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하나하나 개별 포장한 샌드위치를 쇼핑백에 가득 담아 준 여사님이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이거는 가지고 있다가 뭐 먹고 싶을 때 꺼내 써요. 다른 건 몰라도 배고픈 게 제일 서러운 법이야. 괜히 돈 아낀다고 굶지 말고.”
봉투에 든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지 않아도 알 듯했다.
“괜찮아요, 여사님. 저 돈 있어요. 진짜로요.”
“누가 해민 씨 돈 없대? 용돈 주는 거야. 원래 여행 갈 때는 맛난 거 사 먹으라고 용돈 주는 법이거든. 할머니가 주는 용돈이라고 생각해. 용돈 줄 자식도 손주도 없는 노인네 불쌍하게 여기고 받아 둬요.”
거절하는 게 오히려 더 죄스러운 마음이 드는 말에 어쩔 수 없이 감사하다고 인사하며 봉투를 가방에 잘 챙겨 넣었다.
“갈 거면 점심이라도 먹고 가지. 곧 점심시간이잖아.”
“점심 먹으면 금방 저녁 먹을 시간이고, 저녁 먹으면 잘 시간이고. 한도 없이 늘어질 것 같아서요. 떠날 사람은 빨리 나서야죠.”
“떠날 사람이라니. 듣기만 해도 서운하네.”
진심으로 서운해하는 여사님의 표정에 고개를 떨궜다. 이럴까 봐 빨리 나가려고 했는데, 이환이 눈치도 없이 안 내려오는 탓에 미련이 커지고 있었다. 내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가는 사람의 인사 정도는 받아 주지.
어색하게 자리를 지키며 앉아 있는데 계단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씻고 내려온다면서 오래도 걸렸다. 여사님과 함께 거실로 나오자, 외출을 하려는지 가벼운 외출복 차림의 이환이 보였다.
“……실장님.”
“오래 기다렸습니까.”
“아뇨. 여사님이 가면서 먹으라고 샌드위치 싸 주셨어요.”
“맛있겠네요.”
생긋 웃으며 말하는 이환의 얼굴이 헤어짐을 앞둔 사람이라고 보기엔 묘하게 상기되어 보였다.
“어디…… 나가세요?”
“아. 네.”
“외출하시는구나.”
“네. 해민 씨랑 같이 가려고요.”
“…….”
이해가 되지 않는 말에 네? 라는 질문도 하지 못했다. 눈을 끔뻑거리고 있자 그가 끌고 온 캐리어를 시위하듯 앞에 떡하니 내려놓았다.
“해민 씨 따라갈 겁니다.”
“……누가요?”
“나요.”
“실장님이…… 저를 따라오신다고요?”
“네.”
“제가 어디 가는 줄 알고요?”
“어디든 갑니다.”
아니, 그렇게 해맑게 할 이야기냐고.
“우리 그런 이야기 한 적 없잖아요.”
“수습해야 할 일이 많았습니다. 회사 쪽으로도 이야기를 해 둬야 했고, 징징거리는 백윤경 입에도 사탕을 물려 놔야 했고. 해민 씨가 당장 삼 일 뒤에 나가겠다고 하는 바람에 시간이 빠듯했습니다.”
그래도 시간 맞춰 준비가 끝나서 다행이라며 이환이 자랑스럽게 가슴을 내밀었다.
어디가 자랑스러워할 포인트인데?
“실장님은…… 지금 회사가 아니더라도요. SG 후계자 준비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정 부회장님 자리도 비어 있는데. 그쪽으로 출근하셔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거야 뭐, 내가 급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어차피 아버지가 금방 돌아가실 것도 아니고, 이정 말고 다른 자식이 없는 것도 아닌데. 당장 후계자를 지정하지 않아도 SG가 어떻게 되지는 않습니다. 만에 하나 당장 급하다고 해도, 아쉬운 사람이 알아서 하겠죠.”
본인이 신경 쓸 일이 아니라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는 이환을 보며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저는 혼자서 세상을 보고 싶어요. 누구 울타리 안에서가 아니라.”
“같이 봅시다, 세상.”
“그러니까 제 말은 홀로서기를…….”
“홀로 말고 같이 서요. 해민 씨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겠다고 따라나서는 거 아닙니다. 같은 길을 걷고, 같은 풍경을 보고,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이 고생할 겁니다. 오히려 맨몸으로 나가면 해민 씨가 나를 책임져야 할 수도 있어요. 나 재벌 2세입니다. 언제 고생이나 해 봤을까.”
“그런 분이 저를 따라가겠다고요?”
“네.”
어쩐지. 일을 그만두고 떠나겠다는 내 말에 그리하라며 선뜻 놓아준다 했다. 붙잡는 시늉도 하지 않고 너무나 깔끔한 승낙에 오히려 떠나겠다고 말한 내가 더 서운할 정도였었다. 그런데, 잠시 생각을 정리하겠다고 했지만 그 생각 정리가 함께 떠나기 위한 신변 정리일 줄이야.
“저 고생시키려고요?”
“그래도 내가 힘쓰는 건 잘합니다. 알잖아요.”
“알긴 알지만. 아무튼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노려보듯 눈에 힘을 주고 이환을 쳐다보고 있는데,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여사님이 은근히 내 어깨를 이환 쪽으로 밀었다.
“여사님도 알고 계셨어요?”
“아휴, 나는 몰랐지. 절대 몰랐어.”
알고 계셨구나.
쌍으로 나에게만 숨기고 계획을 꾸미고 계셨구나.
배신당한 기분을 감추지 못하고 여사님과 이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데리고 가서 세상 구경 좀 시켜 줘요. 도련님으로 자라서 세상을 모른다니까. 해민 씨가 매운맛 좀 보여 줘요.”
“그렇게 말씀을 하셔도…….”
데려가서 고생 좀 시키라고 말씀을 하시지만, 자세히 들어 보면 결국 이환의 편을 들어 주는 말이었다.
경계 가득한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다 끝내 잔뜩 힘주고 있던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실장님은 정말…… 언제나 제 예상을 뛰어넘으시네요.”
“내가 또 예측 불가능한 기쁨을 주는 사람이죠.”
그게 기쁨인지는 모르겠으나 예측 불가능하다는 점은 확실했다.
“짐은 언제 싸신 거예요?”
“시간 날 때 짬짬이.”
“진짜 처음부터 계획적이셨네요.”
“해민 씨가 집을 나가겠다는데 잘 가라고 손 흔들어 줄 줄 알았습니까? 그게 더 실망인데.”
“너무 선뜻 나가라고 하셔서 조금 서운하기는 했어요.”
“서운했습니까?”
“……네.”
서운했었다. 조금은 아쉬워하는 얼굴을 보고 싶었다. 어쩌면 붙잡아 주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돌아서면 남이 되는 관계였음을 깨닫고 새삼스럽게 충격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나를 따라가겠다며 짐을 싸 들고 내려온 이환이 조금은 기꺼웠다. 난처하고 곤란하면서도 반가웠다. 이번에는 홀로 서겠다고, 훌훌 털고 자유롭게 돌아다니겠다고 마음을 먹었으면서도. 마주한 이환과 여전히 이어져 있다는 생각에 안도감을 느꼈다.
단번에 끊어 내지 못하고 망설이게 된다. 고민하고, 주저하고, 미련이 넘친다. 그러다 나를 오롯이 담아내는 까만 눈동자를 마주하면 결국 내민 손을 붙잡을 수밖에 없다.
“진짜로…… 저랑 같이 가실 거예요? 저 붙잡으려고 하는 소리가 아니고?”
“네.”
“제가 이곳으로 다시 안 돌아온다고 해도?”
“그럼 더 따라가야죠.”
“실장님 회사는…….”
“다른 무엇보다 해민 씨가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요즘 세상에 꼭 회사 출근해서 일해야 하는 법도 없잖아요. 휴대폰만 있어도 업무는 충분히 봅니다.”
그건 좀 감동이 사그라드는 발언인데. 그래도 무턱대고 너 하나만 있으면 된다는 말보다 현실적이었다.
“그럼 약속해 주세요.”
“약속합니다.”
“듣고 나서요.”
듣지도 않고 약속하겠다는 공수표부터 날린다. 믿음직스럽지 못한 대답에 눈을 흘기며 말을 이었다.
“카드 막 긁으시면 안 돼요.”
“자제하겠습니다. 아니, 아예 해민 씨한테 맡겨 둘게요.”
“돌아다니다 보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 수도 있는데. 실장님한테 일해서 돈 벌어 오라는 말은 안 하겠지만, 대신 실장님 하루 생활비는 만 원이에요.”
“차라리 하루 벌어서 먹고살라고 해요. 하루 일당이 얼만지는 모르겠지만 만 원보다는 많을 겁니다.”
뭐든 오케이 할 줄 알았던 이환이 강력하게 반대를 했다.
“숙박비 제외하고 이만 원.”
“오만 원 합시다.”
“삼만 원.”
“흥정하는 솜씨가 능숙하시네. 그래요, 삼만 원.”
“음식 투정하지 않고 먹겠다고도 약속하세요.”
“……그러겠습니다.”
“삼시 세끼 챙겨 먹겠다는 약속도 받아. 안 그러면 배 안 고프다고 아예 안 먹어 버리니까.”
옆에서 흥미진진한 눈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여사님이 기회를 틈타 내게 속삭였다. 사심이 짙게 묻어나는 조언이었다.
“삼시 세끼 챙겨……, 아니, 지금 제가 뭐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아…….”
뭔가 할 말이 많은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자리에 주저앉아 고개를 푹 숙이자, 머리 위에서 여사님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해민 씨 힘 빠졌나 보네. 좀 쉬었다가 점심 먹고 갈래요?”
“지금 갈 거예요. 반드시, 기필코.”
각오를 다지는 내 말에 이환이 나를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오해하지 말고 걱정하지도 말아요. 해민 씨 막을 생각 없습니다. 나는 말했듯이, 해민 씨 옆에서 걸을 거예요. 누가 누구를 책임지는 것 없이.”
“실장님이 옆에 있으면 의지하고 싶어질 거예요.”
“사람은 언제나 혼자일 수 없어요. 의지하고 싶어질 때는 의지해요. 그러다 또 혼자 힘으로 걷고 싶어지면 혼자 걷고, 힘들 때는 서로에게 기대기도 하고.”
“그래도…… 돼요?”
“네. 그래도 됩니다. 그러라고 내가 옆에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 손을 잡아요. 손잡고 같이 걸어갑시다.
웃음기 머금은 눈을 휘며 이환이 손을 내밀었다.
조금은 짜증 나고, 또 조금은 울컥하고. 왜인지 웃음이 나오는데 울고 싶기도 하고. 저 자신만만한 얼굴을 두고 돌아서고 싶으면서도 끌어안고 싶기도 하고. 이 기분은 대체 뭘까.
배 속이 술렁거렸다. 간질간질 피어오르는 따스함이 가슴에 번졌다.
언제나처럼 온기가 묻어나는 눈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이환의 손을 붙잡았다. 꽉 힘이 들어가는 손아귀가 마치 원래부터 하나였던 듯이 맞붙었다.
이어진 것만으로도 의지가 되는 손을 붙잡고 우리는 걸음을 내디뎌 세상 밖으로 나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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