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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혼설 (20)화 (20/138)

20화

二. 몽중몽夢中夢

역귀인 줄 알았으나 실상은 흉신임이 밝혀지고,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광분한 염재효가 난리를 치기 직전, 유랑술사가 제안했다.

“슬슬 점심시간이네요. 식사부터 하고 마저 할까요?”

모든 전의와 경계를 한순간 푸쉬식 꺼트려 버리는, 놀랍도록 평화로운 제안에 그만 예의조차 잊어버린 염재효는 댁이 제정신이냐며 불을 뿜었다. 격분하는 재효가 의아한 듯 잠시 궁리하는가 싶던 술사가 아, 하고 깨달았다는 듯 말했다.

“귀하들께선 치료부터 받으셔야겠네요. 잠시 간과했어요.”

아니, 당신 지금 완전히 잘못 짚었다고. 흉신을 앞에 두고 밥이 목구멍을 넘어가겠냐고 항의하려던 찰나. 백지 부적이 이마에 척 달라붙었다.

근방의 고을로 전 인원을 동시에 축지시킨 술사는, 상태를 보아 일부는 의원으로 보내고 일부는 식사하러 갔다. 신속하고도 정확한 뒤처리였다.

그리하여 현재. 재효와 소영을 비롯한 세가 술사들은, 유랑술사 및 흉신과 함께 주막에 들어섰다.

“아이고, 이게 뭔 일이래? 의원부터 찾아야지 않겠어?”

핏자국을 달고 부러지고 깨지고 멍든 술사들이 줄줄이 들어오는 꼴을 본 주모가 기겁했다. 이들이 비교적 양호한 축에 들기에 식사부터 하러 온 것임을 알았다면, 더욱 놀랐으리라.

아까까지만 해도 치고받고 싸우던 그들은 여러 평상에 나눠 앉아 얌전히 밥을 기다리는 기묘한 상황에 처했다. 재효와 소영은 유랑술사 및 흉신과 한자리에 앉았다. 발언권이 센 금비환은 여직 깨어나질 못해 의원으로 옮겨졌기에, 여타 세가 술사들은 이 같은 배치에 토를 달지 않았다.

같은 평상에 자리 잡은 이들을 향해 유랑술사가 운을 뗐다.

“이제 어찌할까요. 우선 자기소개부터?”

“자기소개애애? 중매쟁이도 아니고 무슨 헛소릴,”

텁. 재효의 입을 틀어막은 소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석소영이라 하옵고, 이 친구는 염재효입니다.”

읍, 흐읍! 읍···! 재효가 소영의 손을 떼려 했으나, 솥뚜껑 같은 손바닥은 꿈쩍도 않았다. 유랑술사는 멀찍이 선 중노미를 손짓해 부르며 말했다.

“저는 평범한 떠돌이 술사입니다. 딱히 내세울 만한 이름은 없네요.”

유랑술사는 항시 자신을 ‘우연히’, ‘지나가던’, ‘평범한’ 따위의 수식어로 소개했다. 건너건너 풍문으로 전해 들은 이야기를 실제로 목도한 소영은 기분이 묘해졌다.

이윽고 재효와 소영의 시선이 흉신에게로 향했다. 순서대로 돌아가며 소개하였으니 이제 흉신의 차례였다. 하나 흉신은 두 사람을 철저히 없는 셈 쳤다. 하는 수 없이 둘은 유랑술사를 향해 어찌 좀 해 보라는 눈짓을 보냈다. 이에 술사가 흉신을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성함이 어찌 되시나요?”

“······어?”

눈은 여전히 볼 수 없었으나, 살랑이며 코끝을 간질이는 너울 자락에 상대가 얼마나 가까이 다가왔는지 짐작한 흉신이 당혹하여 고개를 푹 숙였다.

“그냥··· 아무개, 라고··· 부르면 될 거야.”

“하면, 아무개 님?”

“······님? 님을··· 붙여?”

“딱히 못 붙일 까닭도 없지 않나요.”

“저기, 저기요. 잠깐만.”

재효는 뒷발로 바닥을 치대는 소동물처럼, 불만을 담아 평상을 탕탕 내리쳤다.

“듣자 듣자 하니 지금껏 서로 이름도 몰랐어요?”

어이가 없다는 말투에 유랑술사는 그렇지요, 하고 어깨를 으쓱했다. 재효는 기가 차서 콧김을 뿜어 댔다.

“보아하니 통성명 자체를 안 한 것 같은데? 요?”

“맞아요. 어제 처음 뵀거든요. 딱 하루 지났네요.”

만난 지 고작 하루밖에 안 된 놈을 그리 편들어 줬단 말인가? 심지어 이름조차 모르는 상대를?

흉신이 유랑술사 한정으로 어찌나 절절매는지. 아주 죽고 못 사는 사이인 줄로 알았더랬다. 한데 실상은 훨씬 얄팍한 관계였다니. 재효는 괜히 울컥했다.

“대체 이름을 왜 몰라? 요? 종일 붙어 다니면서 궁금하지도 않나? 요?”

“으음. 딱히 알아야 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만난 지 하루밖에 안 된 상대를 위해 십수 명에 달하는 술사들과 대적했다. 하지만 이름은 굳이 알 필요가 없다?

그게 뭐야.

“······다정한 건지 냉정한 건지 모르겠네.”

재효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 구시렁댔다. 생긋 웃은 유랑술사는 아무개의 코끝을 간질이던 너울 자락을 뒤로 젖혔다.

“예를 지키는 데 꼭 정이 필요한 건 아니지요. 널리 통용되는 규범을 익히면 되니까요. 상식만 갖추면 된답니다.”

이건··· 스스로 ‘다정하다’는 말을 부정하는 건가?

재효는 미심쩍어하던 가운데 중노미가 다가왔다. 유랑술사가 네 사람분의 식사를 주문한 후 재효가 슬쩍 물어보았다.

“여기가 어딥니까?”

“제 발로 들어오고도 모르슈? 주막이잖우.”

“그게 아니라, 여기 지명이 뭐냐고요.”

중노미는 희한한 걸 보듯 하더니 짧게 내뱉었다.

“의림이올시다.”

그는 바쁜 듯 쌩하니 가 버렸다. 남겨진 재효는 골몰했다.

“의림? 의림이 어디지?”

사방 십 리를 초토화시킨 유랑술사는 십수 명에 달하는 이들을 대동하여 축지술을 펼쳤다. 그 때문에 여기가 어딘지도 몰랐다. 술사가 엄지와 검지 사이로 삿갓 끝을 문지르며 알려 주었다.

“호명성에서 북동쪽으로 오백 리 떨어진 곳이에요.”

호명성은 함 장군 댁이 위치한 곳으로 이들이 한창 투닥거렸던 지역이다. 육 리를 축지하고 숨넘어갈 뻔한 소영을 본 재효는, 동행을 데리고 한 번에 오백 리를 이동하고도 힘든 기색이라곤 일절 없는 유랑술사를 괴물 보듯 했다. 석소영이 서두를 뗐다.

“북동으로 오백 리면, 청림 아닙니까? 야래산성(夜來山城)이 있는 곳 말입니다.”

야래산성은 사대귀인 중 일인인 수호지신이 하룻밤 사이에 산성을 축조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평범한 민중도 아니고, 술사인 그들이 이 지역을 혼동하였을 리 만무했다.

“몇 해 전만 해도 청림이라 불렸지요. 황제 폐하께서 집권하시고 지명이 바뀌었습니다. 본가로 돌아가시거든 지도를 새로 손보셔야겠네요.”

유랑술사의 권고에 재효와 소영이 흠칫했다.

사가에서 지도를 제작하고 소지하는 것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건 엄히 금지되었다. 하나 이름 꽤나 알려진 세가들은 필수적으로 지도를 갖고 있었다. 축지술을 쓰려거든 이 땅의 지리를 제 손바닥처럼 훤히 꿰고 있어야 하니.

모두들 암묵적으로 자행하나 겉으로는 쉬쉬하는 일. 먼 과거에는 이러한 지도 소지를 대외적 명분으로 삼아 오대세가 중 하나인 화양 율씨가 궤멸에 이르도록 박해받은 전적도 있었다. 이렇듯 탁 트인 공간에서 스스럼없이 나눌 대화가 아니란 뜻이다.

“흠, 흠. 그보다 이 족자부터 어찌해야겠는데.”

헛기침하며 주제를 바꾼 염재효가 아무개를 봉인했던 족자를 꺼내 들었다.

“평범한 원혼 기준이라지만, 무려 백 명분의 혼이 봉인된다기에 평생 쓸 요량으로 거금을 들였는데. 백 명은 개뿔 한 명도 봉인을 못 했잖아?”

처음에는 지도 얘기를 덮으려 꺼낸 화제였으나. 곱씹을수록 진심으로 성이 나 버렸다. 염재효는 삐딱한 눈초리로 족자를 노려봤다.

“사기당했나?”

“그럴 리가요.”

유랑술사가 반박했다.

“인장을 보니 저자도 옥선방에서 제작된 듯한데, 그 정도로 하자 있는 물건은 팔지 않아요.”

하중도(河中島)인 저자도 인근에 위치한 옥선방은 고급 옥판선지만을 이용해 다양한 법기를 만들어 내는 공방으로 특별히 주문 제작을 받기도 했다. 옥선방에서 주문한 법기를 하나 받으려거든 삼 년은 기다려야 한다는 소문이 돌 만큼, 실력과 품질이 검증된 곳으로 술사들 사이에선 유명했다.

그리 긴 시간과 거금을 들여 얻은 법기가 불량이라니. 염재효는 짜증이 나면서도 유랑술사의 반응에 당혹했다. 왜 대신 변호를 해 주지? 옥선방 주인 친척이라도 되나?

“백 명을 봉인한다던 족자가 저어기 한 명도 봉인을 못 했다니까? 요?”

염재효는 돌돌 말린 족자로 아무개를 가리키며 재차 강조했다. 술사의 삿갓이 옆자리의 아무개를, 그 뒤의 허공을 향해 기울어졌다.

“그래서예요. 백 명분이라고 했잖아요.”

“···? 뭔 소리야? 요.”

때마침 평상 위로 음식을 담은 개다리소반이 올라왔다. 술사는 소반에 놓인 국그릇을 가리켰다.

“이 그릇은 딱 이만큼의 국을 담을 수 있도록 만들었지요.”

그의 손끝이 다시 부뚜막에서 하얀 김을 모락모락 피워내는 솥을 향했다.

“가마솥에 한가득 끓인 국을 이 작은 그릇에 전부 담으려 하면, 당연히 넘쳐흐르지 않을까요.”

염재효는 바보가 아니다. 술사가 전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곧장 알아차렸다. 하지만.

‘한 명 맞잖아?’

앞으로 보나 뒤로 보나 흉신은 단 한 명이었다. 세상에 저런 불길한 것이 더 있다면, 망조가 들어도 단단히 든 게지.

유랑술사는 제가 사겠다며 산채에 생선, 수육과 맥적 등 여러 찬거리를 주문했다. 재효는 맛을 음미할 새도 없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밥을 꾹꾹 욱여넣었다.

“아무개 님. 아직 눈이 안 보이죠?”

“어··· 으응.”

“먹여드릴까요?”

푸훕⎯!

입에 든 것을 뿜어내는 재효의 얼굴을 소영이 서둘러 밀어냈다. 덕분에 밥상의 안전은 지켜졌다. 제대로 사레가 들린 듯 볼썽사납게 쿨럭이는 재효의 등을 두드려 주며 소영이 물잔을 건넸다.

“어, 어어?”

한편 아무개도 엄청난 갈등에 빠졌다. 먹여 준다니··· 나를?

시력이 돌아오면, 다시는 이 같은 제안을 받을 수 없을 터였다. 지금 이 순간에만 누릴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만끽할 것인가, 대범하고 의젓한 모습을 보여 줄 것인가. 두 선택지 사이에서 일생일대의 고민을 하던 아무개는 시무룩해져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야··· 내가 먹을 수 있어.”

실로 그러했다. 아무개는 소반을 더듬어 그릇의 위치를 확인하고 밥을 한술 떴다. 맹인이나 다를 바 없음에도 반 한 톨 흘리지 않고 능숙하게 먹는 모습은 신기에 가까웠다. 그 맹인에게 만신창이로 얻어터진 입장에선, 안 보고 팰 수 있는 놈은 안 보고 먹을 수도 있구나 싶을 따름이지만.

재효가 물을 마시며 가까스로 진정한 그때. 으득, 하는 소리가 들렸다. 세 사람의 시선이 아무개에게로 모였다. 아무개를 입을 우물거리더니 숟가락 위에 무언갈 뱉어 냈다. 모래알처럼 작고 까만 덩어리.

돌이다.

저놈 돌 씹었다.

“······.”

재효는 묵묵히 제 밥을 뒤적였다. 저놈 밥이나 제 밥이나 한 솥에서 나온 것일 테니 돌이 더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물론, 돌은 없었다. 흰 쌀밥에선 반지르르 윤기만 흘렀다.

“괜찮으세요?”

술사의 염려에 으응, 하고 느리게 답을 해 준 아무개는 손끝의 감각으로 국그릇을 어루만지고는 정확히 한술을 떴다. 국을 한 입 머금은 아무개가 재차 멈칫하더니 혀로 입안을 젓고는 숟가락 위에 살며시 내밀었다.

계란 껍데기다.

“······.”

재효는 이제 국을 뒤적였다. 옆에서 소영도 은근슬쩍 밥과 국을 확인하였다. 이번에도 두 사람의 것은 멀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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