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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혼설 (9)화 (9/138)

9화

우울하게 두 주먹을 쥐고 팔을 엉성하게 들어 올리자 기어이 너울 너머로 파핫, 하고 터지는 듯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아, 정말. 참아 보려고 했는데.”

참아? 무얼?

멀뚱멀뚱 있자니 백지 부적이 날아와 아무개의 팔을 휘감아 내렸다. 그제야 아무개는 아까부터 술사가 억누르던 것이 ‘화’가 아닌 ‘웃음’임을 깨달았다.

“왜 이리 심각해요.”

술사의 목소리엔 여전히 피식피식 바람 새는 듯한 웃음기가 머금어져 있었다. 그가 화나지 않았다니 다행이긴 하나, 심각할 일은 맞았다. 술사를 보고 금방 정신이 들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미안해···.”

아무개가 시무룩하게 웅얼거리자 술사가 한 손을 들어 너울을 걷어 냈다.

“악몽이 아주 무서웠나 봐요.”

다정한 물음에 가슴께가 흐물흐물해지는 것만 같았다. 아무개는 어물어물 입을 열었다.

“···그냥, 꿈자리가 좀······.”

웬 장군이 되어서 수하에게 배신당하고 처참하게 죽었다.

긴긴 꿈의 한 줄 요약을 들은 술사는 웃는 듯 마는 듯 구분이 어려운 미묘한 표정을 했다.

“꿈이 무척 자세하네요.”

“으응··· 그렇지.”

아무개는 꿈을 인지할 수 있다. 일종의 자각몽이었으나, 단 그뿐. 몽중에 하늘을 날거나 물 위를 걷는 등 자유로이 행동하는 건 불가했다.

아무개에게 꿈이란 감옥이자 발버둥 칠수록 더욱 깊숙이 빠지고 마는 늪이었다. 적안장군도 그러했다. 꿈의 초입에 들어설 무렵, 아무개는 자신과 적안장군을 분명히 구분하고 거리를 유지했다. 하나 꿈이 깊어질수록 사고도 감정도 점차 경계가 모호해져 종국에는 동화되고 말았다.

매 꿈이 이 모양이다 보니 아무개는 다소 극단적인 조처를 내렸다. 잠을 자지 않고 최대한 뜬눈으로 버티는 것이다.

단순하고 무식한 방법이다. 덕분에 매일같이 머리가 둔중하고 눈 밑에 피로가 그득 고였지만, 달리 방도가 없질 않나. 아무개는 잠기운을 떨쳐내고자 얼굴을 좌우로 가볍게 털었다.

“술사님··· 어디 가?”

당혹감을 가라앉히고 다시 보니 술사는 의관을 갖추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외출할 것 같은 모양새의 그가 너울을 도로 내리며 물러섰다.

“함 장군님 댁이요. 슬슬 가 볼까 싶어서요.”

밤에 가기로 하지 않았나? 하고 밖을 보니 벌써 노을이 지고 어둠이 사락사락 내리었다.

“나도··· 같이, 가도 돼?”

“물론이지요.”

아무개는 벽에 비스듬히 세워 둔 기다란 막대 형태의 짐을 품에 안고 객관을 나섰다.

무수한 걸음으로 단단하게 다져진 거리에서. 각자의 사정에 따라 오가는 행인들 사이를 나란히 거닐며. 아무개는 술사를 힐끔 보았다.

그는 외출이 잦은 이답지 않게 살결이 희었다. 아무개처럼 어디 문제 있나 싶을 정도로 창백한 게 아니라, 건강하게 혈색이 도는 얼굴이었다. 늘 삿갓을 쓰고 다녀 그런 걸 테지. 그에게선 수련 도중 흔히 생기는 자잘한 상흔 따위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세상 그 무엇도 이 남자를 흠집 낼 수 없다는 듯이.

다만 한 가지. 무결한 육신에 옥에 티처럼 자리 잡은 유일한 흉터가 왼손에 사선 형태로 남아 있었다. 쓸리고 까진 종류가 아니다. 저것은 관통흔이다.

“술사님.”

사고의 흐름이 정리되자마자 돌연 입술이 멋대로 움직였다.

“손에 흉터··· 물어봐도 돼?”

방법은 모르겠으나, 술사는 오늘 중으로 장군 댁 아씨 문제를 해결할 셈인 듯했다. 그럼 자신도 용무를 볼 수 있을 테고. 이후에는··· 헤어지겠지? 더는 함께할 까닭이 없으니.

어쩌면, 지금이 그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일는지 모른다.

“흉터? 아, 이거 말인가요?”

그가 왼손을 들어 보였다. 손등을 넘어 손바닥에 이르기까지. 동일한 위치에 남은 흉이 또렷이 보였다.

술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금껏 그래 왔듯 대강 웃음으로 넘길 수도 있을 터지만, 그는 좀 더 진중한 답을 택했다.

“제 인생에서 가장 한심하고, 형편없고, 제정신이 아니던 시절에. 충동적으로 저지를 뻔한 실수를 막아 준 상처예요.”

“······관통상, 같은데···.”

“맞아요.”

그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제가 직접 찔렀거든요.”

말문이 막혔다. 대화를 어찌 이어 가야 할지 통 모르겠기에 아무개는 무작정 사과부터 했다.

“······미안.”

“하하, 미안할 게 무어 있나요. 제가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을.”

단순한 궁금증이었을 뿐인데 예상외로 무거운 화제였다. 괜히 물어봤다.

아무개가 속으로 낙담하는 사이 어느덧 장군 댁의 검푸른 청기와 지붕이 보였다. 대문 밖에서 빗장을 걸던 하인이 그들을 발견하고는 냉큼 달려왔다.

“아이고, 술사 나리. 지금 막 모시러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술사는 가볍게 묵례했다.

“지금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물론입죠! 감히 누가 술사 나리를 막아서겠습니까? 한데 이자는···.”

하인은 아무개를 경계하는 눈초리로 보았다. 그새 아랫것들 사이에서 아무개에 대한 뒷말이 돈 모양이었다.

“제 일행입니다.”

“네? 듣기로는 저자가 하루 전날부터 대문 앞에서···.”

“일행이 맞습니다.”

“그, 그렇습니까?”

술사가 웃으며 단호히 말하자 하인이 금세 수그러들었다. 그는 하인보다 먼저 나서서 빗장을 풀고 들어갔다.

“저는 별당으로 가 보겠습니다. 장군님께는 대신 말씀 전해주세요.”

외거노비를 모두 돌려보낸 저택은 낮과 달리 인기척이 드문드문했다. 덕분에 방해받지 않고 순조로이 중문을 넘어선 술사는 스산함이 감도는 별당에 다시금 걸음 하였다. 그가 별당 앞에 서서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아씨, 주무시고 계신가요?”

별당에서는 어떤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술사는 개의치 않고 재차 입을 열었다.

“이른 아침부터 소란을 피워 죄송하나, 실례를 무릅쓰고 뵙기를 청합니다.”

아무개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검푸른 하늘 끝자락에 초승달이 걸려 있었다. 결코 이른 아침이라고는 여길 수 없는 풍경.

“실은 오늘 양 의원님을 뵈었습니다만⎯”

양 의원.

그 직함을 꺼내기 무섭게 별당 안에서 요란한 굉음이 울렸다. 부딪히고 깨지고 넘어지는 온갖 소음 끝에 타악-! 장지문이 떨어져 나갈 듯 격하게 열어젖혔다. 활짝 열린 문짝 사이로 해초처럼 긴 머리카락이 마구 헝클어져 흘러내렸다.

“의···원님?”

성대를 손톱으로 긁어내린 듯한 쇳소리. 보통 사람이라면 절로 뒷걸음질 칠 만큼 섬뜩한 모습이었다.

“안녕하세요, 아씨.”

하나 술사는 도리어 한발 더 나아갔다.

“의원님······ 의, 원님···?”

“안타깝게도 저는 찾으시는 의원님이 아니에요.”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그가 조곤조곤 운을 뗐다.

“장군님께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아씨께 붙은 악령을 제령해드리라고요.”

창백한 손이 마루 위를 더듬었다. 산발한 머리에 가려진 얼굴이 이리저리 고개를 기우뚱했다. 그럴수록 아씨의 눈을 감싼 붕대가 느슨히 풀어졌다.

“한데 아씨께는 악령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네요. 저뿐 아니라, 초청받은 모든 술사가 같은 의견이라지 뭐예요.”

천천히, 느릿하게. 술사가 거리를 좁혀 갔다. 아무개도 그를 따라 별당 아씨를 향해 점차 다가갔다. 술사는 흘러내리는 붕대를 잡아 주려는 듯 손을 내밀었고 그 순간, 아씨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무개는 똑똑히 보았다. 헝클어진 머리칼과 느슨히 풀린 붕대 사이로. 안구가 있어야 할 자리를 대신하듯 텅 비어 버린 검은 구멍을.

“무얼 하시는 게요!”

함 장군이 서둘러 중문을 넘어왔다. 그의 꽉 찬 음성이 별당 안뜰을 호령했다.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마시오!”

장군에게 무언가 답하려는 듯 술사가 고개를 뒤로 했다. 동시에 아씨가 별안간 손톱을 세우더니 술사를 향해 휘둘렀다.

탁-!

하지만 그 손은 미처 닿지 못했다. 긴 짐을 검처럼 쥔 아무개가 앞서 쳐내었기에.

아무개는 호위무사라도 된 양 술사와 아씨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목표를 잃은 아씨의 손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공을 헤매었다.

“······의원님··· 어디 계세요···?”

의원님··· 의원님······

세상에 존재하는 단어가 오직 그뿐인 듯. 의원님, 의원님만 찾아 부르는 행태에 함 장군이 소리칠 기력마저 잃은 듯이 굳어 버렸다.

얼결에 아무개 뒤로 숨는 형상이 된 술사는 기이한 것을 보듯 아무개의 동그마한 머리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이 가느스름해졌으나, 입가에는 습관적인 미소를 띠고 있었다.

“어찌하나요. 아씨께서 저희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의원님만 애타게 찾으시니.”

어찌할까요, 하고 재차 읊조린 그가 고개를 살며시 기울였다.

“의원님을 모셔 올까요?”

“······무어라?”

함 장군이 경악하며 숨을 들이켰다. 아씨는 의원님을 모셔 오겠다 하니 고개를 휙 치켜들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격렬한 반응. 술사의 입술에 한층 짙어진 웃음기가 감돌았다.

“아씨. 의원님이 보고 싶으셔요?”

“······의원님··· 의원님···!”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술사가 자취를 감추었다. 삽시에 기척이 사라지자 아무개는 아씨를 견제하는 것도 잊고 뒤를 돌아보았다.

“······술사님?”

아무개는 당혹하여 안뜰을 휘휘 둘러보았다. 그간의 모든 일이 환상이었나 싶을 만큼, 술사는 온데간데없었다.

“왜 그러고 계세요?”

그때 얇디얇은 너울이 하늘거리며 시야를 가득 채우고 지나갔다. 술사의 물음이 귓가에 맴돌고, 아무개는 당연한 듯 태연히 선 그를 목도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안도감에 힘이 풀려 버렸다.

내내 들고 다니던 기다란 짐이 손에서 떨어졌다. 지면에 추락해 부딪히며 철커덕, 묵직한 쇳소리를 냈으나 아무개는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

“술··· 사님?”

“네에. 술사님이에요.”

“어디··· 갔었어?”

“의원님을 모셔 왔지요.”

설명을 듣고서야 아무개는 그의 반대편 손에 잡힌 양 의원을 발견했다. 어찌 된 일인지 뒤늦은 깨달음이 찾아왔다.

축지술. 땅을 접어 먼 거리를 줄여 가는 술법.

그는 아씨의 별당에서 축지술을 써 의원을 데려온 것이다. 주변을 돌아본 양 의원의 안색이 희게 질렸다.

“여기는···!”

짧은 외마디. 고작 그 한 마디로도 의원의 목소리를 기민하게 감지한 아씨가 삐딱하게 고개를 틀었다. 붕대가 완전히 흘러내리고 텅 빈 눈이 의원을 향했다.

“······의원님?”

삐걱대듯 기이한 각으로 목을 꺾은 아씨는 입꼬리가 찢어지도록 길게 늘어뜨렸다.

“의원님!”

벌떡 일어난 아씨가 의원을 향해 달려들었다. 신도 신지 않은 맨발로 마루를 넘다 떨어져 구르고 흙투성이가 되어서도 멈추지 않았다.

“죽어! 죽어 버려!”

산발한 채 덤벼드는 아씨를 곤란한 듯 주시하던 술사가 의원을 어깨 위로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단숨에 발돋움하여 지붕 위로 사뿐 올라섰다.

“의원님을 모셔 오면 이야기가 통할까 싶었는데. 아씨께서 흥분이 과하셨네요. 잠시 여기서 기다릴까요.”

“······아, 네···.”

한발 늦게 당도한 애기씨는 아무개가 떨어트린 짐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주저앉아 바닥을 더듬던 아씨의 손에 기다란 짐이 덜컥 붙잡혔다.

별당 지붕에 자리 잡은 술사는 주의를 끌듯 가볍게 손뼉을 쳤다.

“제가 재미없는 얘길 하나 해드릴게요.”

옛날 어느 마을에 수 대를 이어 온 만석꾼 집안의 후예가 있었어요. 어지간한 소국의 왕도 부럽지 않을 부호였던 그는 온갖 진귀한 기물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었지요.

그에게는 지극히 아끼는 아들이 있었는데, 고명한 술사가 이르되 길어야 스무 해를 넘기지 못하리라 장담하였어요. 갑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아들을 살리고자 무던히 애를 썼습니다. 어릴 적부터 치마저고리를 입혀 여아로 분하여 기르고, 아들과 같은 사주를 지닌 아이를 사들여 친자인 양 바꿔 키우는 등, 속임수도 서슴지 않았지요.

하나 어찌해도 안심이 되지 않았던 부자는, 수소문 끝에 죽은 이를 되살려 낸다는 귀물을 알게 돼요.

“유명경(幽明鏡).”

“······.”

“이름 그대로, 저승과 이승을 비추는 거울이지요.”

지붕 마루에 털썩 앉은 술사가 무릎에 팔을 세우고 턱을 괴었다.

“이 거울은 이승의 것과 저승의 것을 바꿉니다. 이승에서 죽은 것에 유명경을 비추면, 저승에서 산 것과 바뀌지요.”

술사의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양 의원과 함 장군의 안색이 시퍼렇게 질려 갔다.

“유명경은 ‘거울’이에요. 하여 거울의 특징이 반영되어 있지요.”

언제나처럼 상냥한 어조로 말을 잇는 그에게. 아무개는 무의식중에 답하였다.

“······좌우가··· 바뀌는 거?”

“네에, 그거요.”

엄밀히 따지면 좌우가 아니라 선후가 바뀐다지만, 하고 덧붙인 술사가 결론을 지었다.

“핵심은 반대로 뒤집힌다는 점이지요.”

“그래서······.”

참하고, 어여쁘며, 착하고, 조용한 아씨. 한없이 곱고 고운 분. 어인 사달이 나도 내 탓이오, 내 탓이오 하는 애기씨.

어느 날 돌연히 변해 버린 아씨.

“······성격도 뒤바뀐 건가?”

아무개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삿갓 아래 늘어진 너울 사이로 술사의 입꼬리가 부드러이 휘었다.

“영민하시네요.”

칭찬받았다. 그럴 분위기가 아닐 진대도 아무개는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유명경을 사용해 되살린 이는 외면도, 내면도, 심지어 감정조차 생전의 것과 반대가 되어 버리지요.”

실은 아씨의 유모님을 뵙고 전해 들었어요.

“아씨께선 오른손잡이라지요?”

미친 사람처럼 의원을 향해 죽으라 고함 지르던 아씨가 우뚝 멈췄다.

“아까 할퀴려 하실 때 보니··· 아씨께서 왼손을 내미시더라고요.”

“······.”

“지금도 그거, 왼손으로 잡으셨네요.”

흰 천에 감싸인 물건을 쥔 아씨의 손은, 시퍼런 멍이 들고 거스러미가 박힌 왼손이었다.

“오른손잡이가 왼손을 쓰고, 낮에 자고 밤에 일어나며, 차분하고 얌전한 성정이 불처럼 괄괄해지고, 연모하던 정인을 증오하여 죽이려 들고······.”

좌우가 변하고, 밤낮이 바뀌며, 성품이 일변하고, 감정마저 역으로 뒤바뀌는,

유명경으로 되살아난 자의 특징과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아씨께서 저리되시기 전, 며칠간 외유를 떠나셨습니다.」

아무개는 유모가 들려준 이야기를 회상했다. 그 말대로 아씨는 외유를 다녀왔더랬다.

삼도천을 건너, 머나먼 저승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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