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몽혼설 (17)화 (17/138)

17화

퍼억! 소영이 옆에서 밀쳐내자 재효가 바닥을 굴렀다. 덕분에 눈 뜨고도 족자를 빼앗기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은 면하였으나 꼴이 말이 아니었다.

주저앉은 염재효를 지키듯 그 앞으로 석씨 술사들이 속속 몰려들었다.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 포탄이 날아간 듯한 흔적을 남기며 돌진했다. 두 주먹이 수십 개로 분열된 잔상을 남기며 쉴 틈 없이 권법이 퍼부어졌다.

유랑술사는 모조리 피했다.

한 손으론 삿갓 끄트머리를 잡고서 사뿐사뿐 물러선 그는 광폭한 기세로 몰아치는 석씨 술사들과 달리 차분하고 느긋했다. 저들의 매서운 주먹은 유랑술사의 나부끼는 도포 자락조차 스치지 못했다. 같은 공간에 마주 보고 있되, 서로 다른 시간의 흐름이 적용되는 듯하였다.

삿갓을 고정한 손은 봉한 것과 다름없으나,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유랑술사의 보법을 따라 삿갓에 두른 너울이 곱게 휘어지며 넘실거리고 때로는 가파르게 흩날리는 등. 승무를 추는 무희의 기다란 소매처럼 유연하게 따라붙었다.

유랑술사가 한발 앞서 떠나간 빈자리를 석씨 술사들이 내려칠 때마다 쾅, 콰광, 콰아앙! 사람의 육신이 부딪혀 나는 소리라고는 믿기 어려운 굉음이 연달아 울렸다. 일격만 맞아도 뼈가 바스러질 묵직한 위력이었다.

“비켜!”

커다란 외침과 함께 쒜에에엑⎯! 파공성이 울렸다. 멀리서 장창이 날아들었다.

한창 공격을 감행 중이던 석씨 술사들은 급작스럽게 발을 빼기 어려웠다. 아마 창을 던진 자는 상관 않았을 것이다. 예고도 없이 바위를 던졌다며 화내는 재효에게, 어차피 소영이 지켜 줄 게 아니냐며 금비환이 대수롭잖게 여겼듯이. 강암 석씨는 기본적인 석화는 할 줄 알 테니 이 정도로는 다치지 않으리라는 무심한 셈법이었다.

삿갓 그늘 아래 유랑술사의 눈동자만이 위를 향했다. 창이 날아오는 방향과 일직선상에서 한껏 몸을 젖힌 석씨 술사까지 확인한 그의 손가락 사이로 백지 부적이 여럿 끼워졌다.

그의 손끝에서 날아간 부적이 차르륵, 반원을 그리며 석씨 술사들의 이마와 어깨, 팔 등 곳곳에 붙었다. 동시에 그들의 몸이 열 보가량 뒤로 물러났다. 축지술로 이동시킨 것이다.

금비환의 짐작이 옳았다. 유랑술사는 다수에 의해 일방적으로 공격당하는 중에도 그들이 크게 다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유랑술사가 축지로 만들어 낸, 일시적인 공터에 콰직-! 장창이 깊이 파고들었다. 이어서 갈라진 틈새로 물줄기가 솟구쳐올랐다. 지하수를 끌어올린 것이다.

줄기줄기 나뉜 물결들이 소룡의 형상을 띠고서 유랑술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동해 용과 언약을 맺은 운해 하씨의 술법이었다.

유랑술사가 재차 부적을 날리자 하얀 종이가 수룡의 머리부터 꼬리까지 긴 몸통을 이분하여 갈라냈다. 머리와 몸뚱어리 여럿이 차례차례 터져나가고 수룡은 한낱 물 덩어리가 되어 이리저리 튀었다.

알알이 흩어진 작은 물방울이 한낮의 빛을 머금고 눈부시게 반짝였다. 그 사이를 유랑술사가 스쳐 지나갔다. 화륵, 불꽃이 허공에 싹을 틔웠다. 푸르른 귀화(鬼火). 가온 염씨의 도깨비불이었다.

물방울을 잡아먹으며 현현한 도깨비불이 선회(旋回)하며 귀면(鬼面)의 형상을 이뤘다. 귀면이 눈과 입에서 푸른 불꽃을 토해 내며 이글거렸다.

유랑술사는 앞서 하씨 술사들이 내던진 장창을 뽑아 들고 자신을 쫓는 귀면의 미간에 꽂아 넣었다. 수기(水氣)로 가득한 장창이 귀화(鬼火)의 핵을 관통하자 펑! 터져 나가며 작은 불티가 폭죽처럼 수백 수천 갈래로 나뉘었다.

염재효는 한숨을 쉬었다. 운해 하씨의 법보로 가온 염씨의 도깨비불을 상대하다니. 유랑술사는 적의 무기로 적을 상대했다. 이것도 일종의 이이제이려나.

하여간 서로 저희가 제일 잘난 줄 아는 오대세가 놈들은 생전 손발 한번 안 맞춰 본 티가 여실히 났다. 저놈들 머릿속에선 합공이라는 개념이 소멸한 모양이다. 이쯤 되면 유랑술사는 싸우는 게 아니라, 애들이랑 어울려 놀아 주는 게 아닐는지.

“···설마 해치웠나?”

염재효가 작게 중얼거린 찰나. 지척에서 하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리가요.”

“······!”

재효는 기겁하며 유랑술사에게서 물러났다. 동시에 억울함이 불쑥 치솟았다.

“대체 무슨 신령과 언약을 맺었기에 축지술을 이리 남발하고도 멀쩡하냐고! 요!”

술사의 이능은 언약을 맺은 신령의 특성에 따라 갈린다. 도깨비 왕의 축복을 받은 가온 염씨나 동해 용과 약조를 나눈 운해 하씨는 축지술을 사용할 수 없었다.

반면 지상과 연결된, 예컨대 바위산의 신령과 연을 맺은 강암 석씨는 축지술을 운용할 수 있었다.

모두가 가능한 건 아니다. 그들 일족 중에서도 축지를 쓸 정도의 인재는 소수였다. 축지술을 시전할 수 있는 수재 가운데에서도 실전에서 사용 가능한 숙련자가 또 소수. 십 리 이상을 넘어가는 자들은 오대세가를 통틀어서도 극히 일부였다.

그런 술법을 저리 숨 쉬듯 써 대다니. 바짝 열이 올라 언성을 높인 재효의 주변으로 돌개바람이 일었다. 마른 이파리가 모래 먼지와 함께 원을 그리며 둥실 떠올랐다.

“···풍술사?”

재효가 손을 뻗자 주위에 둘러싼 바람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진격했다. 돌풍이 지면에 기다란 상흔을 남기며 유랑술사를 향해 날아들었다. 동시에 땅속에서 어린아이 손목 굵기의 뿌리가 솟아나 유랑술사의 발목을 감아쥐었다. 더는 도망가지 말라는 듯이.

초목을 다루는 화양 율씨의 보조가 더해지고. 기다렸다는 듯 재효의 돌개바람이 몸집을 불렸다. 다그닥 다그닥 굽을 울리는 소리가 몰아치는 질풍에 섞여들었다.

말의 형상을 띤 강풍이 전력으로 질주했다. 갈기와 굽에 푸른 귀화가 타오르는 거대한 말이었다.

풍마(風馬)가 유랑술사를 향해 돌진했다. 콰앙! 파열음이 일고 흙바닥이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유랑술사의 신영이 저 멀리 반대편으로 날아갔다.

바람의 말이 들이받은 자리. 자욱이 일어난 흙먼지 사이로 수십 장의 백지 부적이 푸른 귀화에 타들어 갔다. 유랑술사는 포물선을 그리며 공중에서 한 바퀴 회전한 후 착지했다. 매우 안정적인 동세였다.

“······마신장(馬神將)이 부딪힌 건 부적이었다. 귀인께선 한발 앞서 백지 부적을 밟고 도약하셨다.”

소영의 분석에 재효가 울상을 지었다. 유랑술사가 입꼬리를 희미하게 말아 올렸다.

“십이신장의 일원인 마신장의 바람을 부리고 도깨비 왕의 푸른 귀화까지··· 이중 속성의 술사셨군요. 대단하시네요.”

한 신령과 연을 맺어도 그 권능을 십분 활용하기란 어려울진대. 하물며 두 신령과 동시에 언약을 맺다니. 염재효는 천재라기엔 다소 부족할지언정 수재는 분명했다. 분명한데···

부연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서 기력이 딸려 죽을 듯이 헉헉대는 와중에. 반질반질 멀쩡한 낯으로 헤실헤실 웃는 작자에게서 칭찬을 듣자니. 이건 뭐,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았다고 칭찬받은 꼴이잖나.

“재효.”

수호단을 복용하며 무리한 축지술의 운용으로 전열에서 빠져 있던 소영이 일어섰다. 상황을 예의주시하던 소영은 좋지 않게 흘러가는 추세를 기민하게 감지했다.

“평소처럼 해라.”

그러곤 난리 통에 뿌리가 반쯤 드러난 나무를 끌어안았다. 석소영 본인의 허벅지만 한 두께의 나무가 와직, 우드득- 뒤틀리며 뿌리가 끊어졌다. 무지막지한 괴력으로 나무를 뽑아 든 소영이 그것을 창처럼 내던졌다. 부연 먼지구름 속으로 나무가 일직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유랑술사라면 이쯤은 당연히 피하리라 예상한 소영은 결과를 확인도 않고 뛰어들었다. 

소영이 박차고 나간 지면이 움푹 패며 족적을 남겼다. 부웅- 바람을 가르며 위협적으로 휘두른 발끝이 술사의 삿갓 언저리를 아쉽게 맴돌고 스쳐 갔다.

“그래, 어디 한번 해보자!”

홀로 다짐하듯 읊조린 염재효가 어깨너머로 손을 뻗었다. 기다란 통에서 화살을 한 움큼 집어 내동댕이치듯 뿌리자 화살이 허공에 둥둥 떠다녔다. 몽글몽글한 바람이 네 대의 화살을 떠받쳤다.

소영은 굴러다니는 나무 기둥을 어깨 위로 고쳐 쥐고 몽둥이처럼 휘둘렀다. 유랑술사는 가볍게 피해 냈고 무성한 나뭇가지와 이파리가 죄 없는 바닥을 긁어 댔다.

“미친 거 아니냐?”

염재효가 잇새로 불만을 토로했다.

소영의 힘과 속도는 언제 봐도 놀라웠으나, 오래도록 함께해 온 재효에게는 익숙했다. 문제는 상대방이다. 일견 느릿하게까지 보이는 유랑술사.

잡으려면 능히 잡을 수 있을 것 같으나, 그럴 리 없다. 저런 행위는 상대의 움직임을 완벽히 파악한 후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피해 낼 때 가능한 일이니.

한 차례 공방을 마치고 물러선 소영이 흐트러진 호흡을 골랐다. 소영을 보조하고자 대기 중이던 염재효는 머리를 마구 움켜쥐었다.

소영이 치고 빠지는 순간에 저가 들어가 줘야 하는데, 적절한 때를 통 가늠할 수가 없었다.

“재효!”

공중에서 머뭇거리던 재효의 화살이, 소영의 부름에 반응하듯 쏘아져 나갔다.

바람을 시위 삼아 화살이 튕겨 나갔다. 세 대의 화살이 유랑술사의 우측 어깨와 허벅다리, 가슴을 노렸다. 자연스레 술사는 좌측으로 피하였고 그 방향에선 석소영의 권법이 뼈를 으스러트릴 기세로 접근하고 있었다.

삿갓을 한 차례 더 고쳐 잡은 유랑술사는 소영이 반쯤 뻗은 주먹 아래로 몸을 숙였다. 삿갓의 뾰족한 위 끝이 소영의 팔 하단을 스쳐 갔다.

물 흐르듯 매끄러운 행보로 소영의 공격권에서 벗어난 그를 기다린 것은, 푸른 귀화를 머금은 화살이었다.

아직 미처 가라앉지 못한 먼지구름과 소영의 듬직한 어깨 뒤에 숨겨 둔 화살 한 대가 아래에서 위로 곡선을 그리며 솟구쳤다.

이번엔 술사도 피하지 않았다. 그는 삿갓에 두른 너울을 끌어내리더니 그것으로 화살대를 쳐냈다. 하늘하늘한 면사에 튕긴 화살이 우지끈, 부러졌다.

재효는 화살집을 아예 뒤집어엎어 버렸다. 와르르 쏟아진 화살들이 일제히 허공에 떠올랐다. 무리 지은 그것은 하나의 덩어리로 보였다. 비늘처럼 번뜩이며 일렁이는 화살촉에 파아란 귀화가 맺혔다.

“간다!”

시퍼런 화살 무리가 공중을 헤엄쳐 왔다. 유랑술사는 소영이 내팽개친 나무줄기 아래로 발등을 밀어 넣고 차올렸다. 굵직한 나무가 제기 차듯 불쑥 솟구쳤다. 화살 무리가 나무 기둥에 파바박! 박혀 들더니 뿌리부터 이파리까지 푸른 불꽃에 휩싸였다.

“이제 화살은 전부 끝났⎯”

그때. 어디선가 화살 한 대가 쓱 빠져나와 삿갓을 툭, 치고 갔다.

화살대에는 혈흔이 묻어 있었다. 피를 이용해 무생물을 조종하는 주단 금씨의 술법. 금비환이 미리 안배해 둔 수였다.

유랑술사는 고개를 한 번 까딱함으로써 화살을 피해 냈으나, 삿갓은 그러지 못했다. 삿갓을 치고 떨어트린 화살은 반대편으로 날아가 단단한 바위벽에 부딪혀 팅, 하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어지는 공세에도 술사는 시종일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러했다. 축지를 시전하여 도망친 후배들을 도로 데려왔을 적에도, 근접 거리에서 석씨 술사들이 정권을 퍼붓고, 수룡 십수 마리가 덤벼들고, 이글이글 타오르는 귀화가 뒤쫓고, 화살이 빗발칠 때조차, 별일 아니라는 듯 웃음 짓던,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콰과과광⎯! 굉음이 울려 퍼졌다. 유랑술사를 중심으로 대지가 갈라지며 솟구쳤다. 

마신장이 현신하여 소영을 등에 태우고 재효의 옷깃을 입에 문 채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풍마는 순식간에 지면에서 멀어져 허공을 타올랐다. 높은 하늘 위에서 지상을 내려다본 두 사람은 경악했다.

“···이, 이게 뭐야?”

사방 십 리가 초토화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