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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혼설 (4)화 (4/138)

4화

“그··· 래도 돼?”

반사적으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제자리에 붙들어 매느라 아무개는 한껏 인상을 썼다. 안 그래도 음침한 남자가 표정까지 험악해졌는데도 마주한 술사의 입가엔 변함없이 은은한 미소가 감돌았다.

“물론이죠. 제가 도중에 끼어든 바람에 곤란해지셨잖아요?”

의문이 하나 해소되었다. 술사가 차례를 넘기고 제 의견을 물은 건, 먼저 와서 기다린 이를 위한 배려였다.

새치기했다고 느껴서? 하지만 함 장군이 애타게 기다린 손은 유랑술사다. 불청객인 아무개의 기다림은 중요치 않았다. 함 장군은 언제 어느 때라도 술사를 우선했을 테니.

“나는··· 좋아. 할래, 일행.”

장군 댁에서 소환부를 구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적에는 어쩌면, 멀리서 옷깃이라도 볼 수 있을까 내심 기대했건만. 어쩌다 보니 임시로나마 일행이 되었다.

믿을 수 없는 기적이다. 그간의 불운은 오늘 하루를 위한 대가였던가 싶을 만큼.

“그럼 한방을 쓰는 게 자연스럽겠죠? 일행이니까요.”

“그··· 그렇지? ······일행이니까···.”

일행이잖아. 동성의 일행이 한방을 쓰는 건 당연하지. 암, 그렇고말고.

누가 흉을 본 것도 아닌데 제 발 저린 양 괜스레 합리화하며 아무개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가슴에 훈풍이 불어온 듯 싱숭생숭하여 몸을 가만두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품에 안은 길고 가느다란 짐을 한층 더 끌어안았다.

술사가 한방을 쓰겠다 하자 객주는 위층 객실로 안내했다. 탁, 등 뒤로 문이 닫히고 술사와 단둘이 남게 되었다.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아무개는 술사의 존재가 너무너무너무 의식되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안절부절못했다. 객실 내에 흐르는 고요한 기류마저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뭔가 소일거리라도 있으면 덜 어색할 듯한데.

마침 혈흔이 묻은 옷소매가 보였다. 부인이 쓰러지고 정신없는 와중에도 행랑아범은 용케 새 옷을 구해다 줬다. 아직 갈아입지는 못했지만.

아무개는 구석에 앉아 새 옷을 가지런히 접었다. 온 신경이 술사에게 쏠린 터라 행동이 굼떴다. 옷감에 은은한 윤기가 흐르고 손끝에 닿는 감촉이 보드라워 무심코 만지작거리니 술사가 물어 왔다.

“갈아입으려고요?”

아무개가 어어? 하고 되묻자 술사가 재차 말했다.

“지금 환복하려면 잠시 비켜드릴게요.”

“···어? 아니, 굳이··· 번거롭게 그럴 필요는······.”

“괜찮아요. 어차피 따로 볼일도 있어서요.”

그는 아무개가 본격적으로 만류해 보기도 전에 긴 다리로 성큼성큼 나가 버렸다. 드르륵, 탁. 닫힌 문을 멍하니 보던 아무개는 보들보들한 새 옷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지금이라도 따라갈까. 그건 좀··· 이상하게 보이려나.

아무개가 죄 없는 새 옷을 한창 노려보던 때였다. 도로 문이 열리더니 술사가 고개를 내밀었다. 아무개는 기겁하며 바닥에 내던진 옷을 헐레벌떡 주워들었다. 허둥지둥하는 꼴을 보며 이런, 실례했네요, 하고 짧게 사과한 그가 이어 질문했다.

“혹시 죽 괜찮으세요?”

죽? 낟알이 흐물흐물해질 때까지 푹 끓여 만드는 그거?

뭐든 상관없다. 아무개가 목이 떨어져라 고개를 끄덕이자 술사가 웃으며 나갔다. 도로 닫힌 문에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왕 이리된 김에 옷을 갈아입어야 나중에 술사님이 이상하게 여기지 않겠지.

꾸물꾸물 환복을 마치고 얼마나 지났을까. 밖에서 가볍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상대를 짐작한 아무개는 곧장 문을 열었다. 역시나 술사가 서 있었다.

“식사 준비가 끝났다네요. 같이 가시겠어요?”

으응, 하고 작게 동의하자 술사가 앞장서서 나아갔다. 아무개는 객실 문을 걸어 닫고 그의 뒤를 따랐다.

식사는 사방의 풍경이 훤히 보이는 3층에 마련되어 있었다.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진수성찬을 차려놓으니 다른 손님이 힐끔댔다. 한바탕 잔치를 벌여도 모자랄 상차림에 고작 둘이 앉으니 그럴 법도 했다.

함 장군 댁에서 모셔 온 손님이라 객주가 힘을 쓸 모양인데, 사정을 모르면 겉멋만 든 철부지 도련님 나들이로 보일 것 같았다.

그런데 아직 끝이 아니었나 보다. 행주치마를 입은 여인이 쟁반을 들고 다가왔다. 수저 놓을 자리도 부족해 뵈는데 뭘 또 가져오는 걸까.

“말씀하신 죽 가져왔습니다. 어느 쪽에 놔드릴까요?”

“저쪽으로 부탁드려요.”

여인의 물음에 술사가 자신을 가리켰다. 아무개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들을 번갈아 보았다. 죽그릇이 제 앞에 놓인 후에도 영문을 몰라 멀뚱멀뚱하자 술사가 검지로 입꼬리를 톡, 가볍게 두드렸다.

“상처 났잖아요. 입을 크게 벌리지 않고 먹기 편한 음식이 좋을 것 같아서요.”

괜한 오지랖이니 개의치 말고 원하는 것 편히 드시라는 당부까지 더한 후. 술사는 찻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그의 시선이 난간 너머 바깥을 향하고서야 아무개는 저도 모르는 사이 멈췄던 숨을 겨우 내쉴 수 있었다.

숙수가 공을 들인 듯 잘게 다진 채소가 점점이 박힌 죽은 상당히 먹음직스러웠다. 다른 찬이 워낙 화려한 탓에 비교적 소박해 뵈는 건 어쩔 수 없다만, 아무개는 여타 수륙 진미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널따란 상에 오직 죽그릇 하나뿐인 듯 수저를 놀렸다.

상처가 벌어지지 않게 살며시 입을 벌리고 죽을 머금자 입안에서 묽은 쌀알이 씹혔다. 천천히 삼키자 속이 따뜻해졌다. 아무개가 죽그릇을 반쯤 비울 무렵, 술사가 입을 열었다.

“임시 동행님께 여쭤볼 게 있는데요.”

손등으로 너울을 한 겹 들춘 유랑술사가 눈짓으로 우측을 가리켰다.

“혹시 저 사람들. 아는 사이인가요?”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아무개는 자신을 찌를 듯이 노려보는 일련의 무리를 목도했다. 용모 단정하고 의관 정제한 것이 귀한 집 자제들인 듯싶었다.

그들은 각각 무구를 소지했는데 부적이 덕지덕지 붙은 검이라던가 옛 글자가 알알이 새겨진 염주 등, 예사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어깨에 붙인 문양이었다.

“불붙은 귀면··· 가온 염씨?”

“다섯 손가락 모양의 기암은 강암 석씨죠. 소용돌이는 운해 하씨. 주단 금씨에 화양 율씨까지. 오대세가 전부 모였네요.”

아무개도 오대세가는 알았다. 수 세기에 걸쳐 국운이 쇠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릴 때도 버텨 낸 유서 깊은 술사 가문들이었으니.

그러고 보니 자신에게 물을 쏟은 아낙이 그랬더랬다. 장군 댁 애기씨께 붙은 악령을 떼려고 이름난 술사 가문들을 죄다 불렀는데도 소용이 없었다고.

“아직··· 안 돌아갔나 봐.”

아무개는 아낙에게 들은 이야기를 띄엄띄엄 전해주었다. 아마 저들은 유랑술사가 당도하기 전, 함 장군 댁을 방문하였으나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한 술사들일 거라고.

“어찌하여 저리 무섭게 노려보는 걸까요.”

“······그러게?”

체할 것처럼 부리부리한 눈총을 쏴 대던 그들이 수저를 상 위에 탁! 소리 나게 놓았다. 당장이라도 몰려와 한바탕할 것 같은 분위기에 아무개는 팔짱을 단단히 꼈다.

그들은 옷자락을 떨치며 일어나더니 보란 듯 고개 돌리고 침 뱉는 시늉을 했다. 거슬린답시고 갖은 티를 내면서. 막상 접근은 않고 그대로 나가기에 아무개는 슬그머니 팔짱을 풀었다.

안심하기는 일렀다. 저들의 행동 양상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잠시 후퇴할 뿐, 조만간 필시 부딪치리라는 걸.

······왜 초면에 대뜸 시비람.

세가 술사들이 우르르 나가고 심부름꾼이 왔다. 그는 곧장 유랑술사에게 다가와 아는 체했다.

“식사 도중 죄송합니다만, 찾으시던 분이 지금 오셨습니다.”

유랑술사는 으음, 하고 낮게 목울음을 흘렸다.

“혹시 말이 잘못 전달됐나요? 저는 당장 만나자고 말씀드린 적 없는데요.”

“아뇨, 손님 의사는 정확히 전달해드렸습니다. 한데 상대분께서 서두르셔서요.”

무슨 영문인지 어리둥절한 아무개를 흘깃한 술사가 심부름꾼에게 말했다.

“일행이 있어서.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심부름꾼이 물러가고 술사가 아무개 쪽으로 몸을 틀었다.

“아까 볼일이 있다 했었죠? 그거예요.”

함 장군 댁 애기씨를 어릴 적부터 돌본 유모가 있다는 소식에 술사는 직접 만나 보기로 했다. 어차피 장군과 약조한 시간은 해가 진 밤이었으니 가만히 시간을 죽이기보단 뭐라도 해 보는 게 나으니 말이다.

술사는 객관의 심부름꾼을 불러 유모에게 뵙길 청했다. 한데 이야길 들은 유모가 직접 와 버렸다.

“제 쪽에서 찾아뵙겠다고 말씀드렸는데. 이리 오셨네요.”

어쩔까요?

“기다리라 할까요, 지금 뵐까요?”

“······그걸 왜··· 나한테···?”

“일행이잖아요?”

뭔가··· 예상외로 일행이라는 지위가 대단한 것 같았다. 이런 선택권이 주어지다니.

“만약에··· 내가 없었다면······ 술사님은, 어떻게 했을 거야?”

“저 혼자라면 바로 모셔왔을 것 같네요. 연세가 많으시거든요.”

물론 저보다는 어리겠지만.

하고. 이백여 년 전부터 활동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대귀인 유랑술사가 생긋 웃으며 덧붙였다.

“······그러엄··· 나도 지금 만날래···.”

주름 하나 없는 한창때의 얼굴이 어지간한 노인보다 한참 연상이라니. 좀 사기 같다고 생각하며 아무개는 일행의 권리를 사용했다.

확답을 받은 심부름꾼이 아래층으로 내려간 사이. 아무개는 입술을 우물우물했다.

“술사님은······ 애기씨한테 정말로··· 악령이 붙었다고, 생각···해?”

악령이 없다면 이 모든 게 헛수고에 불과하니.

“글쎄요. 제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저라고 전지전능한 위인은 아니니까요?”

술사는 태연히 한계를 인정했으나, 아무개는 내심 반박했다.

당신이 보지 못한다면, 이 세상 누구도 볼 수 없을 텐데. 그리 대단한 악령이 존재할 리 없거니와, 만에 하나 그 대단하신 악령이 붙었다면··· 차라리 없는 셈 치는 편이 위안이 될 터였다.

유랑술사가 해결할 수 없는 일은, 그 어떤 술사도 불가할 테니.

“······혹시 봤어? 그 댁 아씨 손.”

“왼손에 상처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네. 봤어요.”

역시 봤구나.

“실은 나··· 밤에, 그 저택 앞에서 기다리다가······.”

아무개는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더듬더듬 설명했다. 해가 지자마자 봇물 터지듯 쏟아져나오던 노비들. 문밖에서 걸어 잠그던 빗장. 늦은 밤 의원을 부르짖으며 저주하던 소녀의 음성까지.

스스로도 정리가 안 되어 순서가 뒤섞이고 중구난방이라 답답했건만, 술사는 재촉하지 않았다. 말을 끝마칠 때까지 묵묵히 들어주던 그는 아무개의 횡설수설을 간단히 정리했다.

“아씨의 상처가 문을 두드리다 생겼을 거라는 뜻이죠?”

아무개는 고개를 끄덕였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은 술사가 나긋하게 되짚었다.

“낮과 밤이 뒤바뀌고, 저주하고, 폭력을 동반한 괴벽을 부리고. 악령이라 여겨지는 행위네요.”

다시금 차로 목을 축이며 술사가 낮게 읊조렸다.

“그 의원님이란 분. 찾아봐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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