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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혼설 (14)화 (14/138)

14화

“······뭐라고?”

미친놈인가? 어이가 없어 넋 놓고 있자니 금비환이 태연히 주장했다.

“그놈은 우리가 호명성에서부터 점찍었다.”

“그럼 성내에서 잡으시던가. 여지껏 가만있다 우리가 개고생해가며 봉인하고 나니 빼앗으려 들어? 이거 도둑놈 아니야?”

원색적인 비난이 퍼부어지자 금비환의 이마에 혈관이 도드라졌다. 그는 다시 한번 인내했다.

“그건 유랑술사가······ 됐다. 잔말 말고 내놓으라면 내놔.”

내 직위는 알고 있겠지? 금비환이 한쪽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

“그 족자. 너희가 평생 보관할 것도 아니잖나? 어차피 내게 넘기게 되어 있는데 좀 더 빨리 준다 해서 별반 다르지도 않을 터.”

오대세가는 각자 견제와 경쟁이 활발한 만큼 교류도 깊었다. 역귀의 봉인은 그야말로 대사건인즉 한 가문에서 자의적으로 처리할 성질이 아니었다. 결국 원로들이 회합을 열면, 당연한 수순으로 현 수장 격인 주단 금씨 측에서 맡게 될 터.

금비환은 주단 금씨에서 같은 항렬을 이끄는 일종의 장이었다. 결국 금비환의 손을 거쳐 갈 테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닌 셈.

소영은 고민했다. 역귀를 잡은 것은 위명을 쌓고자 함이 아니다. 입신양명을 원한다면 훨씬 쉽고 편한 길이 널려 있으니.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나선 까닭은, 어디까지나 공리를 위해서였다.

하면, 지금 넘겨줘도 괜찮지 않을까.

“싫은데?”

소영이 깊이 고민하는 사이 재효가 나서서 거절했다.

“너한테 넘기면 소영이랑 내 이름은 쏙 빠지고 너네 공훈만 남겠지. 우리가 멍청이도 아닌데. 그런 짓을 하겠냐?”

“이름을 빼다니? 아무래도 오해가 있는 듯한데······.”

“오해는 개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랑 소영이한테는 안 통해. 네가 금비설한테 한 짓거리 다 봤으니까.”

금비설. 그 이름 석 자에 금비환이 멈칫했다.

“······비설이와는 사이가 틀어진 거로 아는데. 여전히 걱정해 주나 보지?”

“허어, 참. 걔가 드럽게 재수 없는 거랑 정당한 대우를 못 받는 건 별개의 문제거든? 금비설이 아무리 싸가지가 바가지여도 너네 집안의 말 같잖은 편파를 정당화해 줄 만큼, 내가 머저리는 아니라서.”

재효의 저주받은 혀는 멈추지 않았다.

“금비환. 실력도 모자란 놈이 정치질로 그 자리에 올랐으면서 잘난 척하는 거. 어엄청 꼴사나우니까 작작 해 줄래?”

언어로 비수를 꽂는 듯한 촌철살인이었다. 실제로 함 장군의 의뢰를 완수하지 못한 실책을 역귀의 봉인으로 덮어 보려 한 것이었으니. 아주 틀린 말도 아니렷다.

하나 지적을 하는 재효가 소영의 듬직한 어깨 뒤에 숨어 입만 나불대는 중이었기에 상대를 약 올리는 효과밖에 보지 못했다. 더는 대화가 무용하다 판단한 금비환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하나둘 은신한 기척들이 나타났다. 호명성 객관에서부터 동행해 온 여타 세가의 술사들이었다.

동그랗게 원을 그리며 둘러싸는 패거리를 향해 재효가 질색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말발에서 밀리면 쫄따구 머릿수로 밀어붙일 줄 알았다고!“

“이 자식이, 누구더러 쫄따구라는 거야!?”

“우리는 모두 동등한 동료다!”

재효는 소리친 녀석들을 돌아보았다. 팔에 찬 완장에 그려진, 저와 같은 도깨비 문양을 보자 절로 한숨이 나올 듯했다.

“하이고오, 자발적 쫄따구들이 현실까지 부정하고 자빠졌네. 가온 염씨의 수치다, 수치.”

“너야말로 우리 집안의 수치다, 염재효!”

“석소영! 언제까지 저 망할 천둥벌거숭이와 붙어 다닐 셈이냐. 덩달아 네 평판까지 떨어지잖느냐!”

쏟아지는 아수성 가운데. 마침내 생각을 정리한 소영이 고개를 들었다. 석소영의 올곧은 시선이 금비환을 향했다.

“저는 지금 족자를 넘겨드려도 상관없습니다.”

“역시 재효보다는 소영이 네가 말이 통하는···.”

“하지만 여러분이 무력시위를 표방한 이상, 가만히 넘겨주기는 어렵게 됐습니다.”

“······하아.”

금비환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최대한 말로 해결을 보려 했건만. 염재효 저놈이 다 말아먹었군.”

일순, 금비환의 눈빛이 돌변했다.

잡담이 사라졌다. 급변한 분위기 속, 첨예하게 대치하는 이들은 유치한 말싸움이나 일삼던 좀 전과는 전혀 다른 인물들로 여겨졌다.

소영과 재효는 서로 등을 맞대었다. 저항하기로 했으나, 기실 결과는 빤했다. 소수는 다수를 이길 수 없음으로.

명백한 실력 차가 있다면 또 모를까. 금비환과 함께 온 이들은 명문 오대세가에서 정예로 키워진 인재들이었다. 함 장군의 의뢰에 보낼 정도로 실력이 입증된, 얕볼 수 없는 자들.

역귀를 봉인할 때와 달리 미리 계획을 세우고 함정을 파 두지도 못했다. 눈이 보이지 않던 역귀와 달리 저들은 만전을 기한 채 포위진까지 꾸렸다. 명백히 불리한 상황. 스쳐 가는 바람 한 올의 촉감마저 선명히 와 닿으리만큼, 뚜렷한 전운이 감돌았다.

신경을 곤두세운 대치상황. 참을성이 부족한 염재효가 더는 견디지 못하고 소리쳤다.

“아 몰라. 그냥 덤벼! 너네한테 족자 넘기느니 차라리 버리고 만다!”

“진심인가요?”

“···⎯!?”

등을 맞댄 재효와 소영 사이로 낯선 음성이 끼어들었다.

흠칫 놀란 두 사람이 황급히 물러섰다. 소영과 재효의 발자취를 따라 흙먼지가 일자형으로 길게 일어났다. 순식간에 거리를 띄우고 돌아보자, 그들 가운데 한 인영이 서 있었다. 깊게 눌러쓴 삿갓. 하늘하늘 흘러내린 너울.

“그럼 제게 주시겠어요?”

상대를 확인한 세가의 술사들이 동시에 외쳤다.

“어느 틈에?”

“유랑술사?!”

유랑술사가 손을 들어 너울을 한 겹 걷어 냈다.

“안녕하세요.”

태평하게 인사나 건네는 그를 보며. 소영과 재효는, 아니 이 자리의 모든 세가 술사들은, 좀 전과 비교도 되지 않을 섬뜩함에 몸서리쳤다.

방심하던 찰나 뒤를 빼앗기는 건, 그럴 수 있다. 하나 지금은 전투 직전의 긴장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유랑술사가 언제 어디서 나타난 건지 아무도 몰랐다.

만일 유랑술사가 작정하고 손을 썼다면, 방금 그 한 수로 전원이 몰살당했을 터였다. 자신이 어느 틈에 어찌 죽었는지 자각할 여지조차 남기지 않고.

“그분. 제 일행이에요.”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단 유랑술사의 시선이 재효를, 정확히는 재효가 갈무리한 족자를 향했다.

“돌려주시겠어요?”

“······역귀로 추정되는 자입니다.”

소영이 진중하게 답했다. 유랑술사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래서요?”

“그래서라니, 역귀라니까요? 역귀!”

“저희는 도자역을 일으킨 역귀를 쫓아왔습니다.”

재효가 먼저 언성을 높였다. 소영은 흥분한 재효를 붙잡아 자신의 뒤로 숨겼다.

“도자역이 발발한 고을 주민께서 증언해 주신 인상착의와 이자의 행색이 유사합니다. 또한 이자는 감히 헤아리기조차 버거운, 지독한 원기를 품고 있었습니다.”

육척장신에 떡 벌어진 어깨와 탄탄한 몸. 천하장사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듬직한 소영이 앞에 서자 재효는 완벽히 가려졌다.

“아직 수련이 부족한 저희도 보자마자 알아차렸은 즉··· 귀인께서 모르시진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소영이 호칭 때문에 머뭇거렸음을 알아차린 유랑술사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그분이 지닌 귀기가 상당하지요? 제가 살면서 본 중에도 한 손에 꼽힐 겁니다.”

모두가 흠칫했다. 유랑술사가 위명을 떨친 세월만 거진 이백여 년에 달한다. 그리 긴 시간 동안 한 손에 꼽을 정도라니. 가히 보통은 아니잖은가.

“하나 원기의 농도만으로 단정 지을 수는 없지요. 인상착의는··· 그분께서 도자역 환자의 유품을 챙겨오셨어요. 이 과정에서 오해가 빚어졌을 겁니다.”

“귀인께선 이자가 역귀가 아니라 판단하십니까?”

“네.”

일말의 고민도 없는 즉답. 유랑술사가 부연했다.

“자신이 퍼트린 역병으로 죽은 이의 유품을 챙기고, 가족에게 돌려주러 오는 건··· 역시 이상하잖아요?”

사정 모르는 다른 이들에게는, 유랑술사의 논지가 즉각 이해되지 않았다. 그가 이어 말했다.

“도자역은 역귀가 일으키는 병환이 아닙니다.”

“어찌 그리 확신하십니까?”

“역귀가 일으키는 악질(惡疾)은 차라리 상대하기 편하지요. 신으로 모시어 후히 대접하든, 잡아다 혼쭐을 내어 쫓아내든 하면 되니까요.”

유랑술사가 편하다며 늘어놓는 것에 다른 이들은 되려 기겁했다.

지랄 맞은 역귀 놈 비위 맞추는 게 어디 쉬운 일이던가? 하물며 혼쭐을 내다니. 세가의 원로조차 꺼리는 일이었다. 들이는 수고에 비해 위험이 너무도 크니까. 까딱 잘못하여 역귀가 앙심을 품고 저들에게 화살을 돌리면 어찌한단 말인가.

물론, 그들은 ‘수고에 비해 위험이 큰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자를 하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도자역은 아니에요.”

유랑술사.

“고작 역귀가 일으키는 질환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만큼, 이 땅의 술사들이 무력하지는 않잖아요?”

과거 마마라 불리며 세간을 공포에 떨게 했던 역병, 천연두.

현재는 찾아보기 힘들뿐더러 젊은이들은 병명조차 모르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바로 저자 때문이다.

저 남자. 유랑술사가 두창 홍역을 몰고 오는 역귀를 쓸어 버렸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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