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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혼설 (13)화 (13/138)

13화

아무개가 멀뚱히 있자 상대가 으아악! 하고 고함을 질렀다.

“됐다, 됐어! 내가 말을 말아야지 원. 소영아, 저거 잡아가자!”

“진정해라, 재효. 실지로 역귀인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다.”

“왜 확신을 못 해? 이 끔찍한 기운만으로도 능히 알 수 있을진대. 내 평생 이토록 지독한 원기(怨忌)는 처음이야!”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만.”

아무개는 고개를 갸웃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자신을 잡아가겠다는 듯싶은데.

썩 놀랍진 않았다. 오히려 늦은 감이 있지 않나 하는 상념마저 들었다. 뭐가 어찌 됐든. 가만히 당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더는 팔짱을 낄 수 없다. 아무개는 닥쳐올 공격에 대비해 팔을 풀고 소리에 집중했다. 그의 두 눈은 여전히 무덤의 풍경을 비추고 있었다. 시각이 무용하니 청각에 의지할 수밖에.

분위기가 일변했다. 지금껏 망연하게 있던 아무개가 경계 태세에 들어가자 순식간에 기도가 날카롭게 벼려졌다. 삽시에 동태가 바뀌자 상대측에서도 더는 논쟁을 이어 가지 못했다.

타닥! 두 쌍의 발소리가 좌우로 흩어졌다. 목소리로 판단하건대 우측이 소영이라는 여자, 좌측이 재효라는 남자였다. 그러나 대지를 박차는 걸음은 오른편이 묵직하고 왼편은 비교적 가벼웠다. 남자의 체형이 작거나, 여자가 크거나. 혹은 둘 다이리라.

부웅- 우측에서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매섭게 들려왔다. 아무개는 사뿐히 발을 놀려 두어 걸음 물러섰다. 여자의 주먹이 허공을 후려쳤다. 

연달아 좌측에서 촤아악! 바닥을 긁는 마찰음이 울렸다. 가볍게 뛰어오르자 발밑으로 남자의 다리가 허무하게 스쳐 갔다.

어렵네.

시각을 잃은 채로 상대해 주는 건 제법 까다로운 일이었다. 하필 이런 때 눈이··· 두 사람의 합을 연속적으로 피하며 울적해 하던 아무개는 곧 생각을 달리했다.

난 원래 운이 없었지.

“이익!”

재효라는 녀석은 꽤나 다혈질인 듯싶었다. 공격 몇 번 피했다고 금세 파르륵 떨어 대니.

“소영아!”

두 남녀는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춰 온 듯 합이 척척 맞아떨어졌다. 이름을 부르고 시선을 교환하는 것만으로 서로 의도를 단숨에 파악할 만큼.

쿵, 쿵, 지면을 박차고 소영이 달려들었다. 재효가 움직일 때마다 함께하던 작은 달그락거림도 멎었다. 소영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권법을 내질렀다. 보법을 써 연신 뒤로 물러나던 아무개는 소영의 돌려차기를 피해 좌측으로 상체를 빼냈다. 그 순간, 휘이익⎯ 대기를 꿰뚫는 음파가 매섭게 날아들었다.

화살!

재효의 달그락거림은, 통에 담긴 화살이 부딪치는 소음이었다.

첫 번째는 피했다. 두 번째 세 번째까지도 아슬아슬하게나마 회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소영이 권을 묵직하게 질러오는 동시에 화살 소리가 들렸다. 둘 중 하나는 반드시 허용할 수밖에 없는 절묘한 합격.

이번에는 못 피하겠는데.

“···?! 미친!”

재효가 기겁했다. 세상에 어떤 미친놈이 날아드는 화살을 맨손으로 잡는단 말인가?

녀석의 경악은 아랑곳없이. 아무개는 몸을 회전시켜 화살의 진행 방향을 돌리고 소영의 권격까지 피한 후, 화살이 날아온 쪽을 향해 다시 내던졌다. 쒜에엑⎯! 거친 파공음이 울렸다. 소영이 재효를 찾아 부르며 다급히 고개를 돌린 순간, 턱 밑으로 주먹이 치고 들어왔다. 거구의 몸이 공중에 붕 떠오를 정도로 강렬한 한 방이었다.

아무개는 손끝으로 전해지는 감각에 의아해했다. 이건··· 사람 턱이 아니라, 바윗돌을 가격한 느낌과 유사하질 않은가.

“으아악! 사, 살았다··· 고마워.”

말하는 걸 들어보니 재효 쪽은 사지 멀쩡한 듯했다. 치명상은 못 돼도 어디 한 군데는 스칠 줄 알았건만. 의외로 재효라는 놈의 발이 빨랐던 걸까. 혹은 무언가 술수를 부린 걸지도.

재효의 고맙다는 인사말은 후자 쪽에 무게를 좀 더 실어 주었다. 어쩌면 소영에게는 원격으로 조작할 수 있는 술법이 있을는지 모른다. 그것으로 화살에 맞을 뻔한 재효를 구해 주었을 테지.

되짚어 볼수록 재효라는 녀석이 쏘아 대는 화살도 영 수상쩍었다. 시위를 당기는 소리는 없고 화살이 공중을 가르는 파공성만 울리는 것이 필시 무언가 있구나, 싶었더랬다. 눈으로 볼 수 없으니 추측만 할 뿐. 무엇 하나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재효!”

퉤, 흙 알갱이가 뒤섞인 침을 뱉은 소영이 크게 외쳤다.

“이자는 눈이 보이지 않는다!”

“뭐!?”

들켰네.

하기야 초근접전을 벌이는 중에 그것도 눈치 못 챌 정도로 하수라면, 이리 길게 끌 필요도 없었을 터.

“그럼 을로 갈까?!”

“아니, 정으로 하자!“

갑을병정으로 세부계획까지 세워 둔 모양이다. 아무개는 된통 걸렸음을 즉감했다. 아무래도 이 녀석들, 작정하고 자신을 쫓아온 듯하니 말이다.

그런데도 아무개는 저들의 존재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수면이 부족하여 머리가 둔중해진 탓일까. 잠을 자지 않고 계속 버티다 보면, 자신이 과연 어디까지 멍청해질 수 있는가 한계에 도전하는 기분이었다.

아무개는 제 정신이 명징했던 것이, 말을 할 때 막힘없이 술술 읊던 것이 대관절 언제 적이던가 통 떠오르질 않았다. 뭐, 지나간 일은 하등 중요치 않다.

문제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유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자, 가자아!”

“간다!”

두 사람의 우렁찬 함성과 함께 휘이이익, 화살이 날아들었다. 다만 이번에는 아무개도 조금 당황하였는데, 화살 소리가 앞뒤 양쪽에서 들려온 탓이다. 심지어 재효의 외침은 우측에서, 소영의 목소리는 좌측에서 들렸다.

전후좌우가 막혔다. 그럼 공중은? 피할 수도 없으니 화살 연습용 과녁판이나 되겠지.

결국 아무개는 우측으로 회피했다. 그나마 원거리에서 공격하는 재효 쪽이 직접 상대하기에도 편하리라는 계산에서였다.

그때, 발이 땅 밑으로 쑥 빠졌다.

단단한 흙바닥이 모래사장처럼 부드럽게 변했다. 절로 다리가 휘청해 버린 찰나, 때를 놓치지 않고 화살이 퍽! 꽂혔다. 긴급한 중에도 가까스로 몸을 젖힌 덕에 신체는 멀쩡했으나, 옷이 팽팽히 당겨 움직이질 않았다. 아무개는 손을 뻗어 더듬어 보았다. 화살이 옷감을 꿰뚫고 나무에 박혀 들었다.

“지금이다!”

화살대를 부러트리고 벗어나려는데 무언가 몸을 단단히 조여 왔다. 아무개는 볼 수 없었으나, 재효가 꺼내 든 족자가 뱀처럼 날아들어 아무개와 나무 기둥을 함께 칭칭 감았던 것이다.

족자에서 은은한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흘러나왔다. 기기묘묘한 안개에 휩싸인 아무개의 신형이 먹물처럼 검게 녹아내리며 섞여들더니, 곧 사라졌다.

짙은 먹빛으로 물든 안개가 빨려 들어가자 족자가 저절로 도르륵 말리더니 툭 떨어졌다. 나무에 박힌 부서진 화살대만이 유일한 흔적으로 남았다.

“봉인했다.”

소영이 족자를 주워 끈으로 묶었다. 재효가 신난 강아지처럼 쪼르르 달려왔다.

“이게 다 네 덕분이야! 호명성에서 나오는 길목에 미리 침식(浸蝕)의 술(術)로 모래 함정을 파놓았잖아. 네가 미리 손을 써 둔 곳으로 유인해서 성공했어!”

“······재효 네 화살이 혼동을 주어 생긴 빈틈 덕에 가능했던 일이다.”

귀 끝이 살며시 붉어진 소영은 덤덤한 얼굴로 재효의 공을 짚었다. 재효는 멈추지 않고 아낌없이 칭찬을 퍼부었다.

“나한테 화살이 되돌아왔을 때도 그래. 네가 함정을 발동시켜서 모래 구덩이에 빠진 덕분에 피할 수 있었잖아. 네가 내 은인이야, 생명의 은인!”

한층 더 귀를 발갛게 물들인 소영이 족자를 건네주었다. 재효가 품 안 깊숙이 넣은 후. 소영은 땀으로 젖은 이마를 닦아 내며 후련하게 말했다.

“돌아가자.”

“그래그래. 일단 씻고, 맛있는 거 먹고 싶다!”

힘든 일과를 마치고 귀가하는 이들이 그러하듯. 기력은 소진하였으나 기분은 좋게 발걸음을 옮기던 찰나였다. 그들이 향하려는 길목 정중앙에 선 자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이야, 오랜만이다? 사고뭉치들.”

“······금비환?”

재효는 익숙한 낯짝을 보고 인상을 구겼다.

“댁이 왜 여기 있지?”

“댁이라니. 하여간 버르장머리하고는.”

쯧 혀를 찬 금비환은 두 사람을 향해 느긋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딱 봐도 고생 꽤나 한 모양인데, 그간 수고 많았다.”

그의 말대로. 소영과 재효는 야숙의 강행군을 이어오느라 꾀죄죄했다. 만약 아무개가 눈으로 볼 수 있었다면, 웬 거지 둘이서 금전을 노리고 강도질하려는 건가 오해했을 법한 몰골이었다.

“뭐야, 왜 갑자기 칭찬이지? 불안하게시리.”

자신을 치하하는데도 재효는 도리어 칠색 팔색했다. 오소소 소름이 돋은 팔을 마구 문지르며 재효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서두가 긴 걸 보니 필시 못돼 처먹은 꿍꿍이가 있을 테지. 어서 본론이나 꺼내. 어울리지도 않는 가식은 그만 떨고.”

“이 자식이 진짜.”

순간 울컥한 금비환이 본성을 드러낼 뻔하였으나, 금세 냉정을 되찾고 크흠 헛기침했다. 이어 그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너희가 봉인한 족자. 그거 넘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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