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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혼설 (12)화 (12/138)

12화

“그거······ 빌려주는 사람이, 자기 피로··· 직접 해야 하잖아.”

종이의 거짓 눈은 아무개가 손수 피를 내어 그린 것이었다. 술사가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입가에 검지를 걸고 벌리자 간신히 딱지 앉은 상처가 도로 뜯어지며 피가 주르륵 흘렀다. 만류하고 자시고 할 것 없이 먼저 저질러 버린 것이다.

술사는 아무개의 기행에 할 말을 잃은 듯 잠시간 굳어 있었다. 하나 곧 술식을 운용하여 아무개의 희생이 무의미한 짓이 되지 않도록 해 주었다. 아무개 입장에선 다행스런 일이었다.

“나는··· 싫어.”

당신이 피 흘리는 게 싫다. 단 한 방울이라도.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내심은 속으로 삼킨 채. 아무개는 술사에게 잡힌 오른팔을 꼼지락거렸다.

“······술사님, 팔··· 계속 잡을 거야?”

“불편하시나요?”

“아니, 그게 아니라아···”

언제까지 잡아 줄는지 궁금했을 뿐이다. 객관에서 그가 제안한 ‘임시 동행’은 아무개가 유품을 넘긴 순간 역할을 다 하였으니.

당장 헤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그들이 여태 함께인 이유는, 아무개가 맹인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어서였다.

“적어도 하루는 아씨께서 눈을 대신 쓸 거예요. 시각이 돌아올 때까지 객관에서 쉬는 편이 좋지 않겠어요?”

이 제안도 처음은 아니다. 그가 상의도 없이 무작정 피를 쏟아 낸 아무개의 막무가내를 받아주고 술법으로 완성해 준 배경에는, 하루쯤은 모셔 줄 의사가 있어서였으리라. 훌륭한 객관에서 호의호식하게 해 주기는 금전만 넉넉하면 어렵지 않으니.

다만 아무개는 객관이 편치 않았다. 딱히 객관만 그런 건 아니고, 사람 많은 곳에선 편히 쉴 수가 없었다. 차라리 민둥산에서 노숙하는 쪽이 심적으로는 훨씬 나았다.

하여 아무개는 용건을 끝마치자마자 성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술사는 그 뜻을 따라 주었고.

“······아니야. 일단··· 성에서 나가야 해.”

술사는 축지술에 능통하여 원하는 어디든 당장 데려다줄 수 있었다. 하나 그전에 아무개가 아낙에게서 빌린 옷부터 돌려주어야 했다.

축지는 시전자가 도착지를 정확히 알아야만 가능한 술법이었고, 술사는 아낙의 집을 몰랐으므로. 이렇듯 직접 저자를 누비며 찾아가야 했다.

“저기, 술사님···.”

향 한 대를 다 태우고도 여전히 무덤가를 지켜보는 아씨의 시야로. 왁자한 저자의 소음을 틈타 아무개가 머뭇하며 물었다.

“어째서··· 의원을 붙잡지 않았어?”

양 의원이 별당 지붕에서 몸을 던지던 그 시각.

유랑술사라면 분명 구해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아주 잠깐, 찰나의 망설임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제가 여쭈었지요? 정인이 그리 변할 줄 알았다 해도 유명경으로 되살렸을 거냐고요.”

의원은 대답했다. 물론이라고.

“의원님께선 이미 각오를 마치셨죠. 죽음을 결심한 자를 강제로 구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나 해서 그만, 늦어 버렸네요.”

의외였다. 아무개가 보고 들은 유랑술사의 대외적 모습과 이를 토대로 상상해 온 것과는 꽤 상이한 대답이어서.

“술사님은 어쩐지··· 사람은, 반드시 살려야 한다고··· 할 것 같았는데. ······아니었네.”

“하하. 제 인상이 좀 그런 편인가요?”

하나 사람의 수 만큼이나 다양한 죽음이 있는 것을요.

“모두 다른 죽음인데. 똑같이 취급할 수는 없지요.”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이어 말했다.

“사람에게 살인의 권리가 있다면, 그 대상은 자기 자신이지 않을까요.”

죽고 싶을 때 죽는 것도 일종의 복록일 테지요. 그리 읊조리는 술사의 목소리는 여전히 상냥하고 나긋했다.

그의 친절은 기묘한 구석이 있었다. 죽으려 하는 이를 구하고 말리는 게 아니라, 어찌 죽어야 쉽고 빠르며 고통이 덜한지 상세히 알려 줄 것 같달까.

그나마 양 의원은 편히 간 축에 속했다. 아무개가 가져온 황제의 유품, 사인검은 바위도 베어낼 수 있는 명검이었으니.

무엇이든 날 위에 가져다 대기만 하면 스윽 절단내 버리는 예리한 냉병기. 가히 귀물이라 칭해도 좋은 보검은, 제 위로 떨어지는 살과 근육은 물론 뼈까지 깔끔하게 꿰뚫어 버렸다. 평생 과도 한 번 쥐어 본 적 없다던 아씨가 의원을 쉬이 죽일 수 있었던 건, 모두 사인검 덕이었다.

“아씨는··· 후회하고 있을까?”

술식은 만 하루 동안 아무개의 눈을 빌려주는 것이었다. 하루 십이 시진이 결코 긴 시간이 아닐진대. 마지막으로 눈을 허락받은 짧은 시간 동안 줄곧 무덤가를 머무르니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글쎄요. 제게는 속이 시원하다 하셨어요.”

유명경은 모든 것을 반대로 뒤바꾼다. 그리하여 연모의 감정이 증오로 변질되고 말았다.

하나 마음이란 것이 칼로 자르듯 그리 딱딱 나누어지던가? 허면 애증이라는 말은 어찌하여 생겼겠는가.

「자네 고조부 되시는 양진석 장군 시절부터 이곳 호명성의 성주였으며, 혈족을 몰살시킨 내게 복수하고자 함을 모를 줄 알았던가.」

함 장군의 이야기에서 무언가 익숙하다 했더니. 아무개도 아는 이름자였다. 양진석. 양 부장.

최 장군을 배신하고 제물로 바쳐 새로이 성주가 된 자.

양 의원이 제 몫이라 여겨 온 일상도 거슬러 올라가면, 누군가로부터 강탈한 것이었다. 참으로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인간사로다.

“술사님···.”

“네에, 말씀하세요.”

“옛날에··· 어떤 부자가 있었다고··· 했잖아. ······온갖 진귀한 것을 수집하는···.”

스무 해를 넘기지 못하리라는 아들을 위해 갖은 애를 썼다던 어느 거부. 그는 죽은 이를 되살린다는 귀물 유명경의 소식을 접하였다.

“······그 후에··· 어찌 되었는지··· 알아?”

술사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저승 차사를 속여 유명경을 빼돌리고, 죽은 아들을 살려 냈어요. 되살아난 아들은 온 집안 사람들을 몰살시켰지요.”

차라리 함 장군 댁 아씨가 낫다 싶을 정도의 파국이었다.

“뒤늦게 한낱 인간에게 속았음을 알게 된 저승 차사는 대로하여 징벌을 내렸어요. 삼도천에 다다르지 못하고 이승을 떠도는 원혼들을 대신 거둬들이도록 했지요.”

하루아침에 가족을 잃은 아비는 이승에 얽매인 원혼을 찾아 모았다. 언제 끝날는지 기한조차 마땅히 정해진 바 없는, 죽음조차 허락받지 못한 노역 형이었다.

“얼레, 살아 있었네요?”

물에 젖은 생쥐 꼴로 왔던 초가집에 도착했다. 아무개는 함 장군 댁까지 길을 안내해 줬던 아이에게 빌린 삼베옷을 돌려주었다. 술사가 미리 손을 써 둔 덕에 객관 측에서 피를 빼고 깨끗이 세탁해 준 것이었다.

부친의 옷을 넙죽 받아든 소년은 집으로 들어가 아무개의 원래 옷을 꺼내 주었다.

“실은 어제 몰래 동향이나 볼까 싶어 갔더랬거든요. 한데 장군님댁 분위기가 무진 살벌하기에 도로 와 버렸어요.”

어제라면, 이른 새벽 당도한 유랑술사가 이 댁 아씨께는 악령이 없다 확언하고 마님이 쓰러진 날이렷다. 무시무시할 만도 했다.

“험한 일 당하고 쫓겨났나 싶었는데. 오히려 전번보다 훨씬 멀끔해졌네요? 역시 옷이 날개애···?”

장군 댁에서 준 새 옷을 입은 아무개를 보며 호들갑 떨던 아이는 뒤늦게 몇 걸음 떨어져 기다리는 술사를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어어어?!”

삿갓을 쓴 남자.

평소라면 무심코 스쳐 갔을 터이나, 아이는 함 장군이 소환부를 구했음을 알고 있었다. 장군 댁으로 향한 아무개가 갈 때는 혼자였으나 올 때는 동행이 생겼다면, 그 일행이 사대귀인 중 일인의 외형과 꼭 맞아떨어진다면······

“유랑술사?!”

골목이 떠나갈 듯 쩌렁쩌렁하니. 고놈 목청도 참 좋구나.

면전에서 예고 없이 괴성을 들은 아무개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반면 호명 당한 당사자, 유랑술사는 하하 웃고선 성큼 다가왔다. 그는 딱 한 걸음 내디뎠을 뿐이나, 그 한 걸음으로 저만치 떨어져 있던 아무개의 바로 옆까지 다다랐다.

“볼일은 다 마치셨나요?”

“으응···.”

“그럼, 이만 갈까요?”

술사는 아무개의 어깨 위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그리고 이어진 또 한 번의 이동.

축지술을 연달아 행한 끝에 다다른 곳은, 성문 밖이었다. 느닷없이 나타난 두 인영에 번을 서던 병졸이 소스라치며 기겁했다. 술사는 병사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고는 아무개를 대동한 채 걸어갔다.

“이제 어디로 가실까요?”

“······어어··· 딱히 없는데···.”

“목적지가 없나요?”

“···으응.”

솔직히 터놓자면, 아무개는 자신이 함 장군 댁까지 탈 없이 도달하리라고는 짐작 못 했다. 오는 길에 분명 큰 사고가 벌어지리라 예견했거늘.

그러니 이후의 계획 따위. 있을 리가.

“술사님은··· 있지? 갈 곳.”

“단순히 유무만 따지자면, 있기는 하지요. 갈 곳.”

아무개는 손가락을 꼼질거렸다.

“저기······ 가도 돼.”

“네?”

“나는 괜찮으니까··· 가 봐.”

술사는 대답이 없었다. 눈이 보이질 않으니 그의 반응을 유추할 수 없어 답답했다. 축지를 시전하느라 어깨 위에 얹어진 그의 손이 너무도 선명히 의식되어 몸이 움칫했다. 술사가 손을 떼어냈다.

“저는 이만 가 볼게요.”

“······.”

“가라고 해서 가는 건 아니에요.”

이유는 모르겠으나, 그리 읊조린 술사가 이어 부연했다.

“제가 부담스러우신 듯하니.”

“···어?”

“눈이 다시 보일 때까지는 멀리 가지 마시고 조심히 계세요.”

아닌데. 술사님, 부담 아닌데.

물론 부담스러운 점이 없잖아 있으나, 부정적인 의미로 그런 게 아니건만.

“······술사님?”

아무개는 술사가 있던 자리로 손을 뻗어 보았다. 닿는 게 없다.

“술사님? ···갔어?”

돌아오는 답이 없다. 정말로 가 버린 모양이다.

“······아···.”

갈 때 가더라도, 부담스러워한 게 아니라는 해명은 해야 했거늘. 저가 등 떠밀듯 보내놓고서 아무개는 아쉬워했다.

앞으로 몇 차례나 만날 기회가 있으려나. 평생 없을는지도 모른다. 설령 재회한다 한들 어제오늘처럼 평화로운 기류가 아닐 테지.

······괜히 가라고 했나.

바람이 불어오고 나뭇잎이 서로 맞물려 스치는 소리가 사방에 가득했다. 고요한 소란 속에서 아무개는 조용히 후회를 곱씹었다.

“네놈이 역귀(疫鬼)냐?”

얼마나 지났을까. 사람의 음성이 한 폭의 자연을 뚫고 들어와 거슬리게 했다. 아무개는 여전히 후회했다.

“거기 너! 음침한 놈!”

“······나?”

그제야 아무개가 반응을 보였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상대가 씩씩대며 열을 올렸다.

“그래 너! 여기 너 말고 또 누가 있어!?”

누가 더 있는지 없는지 어찌 확신하겠는가. 앞이 보이질 않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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