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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혼설 (11)화 (11/138)

11화

“나으리!”

허락도 없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행랑아범이 떨리는 손으로 무언가 내밀었다.

“이, 이것을···.”

짙은 먹빛에 금으로 상감한, 예기가 서린 보검. 아무개가 가져온 짐이자, 아씨가 의원을 죽일 때 사용한 무구였다. 아무개가 잊어버린 것을 뒷수습하던 하인이 대신 챙긴 것이다.

“아··· 깜빡했다.”

아무개는 겸연쩍어 작게 웅얼거렸다. 그런데 함 장군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이, 이게 어찌···?”

검을 받아든 장군의 손이 잘게 요동쳤다.

“사인검···!”

이백여 년의 기나긴 시간. 도탄에 빠진 난세를 평정하고 제국을 건설한 황제.

사사로이는, 함 장군의 넷째 자식.

아무개가 가져온 먹빛 검은 함 장군이 넷째를 위해 특별히 제작한 것이었다. 인년(寅年), 인월(寅月), 인일(寅日), 인시(寅時)에 제조하여 호명(虎鳴)의 기운을 담아 사귀(邪鬼)를 물리치는, 보검 중의 보검.

“이 검이 어찌하여 예 있는 게냐. 주인은 어디로 가고!”

“나리, 그것은······.”

행랑아범이 아무개를 힐끔 곁눈질했다. 아무개는 이쯤에서 직접 나서기로 했다.

“그거··· 내가 가져왔어.”

장군이 눈을 부릅뜨고서 아무개를 주시했다. 황제는 아버지께 하사받은 검을 목숨처럼 아꼈으며, 한 시도 몸에서 떼어내지 않았다. 낯설고 연고도 없는 아무개에게 선뜻 내줄 물건이 아니란 뜻이다.

“유품이야.”

아무개가 입을 열었다.

“나는··· 유품을 전해주러 왔어.”

철걱.

먹빛 검이 손에서 떨어졌다. 거대한 고목 같던 함 장군이 비틀하더니 탁상을 짚고 간신히 몸을 버텨 세웠다.

“죽, 었··· 다고?”

아무개가 가져온 것은 단순한 보검이 아니다. 실종된 황제의 사망을 공식적으로 전한 것이다.

너른 손으로 이마를 짚은 장군이 악다문 잇새로 청했다.

“혹, 그 아이의 마지막을 알려 줄 수 있겠소?”

천하를 일통한 패왕이라 한들 아비에겐 언제나 아이인 걸까.

아무개는 바닥에 널브러진 사인검을 내려보다가 장군을 향해 시선을 들었다.

“······돌에 맞아 죽었어.”

“무어라?!”

황제가, 패왕이 돌에 맞아 죽었다고?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현실을 부정하듯 고개를 젓는 함 장군에게 아무개가 부연했다.

“······도자역에 걸렸거든.”

순간, 내실에 찬물을 끼얹은 듯 섬뜩한 고요가 차올랐다. 아무개의 설명은 그토록 충격이었다.

도자역이라 함은 현시대의 다환인이 가장 두려워하는 역병이었다.

병원(病原)이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역질. 상한 곳 없이 건강히 잘 지내던 이가 어느 날 돌연 걸리는가 하면, 단 한 명으로 인해 고을이 통째 휩쓸리기도 하고, 한 지붕 아래 수십 해를 살아온 부부가 서로 옮지 않기도 했다. 어인 연유로 발발하고 어떠한 경로로 퍼져 나가는지 종잡을 수가 없는 변덕스러운 괴질.

유일한 해법은, 환자를 격리하는 것뿐이었다. 사실상 치료는 포기하고 전염되지 않도록 막는 것만이 최선인 셈.

거기까지 사고가 미친 함 장군이 서둘러 아무개를 돌아보았다.

“자네는, 자네는 괜찮은 겐가?”

아무개는 도자역에 걸린 황제와 접촉했다. 허면, 저자는 무사할 것인가? 만일 저치가 도자역에 걸리고서 이곳까지 걸음 하였다면······

“장군님. 어제 보셨지 않습니까.”

술사가 대신하듯 나섰다. 그가 검지로 입가를 톡톡 두드리자 장군의 시선 또한 아무개의 입술 언저리로 향했다. 이 나간 찻잔에 베인 자리에는 지금도 검붉은 딱지가 앉아 있었다.

“······그랬지.”

도자역(陶瓷疫)의 ‘도자’는 자기(瓷器)를 의미했다.

이 병의 증상이 그러했다. 도자역에 걸린 인간은 피와 살이 흙으로 빚어 구운 듯 점차 단단해진다. 넘어지고 부딪히면 멍이 들거나 살갗이 까져 피가 나는 게 아니라, 질그릇처럼 금이 가고 깨져 부서지는 것이다.

아무개는 입술이 찢어지고 피를 흘렸다. 이는 도자역 환자가 아니라는 증명이나 다름없었다.

“···그 애와는 무슨 사이요?”

아무개는 실종된 황제의 마지막을 지켰다. 자식을 모두 잃은 아비의 허망한 물음에, 아무개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무 사이도 아니야.”

그냥, 죽을 때 근처에 있었어.

······어쩌다 보니.

여느 때처럼 덕구 산책을 핑계로 의원에 들른 아씨는 제집인 양 자연스러운 행보였다. 일꾼들도 늘상 있는 일인지라 스스럼없이 반겨 주었다.

의원님은 출타 중이었다. 자리 비운 그를 기다리던 아씨는 약탕기 옆에 덩그러니 남은 하얀 첩지를 발견했다. 해당 약탕기는 양 의원이 함 장군 전용으로 쓰는 것이었으므로, 저 안에 장군께 올릴 오늘치 약재가 들어 있음은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아씨는 생각했다. 내가 탕약을 대신 달여드리면, 의원님이 쉬는 시간이 늘지 않을까?

어깨너머로 보아 온 세월이 세월인지라 탕전은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었다. 아씨는 물을 끓이고 약재를 우려냈다. 그때까지도 의원이 오지 않아, 대접에 탕약을 옮겨 담기까지 끝마쳤다.

아씨에겐 귀엽고 사랑스러운 방해꾼이 있었다. 위험하니 가까이 오면 안 된다 주의를 들은 덕구는 탕전하는 동안 멀리서 기다리며 끙끙 앓다가 대접을 쟁반에 올려 들자 끝났음을 알고 신이 나서 달려왔다.

아씨는 뒷발로 서서는 펄쩍 뛰어오르는 덕구를 피하려다 그만 쟁반을 놓치고 말았다. 대접이 떨어져 구르고 탕약이 흙바닥을 짙은 색으로 물들였다. 사고 친 덕구가 슬그머니 앞발을 내리며 눈을 굴렸다. 아씨는 한숨을 내쉬며 대접과 쟁반을 도로 주웠다.

양 의원이 약재 한 첩 가지고 뭐라 할 위인이 아님은 알지만, 저지른 일이 사라지진 않는다. 어찌할까 고민하던 아씨는 약재 창고지기를 찾았다. 하나 창고지기는 의원이 장군을 위해 조제하는 약재들이 무언지 몰랐다. 장군께 드릴 약재는 의원이 따로 정량하여 특별히 거처에 보관하였기 때문이다.

별다른 소득 없이 돌아 나온 아씨는 죽은 쥐를 발견하고 소스라쳤다. 일꾼에게 치우라 하기도 전에 덕구가 가지고 놀려는 걸 막느라 진을 빼야 했다.

놀람이 진정되고 나자 의아해졌다. 어찌하여 쥐가 예서 죽어 있을까? 다시 보자 쥐의 사체 주변 땅만 유독 축축하였다. 탕약을 쏟았던 바로 그 자리였다.

왜 하필 여기서. 필시 우연일 테지만, 마음 한편에 의구심이 싹을 틔우는 것만은 어찌할 수 없었다.

아씨는 불안감에 휩싸여 약탕기 속 잔뜩 우려낸 약재들을 뒤적였다. 보는 눈이 없어 일일이 구분할 수는 없었으나, 결명자가 없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기이했다. 의원이 장군께 약을 지어드리게 된 계기는, 당신께서 노안으로 눈이 침침해지셨다기에 이를 다스리고자 함이었다. 노안에 결명자는 당연 들어가야 할 터인데.

아씨는 축축이 젖은 약재들을 끌어모아 다른 의원을 찾아갔다. 함 장군 댁 막내 애기씨를 보고 굽신거리며 인사하던 의원은, 아씨가 내민 젖은 약재들을 보고선 기묘한 얼굴을 했다. 그는 아씨가 의술을 독학하며 배합해 본 것이라 여기어 설명해 주었다.

약재 각각을 놓고 보면 기를 보하고 건강을 증진하는 등의 효능이 있으나, 개중 상성이 맞지 않는 것들이 있어 체질에 따라 어떤 이들에게는 치명적인 독이 될 수도 있다고. 한두 번이면 모를까, 이러한 처방은 장기로 복용해서는 안 된다며 차분히 타일렀다.

장군께선 한 해가 넘도록 이 약재를 우려낸 탕약을 드셨건만.

무슨 정신으로 돌아온 건지 모르겠다. 한참을 툇마루에 멍하니 앉아 있으니 양 의원이 귀원했다. 아씨는 그에게 애원했다. 어서 거짓이라 말해 달라고, 무언가 착오가 있었음이 틀림없다고, 당신이 부친께 독약을 먹일 리 없지 않냐고.

의원은 아씨께서 오해하셨노라 안심시켜 주지 않았다. 대신 옛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함 장군이 호명성을 점령하던 시절. 당시 목이 잘린 성주와 그의 아들을. 여물을 실은 수레에 몸을 숨겨 겨우 도망친 손자를.

그 손자가 말하였다. 원수와 정인을 구분 못 한 눈먼 아씨 덕분에, 장군께 쉬이 접근할 수 있었다고.

어여 돌아가 댁의 잘난 부친께 고하시라고.

“어차피 아버님께선 다 알고 계셨는데 말예요.”

아씨는 공허한 목소리로 과거를 반추했다.

“그때엔 당장 처한 상황이 힘겨워 깊게 헤아리질 못하였어요. 이제 와 돌이켜 보건대, 한 해가 넘어가도록 독약을 드시고도 정정하신 게 더 기이한 일입지요. 아버님께선 처음부터 다 알고 탕약을 드시지 않은 거예요.”

함 장군이 그랬다. 양 의원은 과거와 미래 둘 다 놓지 못해 실패한 게 아니라, 단지 실수를 했을 뿐이라고. 좀 더 철저히 완벽하게 아씨를 속였다면, 성공하였으리라고.

“우습지 않습니까. 복수 대상의 동의를 얻은 복수라니.”

냉소적으로 뇌까리는 아씨에게 유랑술사가 여쭈었다.

“지금 아씨께선 부친을 어찌 생각하시나요?”

“말씀드렸잖아요? 우습다고.”

경멸하는 어조로 아씨가 덧붙였다.

“술사 나리 말마따나 애저녁에 죽은 내가 웬 잡스러운 거울 덕에 되살아나 예전과 상반된 감정을 느끼나 봅니다. 과거의 저는 장군님을 꽤 존경하였으니 말예요. 친애는 아니에요. 정을 느끼기엔 그 양반이 무게 잡느라 거리감이 좀 있으셔서요.”

양 의원을 죽인 후. 들끓는 증오가 한 꺼풀 꺾인 아씨는 대화가 통할 정도의 이지를 되찾았다. 하지만 성품은 완전히 뒤바뀌어 버린 듯, 과거 아씨를 익히 알던 친지들은 현재 아씨와 몇 마디 말을 섞자마자 충격으로 입을 열지 못했다. 부인의 심려는 특히나 깊어 다시금 쓰러질 뻔하기도 하였다.

“심문은 이쯤 하는 게 어떨는지요. 제게 허락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니 가능한 즐기고 싶답니다.”

아씨는 일방적으로 통보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고 나가는 아씨의 얼굴에는 선혈로 가짜 눈을 그린 종잇장이 붙어 있었다. 마치 적안장군처럼.

“······얘기··· 다 끝났어?”

문밖에서 웅크리고 있던 아무개가 장지문 너머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술사는 곧장 다가가 그를 향해 손 내밀었다. 하나 아무개의 초점 없는 눈은 허공만 배회했다. 지척에 술사의 손이 다가왔는데도.

“네에. 끝났어요.”

술사가 답하자 그제야 아무개는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칫 얼굴과 부딪힐 뻔하여 술사는 손을 거둬들였다.

별안간 아무개에게서 눈물이 흘렀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방울. 잠시 한눈팔았다간 금세 놓쳤을 그것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술사가 재차 손을 뻗었으나, 아무개가 먼저였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소맷자락으로 닦아내니 미처 닿지 못한 술사의 손은 허공만 움켜쥐었다.

“괜찮으신가요?”

“어··· 괜찮아.”

벌떡 일어난 아무개가 바짓단을 툭툭 털었다. 벽을 더듬더듬 짚어 가며 덧붙여 말했다.

“어차피······ 내 눈물 아니잖아.”

애기씨께 잠시 빌려준 것뿐이니.

둘은 함 장군의 저택 밖으로 걸어 나왔다. 아무개의 시야에는 청기와를 얹은 지붕과 부촌의 너른 거리, 길게 이어진 담벼락 대신, 갓 만들어진 봉분이 보였다. 눈을 내어준 탓이다.

귀를 빌려준 건 아니라 아씨께서 어떤 말을 건네는가는 알 수 없었다. 하나 아무개는 보았다. 양 의원의 무덤 앞에 향을 피우는 아씨의 손을.

“앞에 돌이 있어요. 조심⎯”

아무개가 돌부리에 걸려 휘청였다.

“···⎯하세요.”

술사는 넘어지려는 팔을 잡아 주며 나직이 여쭈었다.

“역시 제 눈을 내어드리는 편이 나았지요?”

장군 댁 아씨께 눈을 빌려주겠다 한 것은 유랑술사였다.

돌이켜보면 그는 초장부터 아씨와 대화를 원하는 의사를 꾸준히 드러냈다. 양 의원이 죽고 증오도 한풀 식은 아씨가 썩 내켜 하지 않자 그는 역으로 제안하였다. 눈을 빌려주는 대가로 짧은 담소를 청한 것이다. 아씨는 받아들였다.

“아니야··· 내가 좋아.”

그때. 아무개가 술사를 대신해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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