가시겠어요?”
“······으응?”
저것들을 영원히 치워 버릴까 고민하던 찰나. 술사가 가벼운 어조로 제안했다. 그 순간, 아무개의 마음을 채워 가던 어두운 충동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지금, 뭐라고···?
“어느 정도 합의점이 나온 듯싶어서요. 아무개 님이 저와 함께 가시면, 감시자가 붙는 조건하에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겠네요.”
“······술사님이랑, 같이?”
“네에. 싫으세요?”
아직 대답도 않았건만. 술사는 만약 싫으시다면, 하고 먼저 뒷일을 예견했다.
“싫으시다면 협상은 결렬. 저분들은 또 당신을 봉인하려 들 테고, 저는 막아야겠지요.”
“내 눈이··· 돌아올 때까지?”
“당신의 시력이 돌아올 때까지.”
앵무새처럼 따라 외는 술사의 답을 곱씹으며 아무개가 물었다.
“······감시자가 있으면··· 뭐가 좋아?”
“하하, 좋은 점이 있을 리가요. 불편하고 귀찮고 번거롭겠죠.”
술사의 웃음소리에 홀린 아무개는 ‘저것들 다 치워 버리고 술사님이랑 둘이서 가면 안 돼?’라고 묻고 싶은 걸 겨우 참아 냈다.
유랑술사가 곁에 머무는 이유는 ‘자신 때문에 시력을 잃은’ 특수한 상황에 놓인 아무개를 보호하고자 함이었다. 아무개의 눈이 돌아오는 순간, 더는 함께할 이유가 없었다. 그가 스스로 말한 도의적 책임을 다한 셈이므로.
하지만 세가 술사들은 흉신을 공격하고 무해함의 증명을 요구했다. 그 때문에 술사는 아무개를 무해한 상태로 유지하고자 동행을 제안했다.
다시 말해 저것들이 없으면, 술사님도 없다.
저것들을 달고 다니면, 짜증 나고 성가실 테지만··· 술사님이 있다.
재고 따지고 할 것도 없다. 이건 다시 오지 않을 엄청난, 천금 같은 기회였다.
“······좋아.”
수면이 부족해 늘 몽롱하던 머리가 맹렬하게 돌아갔다. 아무개는 제게 다가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술사님이랑 갈래.”
***
보잘것없는 초가삼간이 허물어지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다.
작고 허름하나 다섯 식구가 비바람을 피할 수 있게끔 해 주던 집은 너무도 손쉽게 무너졌다. 엉엉 우는 아이들을 두 팔로 끌어안으며 아내가 소리 없이 눈물만 뚝뚝 흘렸다.
또 잠이 들었나 보다. 이런 꿈을 꾸는 걸 보니.
아무개는 이 몸의 주인이 군졸에게 항의하는 것을, 발에 채여 흙바닥을 뒹구는 것을, 아내가 헐레벌떡 달려와 싹싹 비는 것을 보았다. 아이들의 울먹임과 옆집, 옆옆집이 연달아 무너지는 소리도 들었다. 삼킨 모래알과 토해 낸 각혈이 입안에서 뒤섞인 비릿한 까끌함을 맛보았다.
혹여 주민들이 들고일어날세라. 우려한 군졸들이 본보기 삼아 두드려 팬 탓에 전신이 욱신거렸다. 볼썽사납게 웅크린 채 몰매를 맞으며 아무개는, 아무개가 깃든 육신은 부러진 이 조각을 뱉었다.
“대체 왜 이런답니까?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마을을 싹 다 밀어 버리는 거냐고요!”
울분에 찬 물음이었으나 어떤 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몰랐으니까. 산기슭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가난한 이들의 마을이 어찌 이리 무너져야 하는지. 그들 중 누구도 알지 못하였다.
집을 헐고 주민들을 내쫓은 그곳은, 어느 귀한 분의 사냥터가 되었다.
“제발 한 번만 봐주십시오, 나리.”
이번에는 여인의 몸이다. 아무개는 거칠고 주름진 손을 마주 잡고 사정하는 여인의 눈을 통해 주변을 살폈다. 구석 모퉁이에는 어린 아들이 불안하게 눈을 굴렸고 바로 앞에는 턱살이 두 겹으로 접힌 관원이 번거롭다는 듯 인상을 써 댔다.
“열두 살밖에 안 된 아입니다. 저희 큰아들은 궁을 짓는 데 동원됐고, 작은아들은 부역을 치르러 갔습니다. 제발 이 애만은···.”
“쯧, 말을 그리하면 쓰나. 허면 내가 나쁜 놈이라도 된 것 같잖은가?”
전하께서 기거하실 궁을 제 손으로 직접 세울 수 있다니, 이 얼마나 영예로운 일인지. 감히 폐하의 은덕을 모르고 난리를 일으킨 무지렁이들을 토벌하는 것은 또 얼마나 숭고한 일이고?
관원은 이미 몇 차례나 반복한 듯 쉼 없이 줄줄 내뱉었다.
“미천한 신분에 나라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 일할 기회를 주심에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억지로 끌고 간 듯이 말하고 그러면 되겠나, 응?”
아무개는 생각했다. 억지로 끌고 간 거 맞잖아. 그렇게 좋고 감사하면 너나 하던가.
이 작자가 말은 탈 줄 알까? 칼은 써 본 적 있을까? 활시위를 당길 줄은 알까? 허리춤의 두툼한 뱃살과 굳은살 없이 맨들맨들한 손은, 그가 걸친 무관복을 무색하게 했다. 평생 무예라곤 익혀 본 적도 없는 이가 뇌물을 써서 한자리 차지한 것일 테지.
“말로만 이럴 게 아니라, 성의를 보인다면 내 사정이 딱하여 모른 척해 주었을 텐데 말일세. 생각이 없는 듯하니 나는 이만···.”
“어휴, 어인 말씀이십니까. 생각이 없다니요? 얼마든지 드릴 수 있습니다. 단지 시간만 조금 주시면······.”
안타깝게도 이번 몸의 주인은 품팔이로 간신히 입에 풀칠이나 하는 처지였다. 관원에게 성의 표시할 돈 따위가 있을 리 만무했다. 아무개는 금세 눈치챘다.
도망치려는 게로구나. 지금 순간을 어찌저찌 모면하고서. 당장 오늘 밤에라도 야반도주할 셈이네.
하나 이런 치들을 하루에도 몇이나 상대하는 감독관은 어설픈 거짓 변명에 속아 주지 않았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털어먹을 게 없음을 안 그는 할당량을 채우고자 열두 살 아이를 끌고 갔다.
머리가 어지러우리만큼 오열하는 여인의 안에서 벗어난 아무개는, 또 다른 이에게서 깨어났다. 그는 따갑게 내리쬐는 볕 아래 비지땀을 흘리며 한참 노동했다. 근방에는 간신히 허리춤을 넘어선 돌벽이 보였다. 성벽을 쌓는 중이다.
“예서 무얼 하는 게지?”
문득, 육신의 주인이 뻑뻑하게 마른 입술을 열었다.
“세금도 부역도 없을 거라지 않았나. 한데 어찌 이래?”
근방에서 유명한 건달 놈과 곁에서 연신 바람을 넣던 먹물쟁이가 지껄였다. 이게 사람 사는 꼴이냐고. 허리가 굽어지고 뼈가 으스러지도록 일해도 배곯는 판국에. 굶어 죽은 시체 내장까지 빼먹으려 드는 구더기가 나랏일 한답시고 관복 입고 득실거리는 걸 가만 내버려 두느냐고.
세금도 부역도 병역도 없이 공평히 잘살자는 말에 혹해서, 굶어 죽으나 맞아 죽으나 도긴개긴이라, 모두가 합심하여 들고 일어났다. 관아의 널문을 쳐부수고 들어가 현감을 흠씬 두들겨 패고 쫓아냈다. 그간 시달릴 대로 시달린 촌부들은 손뼉 치며 환호했다. 도성 물 좀 먹었다는 먹물쟁이는 건달 놈을 장군이랍시고 추켜세웠다.
한데 무언가 이상했다. 병역은 없으나, 산적 놈들에게서 고을을 지켜야 한다며 젊은 청년을 죄다 데려갔다. 세금은 없지만, 추수한 곡식을 싹 걷어가고는 공평하게 나눈다며 개미 눈물만큼 주었다. 부역은 없으나, 농번기가 지나자마자 길도 닦고 성벽도 쌓아야 했다.
심지어 요번에는 건달 장군님이 기거하실 곳을 새로 만들어야 한단다. 말로는 아니라 하는데 어찌 생활은 전과 똑같다. 아니, 배로 힘들었다. 나를 둘러싼 세상을 바꾸고 싶었건만, 내 머리 꼭대기에 앉은 놈만 달라졌다.
하나 자칫 불평불만을 입에 올렸다간 큰일 난다. 저 밖에는 관복 입은 도적놈과 산적들이 우글거리는데. 너희를 지켜 주는 장군님과 병졸에게 감히 건방지게 군다고.
“왜 놀고 있어? 빨리빨리 일 안 해?!”
버럭버럭하는 고함에 깜짝 놀라 허둥지둥했다. 아무개는 이 육신의 주인이 모르는 사실을 하나 떠올렸다.
나라는 이미 망했다. 크고 작은 소국과 변방의 민족을 품에 안은 연나라가 무너졌다. 들고 일어난 지방 세력이 한둘이 아니건만, 황실에선 반란을 진압할 군을 파견할 여력조차 없었으므로. 이 사실을 미리 알던 먹물쟁이가 건달을 부추겨 이 지경을 만들었다.
⎯ ······좀··· 요···?
이후 다환에서는 크고 작은 분쟁이 연달아 벌어진다. 각 지방 고을에선 스스로 왕인 양 행세하는 패자가 우후죽순 나고 사라졌다. 혼탁한 세상 속 풍파가 그칠 줄을 몰랐다.
⎯ ······아무···. ······세요.
이백 년 후. 다환을 통일한 패왕이 나타날 때까지.
⎯ 아무개 님.
깜빡. 눈이 떠졌다.
콧잔등을 간질이는 너울의 감촉에 아무개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이 위치에서 이 감각이라면, 지금 술사는 바로 앞에 있는 것과 진배없다. 그리 생각하니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듯하였다.
“괜찮으신가요?”
아무개가 대강이나마 정신을 차린 듯하자 술사가 물러섰다. 아직 시력을 돌려받지 못한 아무개는 너울의 감촉으로 어림짐작했다.
“잠든 지 얼마 안 되셨으니 주무시게 놔두려고 했는데. 자꾸 앓으셔서요.”
앓는다니? 아, 마지막에 성벽을 쌓던 이가 매질 당할 적에 덩달아 신음한 모양이다. 꿈은 단지 꿈일 뿐. 실제 아무개의 몸에는 어떠한 상처도 흔적도 남지 않았으나, 고통만은 여실히 느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