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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혼설 (10)화 (10/138)

10화

“유명경을 수령할 당시 주의를 듣지 못하셨나 봅니다.”

술사의 말에 의원이 비단에 싸인 유명경을 품속에서 꺼내 들었다.

“이 거울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어, 필시 후회하리라는 경고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습니다. 하나 사람이 반대로 변한다는 건··· 지금 술사님께 듣고서야 알았습니다.”

거울을 쥔 의원의 손에 힘줄이 돋았다.

“그날··· 아씨께서 저를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누었던 마지막 날. 출타 후 돌아왔을 적에 아씨께선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한숨을 내쉰 의원이 무지근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장군께 독을 먹여 왔음을요.”

유모가 이르길, 지난해 함 장군께서 눈이 침침하다 한 이후로 양 의원은 시키지도 않은 탕약을 꼬박꼬박 지어 올렸으며, 값을 치른다 해도 한사코 마다했다 한다. 적당히 약재만 골라 보내도 될 터인데. 장군께 올리는 탕약만은 항상 손수 달였다고.

그 탕약이, 실상 독약이었던 것이다.

“아씨는 다 아시면서도 제게 답을 구하셨습니다.”

아니지요? 제가 오해를 한 게지요?

의원님이, 아버님께 독약을 드릴 리 없잖아요.

젖은 눈으로 부디 거짓이라 말해 달라 애원하는 아씨에게. 양 의원은 나직이 답했다.

아씨의 아비 되시는 함 장군께서는 젊은 시절 이곳 호명성을 점령하고 성주의 수급을 취하셨습니다. 그자의 이름이 무언지 아십니까?

양태산. 제 조부님이시지요.

자, 어서 가서 알리세요. 아씨의 잘난 아버님께.

“아씨는 눈물지으며 뛰쳐나갔고, 저는 죄인을 포박할 오랏줄을 기다렸습니다. 한데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지요.”

해가 질 무렵. 덕구가 헥헥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의원으로 뛰어 들어왔다. 바짓가랑이를 물고 이리 오라는 듯 낑낑대는 덕구를 쫓아간 끝에 목도한 광경은, 차게 식은 아씨의 몸뚱어리와 유언장을 붙들고 선 함 장군이었다.

“아씨께서 남 탓이라곤 할 줄 모르는, 모든 걸 본인의 잘못으로 돌리는 성품임을 간과했던 겁니다.”

의원은 지붕 끝에 서서 공허한 눈으로 아씨를 내려다보았다. 눈이 없어 볼 수는 없으나 소리로 대략 위치를 짐작한 아씨는 여태 아무개의 짐을 손에 쥐고 있었다. 칭칭 감아 둔 천이 흘러내려 어둠 속 어렴풋한 윤곽을 드러낸 그것은, 다름 아닌 검이었다.

“차라리 지금처럼 확실하게 남을 탓할 줄 아는 모습이 보기 좋군요.”

검을 들고 두리번거리며 저를 찾는 아씨를 향해 의원이 쓰게 웃었다. 술사가 삿갓을 고쳐 썼다.

“만약 유명경으로 살려낸 정인이 이리 변할 줄 알았다면, 그래도 당신께선 아씨를 되살렸을까요?”

“······물론입니다.”

의원은 손에 쥔 유명경을 가만 보더니 마루 끄트머리의 우뚝한 망와에 내리쳤다. 챙그랑! 거울이 산산조각 나며 파편이 사방에 으스러졌다. 깨지고 부서지는 소란 속. 의원의 음성이 명징하게 울렸다.

“낮에 술사님이 떠나고 한참 고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제가 어찌할지 결론을 지었습니다.”

거울 깨지는 소리에 놀란 아씨가 손에 쥔 것을 마구 더듬었다. 흰 천 속에서 비죽 도드라진 칼자루를 쥐자 스릉⎯ 검집이 미끄러져 내리며 스산한 날이 드러났다.

“미래를 살고자 했다면, 과거의 한을 묻어야 했습니다. 과거의 복수를 하고자 했다면, 미래를 단념해야 했습니다.”

지붕의 곡선을 따라 아슬아슬 위태로운 걸음을 옮기던 의원이 처마 끝에 다다랐다. 그의 눈동자에 은은하게 빛나는 검신의 형상이 작게 담기었다.

“어느 쪽도 놓질 못하고 어설피 굴더니··· 결국, 둘 다 손에 쥐지 못하였구나.”

의원의 걸음이 처마 밖 허공을 내디뎠다. 그 몸이 지면을 향해 기울었다.

마루에서 일어난 술사가 떨어지는 의원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손끝은 허망하게 옷자락만 스쳤다.

지붕 아래로 추락한 육신을 칼날이 관통했다. 선혈이 의원의 저고리와 아씨의 치마폭에 점점이 붉은 자국을 남기었다.

과거도 미래도 잃어버린 자가 택한 최후였다.

한 사람이 죽었으나 뒤처리는 고요하고도 신속했다.

유명경에 의해 되살아난 아씨가 돌변한 후. 솔거노비를 대거 외거노비로 전환하고 극소수의 신뢰할 수 있는 인물만 밤의 저택에 남겨 둔 덕이었다.

달이 처마 끝에 걸린 이슥한 밤. 장군의 수족들은 묵묵히 시신을 처리하고 별당을 정리했다. 아랫것들이 뒷일을 수습하는 동안 장군은 술사와 아무개를 처소로 불러들였다.

“악령 따위의 문제가 아니었군. 거울이 지닌 근본적 결함이 문제였소.”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함 장군이 탄식하듯 읊조렸다.

“하긴. 죽은 이를 되살리는데 아무런 위험도 없는 게 더 이상하군.”

그의 탁상에는 깨진 유명경의 파편 일부가 비단에 감싸여 있었다. 하인들이 정리하며 모은 조각이었다. 다시는 원래 모습으로 되돌릴 수 없는.

“놀라지 않으시네요. 예비 사위가 장인어른의 독살을 시도하였는데도.”

술사의 말에 장군이 마른세수를 거듭했다.

“놀랄 일이 무어 있겠소. 공범자끼리.”

······공범자?

“부인은 아무것도 모르오. 일을 저지른 건 나와 양 의원 둘뿐일세.”

밖이 소란스러웠다.

“우리는 무덤까지 비밀을 안고 가기로 했소. 그럴 수밖에 없었지.”

어수선한 발소리.

“셋이 죽고 하나가 실종되었소. 이미 자식을 넷이나 잃은 부인에게 어찌 말할 수 있겠소.”

장지문 너머로 행랑아범이 장군을 급히 찾았다.

“막내마저 죽었다는 것을.”

그날은 덕구가 발치에서 낑낑대며 용을 썼더랬다.

이 녀석이 왜 이러나. 의아해하며 장군은 덕구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그리하여 막내딸을 발견하였을 때.

손수 명을 끊은 아이의 육신은 이미 차게 식은 뒤였다. 아이의 곁에는 유서가 놓여 있었는데, 얄팍한 종잇장에는 스스로를 탓하는 글뿐이었다.

⎯ 내 눈이 어두워 아비를 해하려는 자를 알아보지 못하고 은애하였으니, 모두 나의 잘못이다. 눈을 뜨고도 진실을 보지 못하니 이는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지 않은가.

그리하여 아이는 제 눈을 찌르고 자결하였다. 어리석은 딸이라 죄송하다는 사죄를 남기고서.

막내딸의 성품을 꼭 닮은 가지런한 필체를 지문으로 덧그리던 중. 덕구가 의원을 데리고 왔다. 끝내 모질지 못한 딸아이는 의원에게도 지면을 낭비하는 아량을 베풀었기에. 장군은 그에게도 유서를 건넸다.

⎯ 의원님 가족을 빼앗은 건 제가 아니오나, 당신의 것이었던 유년 시절을 누려 온 저 또한 무결하다 할 수 없으니. 부족하나마 이 목숨으로 만족해 주시길 바랍니다.

전장에서 태어나 난세를 헤쳐 온 장군은 한시도 검을 떼어놓은 적 없었다. 침소에 들 때조차도.

함 장군은 죄인처럼 고개 숙인 양 의원을 향해. 신체의 일부나 다름없는 검을 뽑아 들었다.

「자네의 죄를 아는가.」

「······예.」

「아니. 자네는 모르고 있네.」

장인 장모에게 신뢰받는 예비 사위. 모두가 입을 모아 칭찬하는 훌륭한 신랑감.

「자네가 올리는 탕약에 독이 섞이었음을 내 모를 줄 알았던가.」

「······!」

「자네 고조부 되시는 양진석 장군 시절부터 이곳 호명성의 성주였으며, 혈족을 몰살시킨 내게 복수하고자 함을 모를 줄 알았던가.」

함 장군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자네를 내버려 둔 까닭은, 내가 나이를 먹은 탓일세.」

한창때의 장군이었다면, 불온의 씨앗이 싹을 틔우기도 전에 뿌리째 뽑아 버렸을 터였다. 하나 이순을 훌쩍 넘긴 그는 새삼 피를 묻히기엔 몸도 마음도 말라비틀어져 버렸다.

「딸아이가 연모의 감정을 품었고, 자네 또한 마음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며······」

첫째가 살아 있었다면, 손주들과 동년배였을 막내딸이다. 바람 불면 날아갈까 손에 쥐면 바스러질까 노심초사하며 키운 금지옥엽 장중보옥이다.

「······내가 뿌린 피는, 내가 거두어 가리라 정했기에 그리했네.」

설령 원수의 자식이라 해도 심중에 진심이 담겨 있다면. 증오와 연심을 이분하고 태도를 분명히 구별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여겼다. 얼마 남지 않은 늙은이의 목숨과 어린 딸아이의 행복을 바꿀 수 있다면 남는 장사가 아니던가.

「이제 알겠나.」

장군은 의원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자네의 죄는, 이 아이에게 들킨 것일세.」

복수를 위해 접근한 것도, 탕약에 독을 섞은 것도, 제 목을 노리는 것도, 모두 괜찮았다.

평생 숨기고 살 수만 있다면.

「장군님.」

「유언이라면 들어주지. 길게 끌지는 말게.」

딸아이의 유언도 그리 길지 않았으니.

「······살릴 수 있습니다.」

그때 죽였어야 했건만.

살릴 수 있다는 그 한마디에, 상대를 겨눈 검 끝이 흔들렸다.

결국. 놈을 죽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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