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새로 내오라 청을 드릴까요?”
술사의 물음에 아무개는 풀이 죽어 고개 살랑살랑 젓고는 묵묵히 수저를 놀렸다.
“소용없어. 어차피··· 나 때문이니까.”
“밥에서 돌이 나오고 국에서 계란 껍데기가 나온 것을 두고 손님 탓이라니. 어인 말씀이신가요.”
“······정말이야.”
머뭇머뭇 수저를 내려놓은 아무개는 술사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도 어쩐지 시선을 들 수가 없어 눈을 내리깔았다.
“내가··· 태생적으로 지닌 속성 중에······ 불운이 있어. 예기치 못한 사고나 재앙은, 결국······ 운이 없어 당하는 거니까.”
염재효는 생각했다. 흉신의 설명만 들으면 중차대하고도 심각한 사안인 듯한데. 정작 그 불운이란 놈이 밥과 국에 든 돌과 달걀 껍데기라니, 참 없어 뵌다고.
“······어쩔 수 없어··· 그리 타고난걸.”
원래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아무개는 웅얼거렸다.
이 나간 찻잔에 베인 것, 밥에 든 돌이나 국에 든 계란 껍데기, 하필 눈이 보이지 않을 때 습격을 당한 것까지. 불운이 엎친 데 덮친 듯 연속적으로 몰려왔지만, 모두 귀여운 수준이었다. 유랑술사와의 만남이라는 단 하나의 행운을 만회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그런가요.”
술사는 아직 손도 대지 않은 제 밥과 국을 내려다보았다.
“하면, 계속 이대로 드실 건가요?”
“으응··· 어차피······ 바꿔 봤자, 똑같을 거야.”
“알겠습니다.”
별다른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술사는 달그락 소리도 없이 조용히 제 그릇과 아무개의 것을 바꿨다. 앞이 보이지 않는 아무개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몰랐으나, 소영과 재효는 그렇지 않았다. 눈을 휘둥그레 뜬 후배들을 향해 술사는 검지를 입술 위에 세우고서 쉿, 하고 입 모양으로만 전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무개는 이전처럼 밥을 한 숟가락 떴다. 술사는 아무개의 수저 위에 수육을 한 점 올려 주었다.
“······?”
미세하게 달라진 무게감에 당혹하여 눈만 멀뚱멀뚱하고 있자니 술사가 하하, 웃었다.
“이제 괜찮을 겁니다. 먹고 싶은 찬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어······ 괜찮은데···.”
일단 준 건 먹겠지만. 사실 아무개는 반찬에 손대지 않을 셈이었다. 눈이 보이지 않은 채로 하는 젓가락질과 숟가락질 사이에는 하늘과 땅만큼 어마어마한 난도 차가 있었으니. 굳이 먹고 싶은 것도 아니고.
“따로 가리는 음식이 있나요?”
“아···니?”
“그럼 제 마음대로 할게요.”
아무개의 밥그릇 위로 가시를 발라낸 생선을 한 점 올려 준 술사가 입꼬리만 휘어 웃었다. 아무개는 숟가락으로 밥 위에 올라간 반찬의 존재를 어림짐작했다. 술사가 얹어 준 생선 살을 떠서 한입 베어 물자 짭조름한 맛이 났다.
“이건 또 무슨 참신한 염병이람.”
맥락은 배제하고 단순 행동만 놓고 봤을 때. 신혼부부나 다름없는 꼴을 목도한 재효는 결국 참지 못하고 한마디 해 버렸다.
물론, 아무개는 철저히 무시했다.
“이제 어찌하실 겁니까?”
입가심으로 숭늉을 삼키며 소영이 포문을 열었다. 정작 식사를 제안한 유랑술사 본인은 거의 손대지도 않은 식기들을 평상 한편으로 밀어두며 질의에 질문으로 되받았다.
“귀하께선 어찌할 계획이신지요. 포기하고 돌아갈 건가요, 계속 아무개 님을 잡으실 건가요?”
“당연히 잡아야지! 요. 저런 걸 그냥 두면 큰일 난다니까요?”
염재효는 일고의 여지도 없다는 듯 딱 잘라 단언했다. 술사가 반문했다.
“무슨 수로? 족자로는 봉인할 수 없음을 확인하셨을 텐데요.”
“법기가 이 족자 하나뿐인 건 아닙니다만.”
“하나 옥선방의 족자로 실패했다면, 다른 법기도 어지간해서는 힘들지 않을까요.”
“그럼 몸으로 때우죠, 뭐. 까짓거 힘으로 확! 무찌르면 되지.”
“진심이신가요?”
유랑술사의 얼굴에 피어난, 곤란한 듯한 웃음에 재효는 아주 살짝 상처받았다.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흉신을 상대하기 버겁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아는데, 막상 남에게 지적받으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귀인께옵서는 흉신이 시력을 회복할 때까지 안전을 책임지겠다 하셨습니다. 허면 그 후에는 저것을 제압하시렵니까?”
소영이 면전에서 무찌르느니 제압하느니 따위의 소릴 해도 아무개는 조용히 숭늉만 마셨다. 술사가 흘러내린 너울을 삿갓 뒤로 넘겼다. 사르륵 얇은 면사가 부드럽게 쓸렸다.
“어째서 그리해야지요?”
“지금은 얌전한 듯 보이나, 언제 돌변할지 모릅니다. 위험하잖습니까.”
“으음, 다시 원점이네요. 불확실한 앞날의 가능성 때문에 현재 신변을 구속해야 한다는 의견이시죠?”
“불확실한 가능성이 아닙니다. 저자는 반드시 해를 끼치게 될 겁니다. 스스로 흉신이라 밝히지 않았습니까.”
“됐고! 저건 벙어리도 아니면서 왜 가만있어? 자기변호는 제 입으로 해야지!”
재효가 버럭 성을 내며 아무개를 삿대질했다. 물론 철저히 무시당했다. 소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희는 흉신의 안전함이 보장되지 않는 한. 가만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이 점이 합의되지 않는다면, 대화는 겉돌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그렇군요.”
삿갓이 옆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아무개 님. 흉신으로서 어떤 권능을 가지고 계시나요?”
재효의 턱이 쩍 벌어졌다. 아니, 세상에, 누가 그런 걸 대놓고 물어봐?!
“···어··· 내가 직접 겪은 재액을, 조금··· 돌려줄 수 있어.”
심지어 대답을 해 주냐? 내 말은 들은 체도 안 했으면서?!
염재효가 건너편에서 씩씩댔으나 아무개의 까만 눈에는 술사의 모습만이 면경처럼 담기었다. 동공과 홍채의 경계가 사라진 새까만 눈을 들여다보며. 술사가 재차 물었다.
“아무개 님 밥에 돌이 나오면, 다른 분 밥에도 나오도록 할 수 있는 건가요?”
“어어··· 비슷해.”
울화통이 차올랐던 재효는 살짝 의아해졌다. 호명성 인근에서 자신들을 압박하던, 터무니없는 기세의 흉신이라기엔 지닌 권능이 좀······
“무능하잖아?”
밥에 돌이라니. 그런 건 당장 흙 한 움큼 쥐고서 밥상에다 뿌려 버리면 그만 아니던가. 그런 걸 재액이라 할 수 있나?
“하하. 흉신이 무능하면 후배님들께는 좋은 일이 아닌가요.”
웃으며 대꾸한 술사가 재차 여쭈었다.
“아무개 님. 혹시 타인에게 해를 끼칠 예정이 있으신지요?”
재효의 턱이 두 번째로 벌어졌다. 저기요, 그, 그런 걸 이리 물어보셔도 됩니까?
“······모르겠어.”
하나 아무개는 다시금 순순히 답했다.
“어떻게··· 확신하지? 내가 무얼 할지 나도 모르는데······ 오늘만 해도, 갑자기 이상한 것들이··· 다짜고짜 공격하고, 봉인했는걸. ······잠자코 당해 줄 수는 없잖아.”
길게 늘어뜨린 말이 어쩐지 변명처럼 들리기도 했다. 아무개가 꼼지락거리며 천천히 말을 잇자 다짜고짜 공격하고 봉인한 이상한 것들이 찔끔했다.
“옳은 지적이시네요.”
웃음기 머금은 입술로 술사가 동의했다.
“어느 누가 자신의 안전성을 확언할 수 있겠어요. 당장 저부터도 스스로를 믿지 않을진대.”
“······어어?”
그건 좀. 경우가 다르지 않나?
“술사님은······ 이백 년간 안전? 했잖아···?”
안전. 이라는 표현이 적합하지 않음을 알지만서도. 마땅한 대체어가 떠오르지 않아 어쩔 수 없었다. 이백 년씩이나 안전했으면 믿어도 되지 않겠냐고. 아무개가 되묻자 술사가 애매한 침음을 흘렸다.
“이백 년간 안전했던 사람이 이백 년 하고 하루째 되는 날, 돌연 미쳐서 세상을 뒤집어놓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왜?”
이유를 요하자 유랑술사는 글쎄요? 굳이 연유를 찾아보자면, 하고 고민하듯 턱밑을 어루만졌다.
“제가 결코 살인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근거로, 저를 죽일 듯이 공격하는··· 타인의 호의를 자신의 권리인 양 이용하는 비양심적인 행동에 그만, 인내심을 잃고?”
타인의 호의를 자신의 권리인 양 이용하는 비양심적인 행동을 일삼은 무리가 재차 찔끔했다.
“아시겠지만, 죽이는 것보다 적당히 무력화시켜 살려 두는 게 훨씬 번거롭지요. 안 그래도 까다로운 작업을 하는 중인데. 더 성가시게 되면 자칫 실수할지도 모르잖아요.”
안 그래도 까다로운 작업을 더 성가시게 만든 민폐 중 하나인 염재효가 울컥하여 뭐라 하려던 찰나. 유랑술사가 너울을 어루만지며 덧붙였다.
“실제로 오늘 실수해 버리기도 했고요.”
사방 십 리가 초토화된 광경을 떠올린 염재효는 울컥 끓어오르던 격분이 빠르게 식으며 급격히 차분해졌다. 재효의 머릿속엔 해사하게 웃음 지은 유랑술사가 ‘실수로’ 자신을 찌그러트리고서 “이런, 실례.”하고 떠나는 모습이 둥실 떠올랐다.
“귀인께서 저희를 상당히 봐주고 계신 것은 잘 압니다.”
쭈글해진 재효를 대신해 소영이 나섰다.
“고집을 부려서 죄송합니다만, 조금만 더 후배들의 억지를 받아 주시지 않겠습니까?”
“우선 들어 볼까요?”
“흉신께서 상대방이 당신을 건드리지 않는 한, 먼저 나서서 해를 끼치지는 않으리라 확답을 주셨으면 합니다.”
아무개는 유랑술사 외에 다른 인간은 없는 취급 하므로. 술사는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누가 아무개 님을 건드리지만 않으면, 먼저 해치진 않으실 건가요?”
“······건드린다는 기준이 뭐야?”
아무개가 입을 열었다.
“나는 인간이······ 싫어. 그렇게 태어났으니까. ···살아 숨 쉬는 호흡마저 거슬려. 단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날 계속 건드리는 거나 마찬가지야.”
바람이 불었다. 어떤 이에겐 더운 땀방울을 식혀 주는 미풍이었으나, 이 자리의 세가 술사들에겐 섬뜩하고 싸늘한 공기였다.
“나는, 태생적으로··· 살육에 거부감이 없고, 오히려 선호하는 편이야. ······지금 이런 말을 하면, 내게 불리하겠지. 하지만··· 술사님한테는, 거짓말하고 싶지 않아.”
염재효는 뒷목을 잡았다. 뭐 이런 게 다 있지? 거짓말은 하기 싫은데, 살육은 선호한다? 차라리 거짓말을 백번하고 살육을 한 번 참아!
“호명성에는 행인이 무척 많았지요. 하나 아무개 님께서 먼저 손을 쓴 적은 없었잖아요?”
“그건··· 술사님이 있으니까.”
툭 내뱉은 말에 유랑술사가 멈칫했다.
“술사님 앞에선··· 최대한 참을 거야······.”
술사님한테 미움받고 싶지 않으니까.
어깨를 움츠리고 잔뜩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아무개가 웅얼거렸다. 흐음, 하고 술사가 운을 뗐다.
“딱히 당신이 누굴 죽이든 미워하진 않겠지만.”
“잠깐! 지금 그런 말을 하면 어떻게 해?! 요!? 살살 달래서 꼬셔도 모자랄 판인데!? 요!”
“그렇지만, 알겠어요.”
재효와 여타 후배들의 비명을 뒤로 한 채. 유랑술사가 입을 열었다.
“제 앞에선 자중하겠다는 뜻이지요?”
“어··· 그, 렇지?”
“제가 뭐라고 저를 기준 삼아 행동거지를 달리하는지 모르겠으나. 이미 그러시다니 어쩔 도리가 없네요.”
식기를 정리하고 숭늉 한 대접만 남은 소반에 팔꿈치를 올린 술사가 턱을 괴었다.
“그럼, 아무개 님은 제가 모셔갈 테니 여러분도 물러나면 어떨까요?”
“되겠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