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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혼설 (19)화 (19/138)

19화

석소오는 부푼 마음으로 가득 찼다.

위로 형님만 넷, 아래로 누이동생이 하나인 그는 형님들의 내리사랑을 빙자한 구박을 받으며 힘겨운 삶을 살아 왔다. 맨손으로 바위 치기, 맨손으로 절벽 기어오르기, 맨손으로 곰과 싸워 때려눕히기. 맨손, 맨손, 그놈의 맨손!

가문의 비전 술법인 석화(石化)를 체득하기 위해. 강암 석씨 사내라면 이쯤은 해낼 수 있어야 한다며 온갖 고생을 감내한 석소오의 꿈은 어릴 적부터 명확했다. 언젠가 기필코 이 거지 같은 집구석에서 벗어나겠어!

오늘은 애타게 고대하던 바로 그 소망이 이뤄지는 날이었다. 감격에 찬 석소오의 눈시울이 발갛게 물들었다.

“짜식, 막상 형님들이랑 헤어지려니 속상한가 보지?”

처억. 돌덩이 같은 팔이 어깨에 얹혔다. 넷째 형님 석소사였다.

“속상하긴. 속 시원해서겠지.”

냉소적으로 일갈한 남자는 셋째 형 석소삼이었다.

“우리 집안에서야 네가 어떤 머저리 짓을 해도 도련님이랍시고 어화둥둥 해 주었다만, 앞으로는 다르다. 영화단에서 함께할 동료들은 모두 너와 마찬가지로 귀한 가문의 도령이고 아씨다. 인사 잘하고 예를 지켜라.”

예의범절을 중시하는 이 사람은 둘째 형님 석소이다.

“영화단은 철저히 중립을 고수하며 이를 위해 혈연을 포함한 입단 전 모든 인연을 끊도록 하지. 하나 물밑에서는 다르다는 소문이 있다.”

첫째 형 석소일이 나지막이 귀띔해 주었다.

“조심하고 또 유념하거라.”

“······.”

“네가 우리와 연을 끊는 게지, 우리가 너와 연을 끊는 게 아니다. 힘들면 언제든 도움을 청하거라.”

출가의 환희로 붉어졌던 석소오의 눈시울이,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한층 짙어졌다. 평소 두통과 속 쓰림만 유발하던 큰형님의 든든한 언사에 가슴이 찡해진 석소오는 두 손을 맞잡고 고개를 주억였다.

“결국 소영이는 끝내 못 보고 가네.”

석소사의 중얼거림에 덩치가 산만 한 장정 다섯의 어깨가 나란히 축 처졌다. 석소오도 마찬가지였다. 형님들은 짜증 나지만, 누이동생은 아니었으니.

“소영이에게서 마지막으로 연락 온 게 언제 적이지?”

“며칠 전이던가. 도자역을 일으켰으리라 추정되는 역귀를 찾았다 했어. 둘만으로는 힘드니 지원해 달라던데.”

“그래서 뭐라 답했는데?”

“집으로 오라고.”

“······.”

“아, 왜 때려! 그럼 이제 막 출사표 던진 갓난쟁이한테 역귀를 쫓으라 하리?!”

틀린 말은 아니다. 과거 기록을 보면, 역귀를 퇴치할 때에는 평소 으르렁거리던 오대세가들마저 합심하여 동맹을 맺었더랬다. 설령 소영의 청을 받아들였다 한들 강암 석씨에서 자체적으로 판단할 만한 사안이 아니었다.

“소영이랑 난쟁이 똥자루가 하지 말라면 ‘네, 명심하겠습니다.’하고 고분고분 들어먹는 애들이냐? 지금쯤 저들끼리 역귀를 추적할는지도 모른다고!”

“가온 염씨에서는 가만있겠어? 그쪽에서도 말렸겠지.”

“염재효는 그 집안에서도 내놓은 자식이잖아.”

“······.”

“설마··· 단둘이서 역귀를 추적하는 건 아니겠지···?”

짝, 손뼉을 친 석소이가 주위를 환기했다.

“자자, 그만들 하자. 소오는 이제부터 오래도록 집안 소식을 못 들을 텐데. 괜히 불안하게 하지 말고.”

“그래그래. 소영이가 알아서 잘 판단했을 거야. 우리 막내가 얼마나 속이 깊은데.”

소영이는 속이 깊지만, 염재효는 얕다 못해 비 갠 후 웅덩이 수준이잖습니까.

애증하는 형님들과 작별 인사를 나눈 석소오는 최후의 반론을 속으로 삼키며 창성으로 향했다. 창성은 영화단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인근의 물자가 집중되어 각종 상가를 비롯한 비술사 주민들도 함께 살아가는 곳이었다.

어지간한 왕성보다 웅장한 성문이 열리고. 석소오는 가슴이 뿌듯하게 벅차올랐다.

이 땅의 군주이자 모든 신령의 어버이 되는, 대지의 신령 다화련.

그분의 뜻을 받아 모시는 대리자, 영화단주.

영화단은 사대귀인 중 일인인 영화단주가 직접 개설한 곳으로 개인이 창립한 사설 집단이나, 그 개인이 지닌 위상 탓에 단순 조직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였다. 대지의 군주와 가장 가까이서 머물 수 있는 곳.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입단을 원하는 자들이 줄을 섰으니.

덕분에 영화단은 우수한 실력을 갖춘 지원자를 골라 선발할 수 있었고, 오대세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명실상부 최강의 정예단체가 되었다.

창성의 한가운데. 드넓은 화원에서 한 인영이 손수 가지를 쳤다. 똑, 똑, 가지가 잘릴 때마다 마치 제 사지가 떨어져 나가는 양 아픈 얼굴로 울상 짓는 사내에게 수석 단원이 다가왔다.

“단주님.”

단주. 그리 불리는 자는 창성을 통틀어 단 한 명뿐이다.

영화단주.

“이번 분기에 선발한 신입 단원 모두 내성에 진입했습니다.”

“그래. 애들한테 꽃 꺾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 주고.”

“물론, 가장 먼저 전달한 사항입니다.”

“매번 당부하는데도 꼭 한두 놈은 실수한단 말이지.”

쯧, 맘에 안 든다는 듯 혀를 찬 그는 뒤에서 은밀히 화광(花狂)단주라 불리는 이답게 꽃에 미쳐 있었다. 가지를 치느라 한껏 굽혔던 허리를 쭉 편 영화단주가 목을 좌우로 꺾었다.

“그래서, 네가 고작 신입 단원 신경 쓸 위치는 아니고. 어인 일이냐?”

“함 장군 측에 붙여 둔 단원들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유명경이 파손됐다 합니다.”

그제야 흥미가 생긴 듯. 수석 단원에게 눈길을 준 영화단주가 허어? 하고 되물었다.

“어찌하다?”

“양 의원이 직접 파손한 후 사망했다 합니다.”

“책임 당사자가 죽어 버렸네. 어쩔 수 없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한 영화단주가 재차 꽃나무 앞에 웅크리고 앉았다. 수석 단원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 과정에서 유랑술사가 개입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무어?”

줄곧 여유작작하던 그의 태도가 급변했다. 고개를 홱 돌린 영화단주가 제법 까랑까랑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그 자식이 여기서 왜 튀어나와? ···참, 그놈은 원래 사방팔방 오만 데 쏘다녔더랬지.”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한 단주가 고개를 주억였다.

“우리 존재를 눈치챘나?”

“그건 아닌 듯합니다. 저희에 대해 아는 유일한 인물인 양 의원이 죽었으니 말입니다.”

“하면 됐어. 애들한테 평소처럼 지켜보기나 하라고 전해.”

도로 꽃나무를 향해 시선을 돌린 그에게 수석 단원이 조심스레 여쭈었다.

“괜찮으십니까? 유명경을 원하셨잖습니까.”

영화단주는 오래전부터 유명경에 흥미를 갖고 있었다. 다만 유명경의 소유주가 마찬가지로 사대귀인이라 불리는 만물점주였던 탓에. 불필요한 마찰을 빚지 않고자 피했던 것이다.

한데 제법 괜찮은 기회가 생겼다. 덕분에 영화단주는 양 의원을, 정확히는 함 장군의 위명을 이용해 제 존재를 숨기고 유명경을 만물점에서 빼내는 데 성공했다.

“아쉽긴 하나, 딱 그 정도다. 어차피 본 목적은 모란 님께 접근하는 걸 막고자 함이었으니.”

영화단주는 꽃의 신령인 화왕, 모란에게 기이하리만치 집착하는 면모를 보였다. 그 일환으로 대륙 중앙에 위치한 화왕의 정원에 출입하려는 외부인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었다. 한데 양 의원이 그곳으로 향했더랬다.

“혼살이꽃이라니. 대체 언제 적 얘길 하는 건지, 원.”

모란의 정원에는 세상 모든 꽃이 있다. 그러니 전설 속에서나 전해지는, 혼을 되살린다는 꽃. 혼살이꽃도 있으리라.

분명 그랬다. 한때 화왕의 정원에 혼살이꽃이 있었더랬지. 한 이천 년쯤 전이던가. 저승사자들이 혼살이꽃으로 인해 빚어진 업무 차질을 견디지 못하고 항의하여 저승의 정원에서만 기르기로 했던 것이.

늦어도 너무 늦은 양 의원에게 영화단주는 친히 유명경을 알려 주었다. 만물점주가 처한 상황으로 인해 현시점에서 함 장군의 위명을 이용하면, 그 깐깐한 어르신이 거울을 내어줄 수도 있다는 것까지.

이로써 화왕에게 쓸데없이 접근하는 걸 막고, 기회를 보아 유명경도 이쪽에서 가져오는 것이 본래 계획이었다. 후자는 실패하였지만.

“궁금했거든. 그런 생각 해 본 적 없나? 유명경으로 되살린 자는 생전과 정반대가 된다잖아.”

보드라운 꽃잎을 지문으로 섬세하게 어루만지며. 영화단주가 의문을 표했다.

“하면, 유명경으로 되살린 자를 죽이고 다시 유명경으로 살려내면··· 과연 어찌 될까?”

반대가 도로 반대가 되니. 원래대로 돌아오려나?

순수한 질문으로 가장했으나, 제법 섬뜩한 발언이었다. 그의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선 반드시 두 번의 죽음이 필요했으므로.

또한 영화단주에겐, 단지 궁금하다는 이유만으로 상대의 명줄을 좌지우지할 권력과 힘이 차고 넘쳤다.

“신경 쓰지 마라. 어차피 다 끝난 일이니.”

그만 가 보라는 듯 손을 휘휘 내젓는 영화단주는 이미 꽃에 온정신이 팔린 듯했다. 꽃나무를 들여다보느라 자신은 안중에도 없는 단주를 향해 정중히 인사한 수석 단원은 발밑을 조심하며 화원을 빠져나갔다.

과거 그가 신입 단원이던 시절. 함께 입단한 동기가 이름 모를 잡초 사이에 핀 작은 꽃을 밟았다 순식간에 발목이 분질러진 광경은, 여전히 기억 속에 진득이 남아 있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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