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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혼설 (18)화 (18/138)

18화

삼림이 뒤집히고 바위 절벽이 조각나 와해됐다. 쩌저적 갈라진 땅이 크고 작은 융기와 침강을 반복하며 어지러이 뒤집혔다.

지진이라도 난 것 같다. 여기 모인 자들이 술사가 아닌 평범한 상민이었다면, 산 채로 고스란히 매장되었을 형국이다.

대지를 한바탕 휩쓸고 간 재해의 근원에는 유랑술사가 서 있었다. 그는 세월에 퇴적된 화석처럼 굳어 있었다. 그곳에만 시간이 멈춘 듯, 경직되어 있던 술사는 눈동자만 움직여 흙더미에 깔린 삿갓을 찾아냈다.

백지 부적이 날아가 삿갓을 빼냈다. 삿갓이 부적에 얹혀 둥실둥실 떠오르더니 술사의 머리 위에 가볍게 내려앉았다. 되돌아온 삿갓을 푹 눌러쓴 유랑술사가 그제야 살아 움직였다.

“실례.”

재차 미소를 머금은 그가 변명처럼 읊조렸다.

“조금 놀라서 그만, 실수해 버렸네요.”

여전히 마신장의 입에 물려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염재효가 진저리쳤다.

세상에 어떤 작자가 ‘조금’ 놀라서 ‘실수로’ 사방 십 리를 초토화시킨답니까? 삼백만 평 이상을 한 방에 날려 버린 격인데!

“다들 괜찮으신가요?”

멍하니 넋이 나간 세가 술사들에게 그는 태연히 안부를 물었다. 눈앞의 거대한 참상이 전혀 보이지 않는 듯한 그 행태에 재효는 몸서리쳤다. 미쳤다, 미쳤어. 이건 정말 괜히 건드렸다!

“소영아. 우리 그냥 튀자.”

“원래 그러려다 실패하지 않았나.”

······참. 그랬지.

축지술로 튀었는데 축지술로 도로 잡혔었다. 그럼 마신장을 타고 하늘로 도망치는 건 어떨까? 다시 제안하려던 중, 소영이 다급히 외쳤다.

“재효! 너, 품에!”

울퉁불퉁 재효의 웃옷이 끓는 듯이 들썩였다. 품에 넣어둔 족자가 요동친 탓이다.

“뭐야, 이거 왜 이래!”

“역귀의 봉인이 풀리려는 것 같다.”

“멀쩡한 봉인이 갑자기 왜!?”

거세게 흔들리는 족자 탓에 재효의 전신이 덩달아 마구잡이로 뒤틀렸다. 마신장이 잇새로 문 재효의 옷깃이 자꾸만 흘러내리며 아슬아슬 위태로워졌다.

“족자를 버려라!”

“뭐? 하지만···.”

“역귀는 다시 잡을 수 있지만, 네 목숨은 하나다.”

소영의 설득에 재효는 다급히 품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족자는 가면 갈수록 더욱 격렬하고 요란하게 날뛰었다. 족자가 아니라, 곧 터질 폭죽을 손에 쥔 것만 같았다.

밖으로 꺼내 들자마자 족자를 묶은 끈이 펑 터져나갔다. 놀란 마신장의 턱이 순간적으로 벌어지고, 염재효는 족자와 함께 추락했다.

“재효!”

마신장이 재효를 쫓아 달렸다. 끈 떨어진 족자가 공중에서 도르륵 풀리었다. 길게 펼쳐진 족자 안에서 음산하고 새카만 기운이 흘러나왔다.

염재효는 마신장과 언약을 맺은 바람의 술사다. 덕분에 지진이라도 난 듯 울퉁불퉁한 지면에 처박히기 직전, 바람으로 제 몸을 띄워 안전하게 착지해 냈다.

하지만 재효는 제 발로 설 수 없었다. 땅에 내려서자마자 강력한 힘이 등을 후려치고 짓눌렀으므로.

“커헉!”

갈라진 대지 틈새로 얼굴이 파묻힌 재효가 바닥에 엎어졌다. 그 등을 낯선 발이 짓밟았다.

아무개였다.

무겁고 눅눅한 귀기가 안개처럼 짙게 내리깔렸다. 분명 낮이건만, 이 부근에만 어둠이 내린 듯 음산함이 감돌았다.

세가 술사들은 재차 얼어 버렸다. 유랑술사가 벌인 규모와 위력에 압도당했던 때와는 달랐다. 귀가 먹먹하고 전신이 조여들어 옴짝달싹할 수 없는, 마치 가위에 눌린 듯 위축되는 공포.

족자에서 풀려난 아무개는 섬뜩한 기세로 발을 내리눌렀다. 억눌려있던 새까만 원기가 당장에라도 폭발할 듯 불안하게 일렁였다. 조금만 더 누르면, 재효의 척추와 갈비뼈가 으스러질 터.

아무개의 다리에 힘이 들어가려던 찰나. 소영이 굳어 버린 육신을 억지로 움직여 뛰어들었다. 신체를 석화하여 바윗덩어리 같은 질량의 주먹을 내질렀다.

아무개는 살짝 몸을 비튼 것만으로 소영의 권을 피해 냈다. 얼굴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가는 팔목을 붙잡아 아래로 내려 당기자, 거구가 공중에서 한 차례 회전하더니 앞으로 나동그라졌다.

다시 한번, 발에 힘을 주려는 아무개를 뒤늦게 압박감에서 풀려난 무리가 방해해 왔다. 장창을 들고 찌르는 놈의 팔을 반대로 꺾자 우드득, 뼈가 부러졌다. 힘을 잃고 떨어지는 창을 발끝으로 쳐올려 손에 쥔 아무개는 정신 사납게 비명을 지르는 놈의 안면을 창대로 후려쳤다.

슬금슬금 바닥에서부터 접근한 나무뿌리를 창날로 콱, 찍어 버린 후. 아무개는 창을 지지대처럼 사용했다. 한 손으로 창대를 잡고서 몸 전체를 띄워 올려 두 사람을 양발로 돌려차 한꺼번에 날려 버리고, 창대를 딛고 올라 거구의 턱주가리를 쳐 냈다.

아무개에게 정통으로 얻어맞은 이들 중 누구도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석씨 술사들은 몸을 바위처럼 단단하게 굳힐 수 있으니까. 크게 다치지 않으리라는 짐작은, 얄팍한 사고였다. 몸속 깊은 장기, 예컨대 심장을 돌처럼 경화시킬 수는 없으니.

아무개는 석벽이나 다름없는 그들의 몸을 후려쳐 피부와 근육을 타고 내장을 진탕 뒤흔들 만큼의 충격을 주었다. 그 때문에 먼저 앞장섰던 석씨 술사들이 낙엽처럼 하나둘 스러졌다.

마지막으로 남은 석씨 술사의 뒤통수를 움켜쥔 채 머리를 바위벽 깊이 처박아 버린 아무개가 비틀비틀 흐늘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어두운 흑기(黑氣)가 연기처럼 흘러나왔다. 검은 기운에 둘러싸인 아무개는 뼈마디가 있는 생물이라기보다는 물결 따라 흐물거리고 뭉그러지는 해조류에 가까운 형상이었다.

짙푸른 귀화는 무거운 귀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어둠에 잡아먹혔다. 나무뿌리는 접근하려 드는 순간 생기를 잃고 바짝 말라 스러졌다. 간신히 끌어올린 지하수로 만들어 낸 수룡은 흑기에 부딪힌 순간, 형체를 잃고 평범한 물 덩어리가 되어 쏟아졌다.

유랑술사와는 달랐다. 그는 한참 어린 후배들을 봐주고 있었으나, 아무개의 손속은 자비가 없고 무도했다. 이는 전과 다른 두려움을 일으켰다.

세가 술사들은 맥을 추지 못했다. 맹수가 소동물을 사냥하듯, 아무개는 손쉽게 그들을 무력화시켰다. 염재효는 긴장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분명 눈이 보이지 않을 텐데? 아니, 그보다. 족자에 갇히기 전까지만 해도 겉으로는 평범한 사람과 구분되지 않았는데. 이건, 이건 마치······

갈라지고 부서져 초토화된 대지를 거침없이 내디디며 방해꾼을 모조리 처리한 아무개는, 초점 없는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부상당한 세가 술사들의 신음만이 가득한 가운데. 마지막 남은 기척을 감지한 창백한 얼굴이 모로 기울어졌다.

탁, 가볍게 뛰어 벌어진 지면 사이를 넘어선 아무개가 창대를 역수로 쥐었다. 최후의 기척이 머지않았다. 날카로운 창두로 상대를 찍어 내리려던 그때.

아무개가 돌연 우뚝 멈췄다.

갑작스런 정지로 발밑에 자욱한 흙먼지가 일었다. 창의 뾰족한 날 끝에 무언가 걸렸다. 옷감보다는 탄성 있는 재질이었다. 마치 갈대나 대오리 따위를 엮어 만든······ 일종의 삿갓, 같은.

“······술사님?”

사정없이 흔들리는, 간신히 쥐어짜 낸 듯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아무개가 입을 열었다.

“······술사님이야?”

아무개가 보이지 않는 눈을 깜빡였다.

흐트러지고 갈라진 너울 사이로. 피에 젖은 창날을 코앞에 둔 채, 그 너머 초점 없는 까만 눈을 마주한 술사가 미소했다.

“네에, 술사님이에요.”

탕, 타당··· 힘없이 떨어진 창이 바닥에 굴렀다. 누가 봐도 당황하고 허둥지둥한 모양새로, 아무개가 횡설수설했다.

“수, 술사님이 왜··· 여기에······? 간 거 아니었어?”

흉통을 조이던 원기가 일순 수그러들었다. 사방에 자욱하던 흑색의 기운이 사라지자 겨우 숨을 쉴 만해진 세가 술사들이 일제히 기침을 터트렸다.

“가란다고 정말 갈 만큼 야박하지 않아서요.”

도리어 의아하다는 듯 유랑술사가 반문했다.

“설마 정말로 갔다고 생각하셨나요?”

“어? 어···. 으응.”

우물쭈물 답하자 술사가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저를 대신해서 시력을 잃었는데, 본인이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다는 핑계로 훌쩍 떠나 버린다···.”

초점 없는 눈동자와 음울하게 가라앉은 눈매를 가만히 들여다보며, 그가 말했다.

“보통 그런 걸, 개자식이라고 하지 않나요?”

“······어어?”

“서운하네요. 제가 그런 개자식으로 보였다니.”

“아! 아니야아···.”

정말 섭섭하다는 듯 축 늘어진 유랑술사의 음성에 아무개는 양손을 새처럼 파닥거리며 온몸으로 피력했다. 아무개와 달리 사지는 부러지고 꺾이고 망가졌을지언정, 두 눈은 멀쩡한 세가 술사들은. 웃음기 어린 낯짝으로 목소리만 연기하는, 복화술의 대가 같은 유랑술사의 뻔뻔함에 경악했지만.

“나는, 눈은, 내가··· 스스로 한 거니까, 술사님이··· 책임감을 느낄 필요 없잖아. 그러니까······.”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한 아무개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다만 뇌리 한구석을 가득 채운 것은, 그가 있는 줄 알았다면 손속에 좀 더 자비를 뒀으리라는 후회뿐.

“그렇다 하더라도 제게 도의적 책임은 있지 않을까요?”

“그, 글쎄···?”

다수의 세가 술사들을 일방적으로 족칠 때조차 숨 한 번 헐떡이지 않고 멀쩡했던 아무개는, 유랑술사와 고작 말 몇 마디 섞은 것만으로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당혹했다.

“······이게 대체 뭔 상황이라냐.”

염재효가 뻐근한 등허리를 두드리며 미간을 구겼다. 소영과 서로 부축하여 겨우 일어나 앉은 재효는 주변을 살피던 중 기절해 버린 금비환을 보곤 혀를 찼다. 저놈이 쓰러져 있으니 이 중에서 제일 목소리가 큰 건 재효 자신이었다.

“어쩔 수 없지. 이왕 이렇게 된 거, 그 망할 대화라는 걸 해 보자고.”

재효는 이봐! 하고 아무개를 불렀다.

“너 역귀냐?”

“나는··· 술사님이, 책임을······ 느끼게 하려던 게 아니야···.”

무시당했다.

“저기요? 여보세요?”

“나 때문에··· 술사님이, 위험을 질 필요는··· 없어.”

“······야!”

아무개는 재효의 말이 전혀 들리지 않는 듯 유랑술사만 힐끔댔다.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웅얼대는 그에게 유랑술사가 물어 왔다.

“아까부터 저분들이 의심하셔서요. 실례지만, 혹 도자역을 퍼트린 역귀이신가요?”

“아니야.”

제 말은 개무시해 놓고서 유랑술사에게만 답하는 모양새에 염재효가 뒷목을 잡고 드러누울 뻔하였다.

“하면 그 지독한 원기는 어떻게 설명할 건데?!”

“귀기가 무척 짙으신데. 어찌 된 일인가요?”

앵무새처럼. 유랑술사는 염재효의 말을 반복 전달했다.

“그건······.”

여전히 재효는 안중에도 없이 술사님만 빼꼼 보던 아무개였으나, 무엇도 보이지 않는 까무룩한 시야에 어깨를 떨구었다.

“역귀는 아니고··· 흉신······ 일걸?”

주의 깊게 귀 기울이지 않으면 놓쳐 버릴 만큼 작은 음성. 때문에 지척에 있던 유랑술사 외에는 아무도 제대로 듣지 못하였다. 답답해하던 염재효가 버럭 성을 냈다.

“넌 네가 누군지도 모르냐?! 왜 말을 똑바로 못해?”

“역귀보다는······ 흉신이 맞을 거야. 왜냐면···.”

이번에는 아무개의 말을 명확히 들은 재효와 소영의 낯이 굳었다. 지금, 뭐라고?

“왜냐면, 역병은··· 내가 가진 재액 중에 ······하나일 뿐이니까.”

재효는 소영을 올려다봤다. 들었어? 역귀가 아니라 흉신(凶神)이란다.

······더 지독한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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