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그때 심부름꾼이 유모를 모셔 왔다. 자리를 하나 더 마련해 준 심부름꾼에게 술사가 수고비를 두둑이 건넸다.
유모는 인상 좋고 후덕한 노파였다. 다만 친딸처럼 키운 애기씨께 닥친 불행과 건강상의 이유로 안색이 편치만은 않았다.
“애기씨는 어릴 적부터 마님께서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하셨습니다.”
유모는 장군 댁에서 머문 세월이 쌓이고 쌓여 무거운 입을 지녔으나, 애기씨를 위해 어렵사리 뫼셔 온 유랑술사에게는 선선했다.
“세상이 하 수선하잖습니까? 다섯 자식 중에 넷을 먼저 보내고 겨우 하나 남은 여식인 데다 느지막이 본 막둥이라 그저 곱고 귀하게 키우셨지요.”
그 다섯 자식 중 넷째가 바로 실종된 황제였다.
“참하고, 어여쁘고, 순한 성정이십니다. 평생 남 탓이라곤 해 본 적 없어 무슨 일이라도 날라치면 내 탓이오 내 탓이오 하셨더랬죠. ······느닷없이 돌변하기 전까지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유모의 기억 속 애기씨와 아무개가 겪은 아씨는 다른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괴리감이 컸다. 하지만 자신을 유랑술사에게 딸려온 덤 정도로 여긴 아무개는 그들의 대화를 관조했다.
“혹 아씨께서 변할 무렵에 특별한 일은 없었나요? 사소한 것도 좋습니다.”
“특별한 일이랄 것은 없지만, 혼례를 앞둔 여인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맘이 싱숭생숭하신 것 같더랬지요.”
불현듯.
“그러고 보니······.”
유모가 생각에 잠겼다.
“아씨께서 저리되시기 전, 며칠간 외유를 떠나셨습니다.”
그것은 다소 일방적이고도 급작스러운 통보였다.
“아씨께서 덕구랑 산보 다녀오겠다 하셨습죠. 한데 밤늦도록 돌아오질 않으시더니, 대뜸 부녀지간이 먼 길을 떠났다지 뭡니까?”
당사자인 애기씨는 물론, 부인께도 미리 언질을 주지 않은. 참으로 급작스러운 여정.
“나리께서 그리 즉흥적으로 결행하신 건 처음이라 다들 놀란 기억이 여직 새록새록 합니다. 한참 만에 아씨께서 귀택하셨는데······.”
애기씨가 딴사람처럼 변해 버렸다.
“나리께선 어디로 유람을 가셨던 겐지, 대체 어인 곡절이 있었는지 통 말씀을 않으십니다. 마님께서 울고불고 혼절해도 입을 꾹 다물고 계시지요.”
아무개는 대강 흐름을 정리했다. 아씨는 덕구와 산책하던 중 장군과 유람을 떠났고, 귀가할 무렵 돌변했다.
단순히 시간순으로 놓고 봐도 부녀간 여정에서 모종의 사건이 있음 직했다. 하나 함 장군은 그에 관해 털어놓을 생각이 일절 없었다. 어렵사리 구한 소환부로 모셔 온 유랑술사에게조차 일언반구도 없는 거로 보아 필경 그랬다.
숨기는 게 있다. 내막은 차치하고 장군이 이리 감추는 연유를 도통 모르겠다. 설령 켕기는 게 있다 한들 아씨를 구하러 온 술사뿐 아니라 부인에게까지 쉬쉬할 까닭이 대관절 무어란 말인가.
“그날 아씨와 산책 갔던 덕구는 어찌 되었나요?”
“양 의원께서 데려다주셨습니다. 아씨는 산책 핑계로 의원에 자주 들러서 덕구도 의원님을 잘 알고 좋아하거든요. 하여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양 의원.
의원님?
“참, 양 의원님은 저희 아씨와 미래를 약조한 분이십니다. 이 일대에서 의술로는 한 손에 꼽는 분입지요. 연배를 생각하면 향후 제일이 예정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죠.”
막내 아씨를 낳고 노산의 위험을 가까스로 넘긴 마님은 전에 비할 바 없이 쇠약해졌다. 어린 시절부터 잔병치레가 많은 어머니를 걱정한 효심 깊은 애기씨는 당신을 위해 직접 의원을 드나들며 약 첩을 받아 왔다.
그렇게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당시에는 양 의원님 스승 되시는 공 의원님이 계셨더랬죠. 지난해에 작고하시고 양 의원께서 젊은 나이에 자리를 물려받으셨습니다.”
인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솔직히 처음에는 성에 차지 않았다고. 유모는 내심을 털어놓았다.
“공 의원께서 먼 고을로 문진 가서 거둬들인 고아거든요. 제 천성이 옹졸하여 출신이 탐탁지 않았습니다. 우리 아씨께서 좋으시다니 어쩔 수 없지, 사람이 중하지 집안이 무슨 상관이냐, 어차피 다환 땅에 우리 아씨보다 훌륭한 집안의 신랑감은 없으니 감수할 수밖에, 그리 여겼습니다.”
하지만 지금 양 의원을 언급하는 유모는 피로한 안색에도 희미하게나마 미소를 머금었다.
“옹심을 품고 삐딱하게 보았는데. 어째 보면 볼수록 사람이 진국이지 뭡니까? 지난해엔 주인 나리께서 눈이 침침하다 하셨더니 시키지도 않은 탕약을 꼬박꼬박 지어 올렸더랬지요. 값을 치르겠다 해도 한사코 마다하더이다.”
적당히 약재만 골라 보내고 자질구레한 일은 아랫것들에게 맡겨도 될 터인데. 장군께 올리는 탕약만은 늘 손수 달였다. 그 일은 애기씨께 우환이 닥칠 때까지 계속되었다.
온 땅을 다 뒤져도 의원님처럼 반듯하고 훌륭한 인품은 찾기 힘들 거라고. 유모는 마지막까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아무개는 재차 괴리감에 사로잡혔다. 정황상 애기씨가 새벽녘 목 놓아 부르짖던 그 의원이 양 의원인 듯한데. 이리 헌신적인 정인을 죽이려 들다니.
“혹 근래 아씨께서 밤중에 벌이는 기벽을 보신 적 있나요?”
“당연하죠.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매일 아침나절에나 돌아오는 아씨 이부자리를 봐 주고 머리를 빗겨 주는 게 이 늙은이 일과였습니다.”
“그럼 아씨께서 매일 밤 찾아 헤매는 이가 누군지 아시겠네요.”
“······물론입죠.”
유모는 연거푸 탄식을 내뱉었다.
“긴 여정을 마치고 나리와 아씨께서 귀택한 날이었습니다.”
급작스런 여정에서 한참 만에 돌아온 애기씨는 함 장군의 등에 업혀 대문을 넘었다. 아무리 부모 자식 간이라곤 하나 다 큰 여인이 아비 등에 업힌 모양은 남우세스러웠다. 약혼자인 양 의원이 곁에 동행하고 있어 더욱 그랬다.
유모는 발을 동동 굴렀으나 속도 모르고 아씨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장군은 여독이 쌓여 피로한 탓이니 깨우지 말라 당부하며 양 의원과 별당에 들어갔다.
그날 밤. 찢어지는 비명이 울려 퍼졌다. 놀란 하인들이 황급히 달려갔으나, 상황은 이미 벌어진 뒤였다.
“아씨께서 직접 검을 들고서 의원님을······ 다행히 급소는 피했다만, 의원님 팔이 베이셨죠.”
원래 우리 아씨는 절대 그럴 분이 아니라고, 유모는 거듭 강조했다.
“술사님을 뫼셔 온 소환부인지 머시긴지도 다 양 의원께서 어렵사리 구한 겁니다. 두 분은 서로를 끔찍이 아끼셨어요. 못돼먹은 악령이 술수를 쓴 게 틀림없습니다.”
어느 날 느닷없이 돌변하여 은애하는 정인을 죽이려 든다. 확실히 정상은 아니었다.
“양 의원님을 뵈려면 어디로 가야 할까요?”
유모는 의원의 위치를 알려 주었다. 의외로 함 장군 댁과 멀지 않은 곳에 있어 길 찾기는 수월할 듯싶었다.
아씨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고부터는 사소한 여담이 이어졌다. 술사는 별 뜻 없이 지나가듯, 자연스레 운을 띄웠다.
“아씨께서 혹 왼손잡이신가요?”
“아뇨. 어릴 적부터 오른손을 쓰셨습니다만.”
“···그렇군요.”
어째 술사의 기분이 저조해진 것 같다. 근거라곤 하나 없지만, 그냥. 그런 감이 불현듯 아무개를 스치었다.
자리가 파하고 유모를 배웅한 후. 술사는 아무개를 향해 돌아섰다.
“임시지만 일행이니 여쭤볼게요. 저는 지금 바로 의원에 갈 생각이에요. 함께 가시겠어요, 예서 쉬실···.”
“갈래!”
“······.”
“······같이.”
별다른 고민 없이. 술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답이 튀어나왔다. 아무개는 예기치 않게 불쑥 나와 버린 본심에 당황한 나머지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그런 중에도 ‘같이’ 가겠다는 의사는 분명히 했다.
그리하여 둘은 나란히 의원으로 향했다. 낮은 담장과 이어진 대문으로 약재 특유의 쌉싸래한 내음이 길목 어귀까지 물씬 흘러나왔다.
“계십니까.”
술사가 소리 높였으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잠시 기다리던 술사는 이내 활짝 열린 문 너머로 걸음을 디뎠다.
너른 마당에는 환자가 한 명도 없었다. 초행임에도 술사는 망설임 없이 나아갔다. 한 걸음 두 걸음 더 깊이 들어갈수록 약재 향이 짙어졌다.
술사를 따라 뒷마당에 당도한 아무개는 새파랗게 젊은 의원을 찾아냈다. 툇마루에 걸터앉은 의원은 무어에 그리 골몰한 건지 객이 온 줄도 몰랐다.
“···! 언제 오셨습니까?!”
뒤늦게 낯선 면면을 발견한 양 의원이 소스라쳐 일어났다.
“진료를 받으시려거든 다른 의원을 찾으십시오. 이곳은 환자를 받기 어렵습니다.”
“괜찮습니다. 저희는 환자가 아니거든요.”
“환자도 아닌데 어인 일로 ······.”
의원의 시선이 삿갓에 이르렀다. 그의 낯에 설마, 하는 기색이 어렸다.
“······유랑술사?”
정답이라는 듯 술사가 해사하게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