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월급 주시는 날이 삼 일 뒤더라고요.”
젖은 머리를 닦으며 욕실을 나오던 이환이 내 말에 고개를 들었다.
“다음 달 월급은 주지 마세요.”
일을 하기도 전에 선금으로 월급을 받고 있었기에 말해 두었다. 그 말의 의미를 알아차린 이환이 젖은 수건을 바닥에 던져 놓고 다가왔다.
“충분히…… 생각한 겁니까.”
엄마의 장례식 이후로 내가 계속 고민하고 생각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나 보다. 그러면서도 옆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고 조용히 기다려 주었나 보다.
“네.”
“이게 해민 씨 선택이고요?”
“네.”
“도피입니까?”
“아뇨.”
침대에 앉아 있는 내 앞에 무릎을 접어 앉아 올려다보는 남자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손끝이 축축이 젖어 들었다.
“완전히 혼자가 되었잖아요. 더 이상 무언가를 짊어지지 않아도 되는 나 혼자. 어딘가에 묶여 있지 않아도 되는 혼자. 슬픔도, 미련도, 만족감도 없을지언정 그동안 기다려 왔던 끝을 보았으니까……, 찾아보려고요. 다시 시작할 무언가를.”
“내 옆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겁니까?”
“지금까지 제 세상은 너무 작았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것도, 제가 해야 하는 것도 정해져 있었고요. 예전에, 실장님도 말씀하셨잖아요. 제가 많은 걸 경험해 봤으면 좋겠다고.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이 많아질수록 그 사람을 구성하는 세계가 넓어지니까. 내가 더 많은 것을 경험한 뒤에 더 넓은 세계에 서 있기를 바란다고.”
“그건, 내가 해민 씨 옆에 있으면서 제공해 줄 수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저는 실장님에게 걸음마부터 배우고 싶지 않아요. 가만히 앉아 입만 벌리고 실장님이 물어다 주는 먹이만 받아먹고 싶지 않아요. 실장님이 저를 좋아해서 보호해 주고 싶어 하는 마음을 알지만, 그렇다고 실장님에게 모든 걸 의지하고 싶지 않아요.”
오롯이 혼자가 된 순간이었다. 지금이 아니라면 홀로 서고 홀로 나아갈 기회가 언제 다시 올지 모른다. 아니, 나는 언제나 혼자겠지만 한 걸음 내디딜 용기가 언제까지 존재하리라 장담하기가 어려웠다.
“내가 싫어서 도망가는 건 아니고요?”
“실장님은 제 첫사랑이었고, 첫 사람이었고, 첫 남자였어요.”
“‘처음’ 말고 ‘유일한’으로 합시다. 과거형도 좀 거슬리네요.”
“네. 실장님은 제게 유일한 사람이에요.”
유일하게 나를 좋아해 준 사람. 나를 사랑해 준 사람. 아낌없이 나에게 베풀어 주었던 사람. 나를 보호해 준 사람. 그리고 내가 온 마음으로 좋아한 사람. 모든 것에서 내게 유일한 사람.
그래서 이환의 곁에 머무르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엄마가 내 발목을 붙잡는 족쇄였듯이, 내가 이환의 족쇄가 되고 싶지 않았다. 홀로 설 수 없는 내가 이환의 곁에 있다면, 지금은 아니라고 해도 언젠가는 번거로운 족쇄가 될 것이다. 나는 이환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내 허리를 바짝 끌어안은 이환이 허벅지 위에 얼굴을 기댔다.
“그래도 떠난다는 마음은 변함없고요.”
“네.”
“해민 씨가 이곳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다른 곳에 가지 못하게, 다른 사람을 보지 못하게, 다른 생각은 떠올리지 못하게 가둬 두고. 나만 보게 하고, 나만 생각하게 하고, 오롯이 나를 위해서만 존재하게 하고 싶어요.”
“안 그러실 거 알아요.”
“그러지 않는 게 아니라, 그러지 못하는 겁니다. 나는 결국 해민 씨를 이기지 못할 테니까.”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니라요. 실장님은 다정한 사람이니까요.”
된다 안 된다를 말하지 않아도 이환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잘 알고 있으리라. 그리고 언제나처럼 나를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할 것이다. 내가 보아 온 이환은 누구보다 현명하고, 생각이 깊고, 따뜻하고, 배려 깊은 사람이었으니까.
나는 대답 대신 이환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쓸어 주었다.
“저는…… 달라지고 싶어요. 엄마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힘겨웠던 과거가 아니라 어떤 것을 경험하게 될지 모를 내일을 보며 살고 싶어요.”
“해민 씨를 생각한다면 보내 줘야겠죠. 알겠습니다.”
애원하며 매달리지는 않아도 한 번쯤은 붙잡으리라 생각했는데. 이환은 차분하게 내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붙잡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도 했었는데, 그런 고민이 무색해져 버렸다.
뻘쭘해지는 건 기분 탓일까.
“외출하고 많이 걸었으니 일찍 자도록 해요.”
“……실장님은요?”
“나는 생각 좀 하다 자겠습니다. 걱정하지 말고 눈 붙여요.”
안고 있던 허리를 놓아주고 이환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동안 한없이 가까워졌던 거리가 훌쩍 멀어진 기분이다. 어색하게 올려다보는 나를 향해 걱정하지 말라는 듯 미소 지은 이환이 침실을 나갔다.
∞ ∞ ∞
여사님에게는 일을 그만두겠다고 명확히 말하지 않았으나, 이환이 따로 말을 해 두었는지 가끔 먹먹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시곤 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벙긋거리다 말고 돌아서는 여사님을 볼 때마다 죄책감이 들었다.
그동안 일을 그만두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은 적이 수십 번인데. 너무 좋았던 사람들인 탓에 떠나려는 마음이 좋지 않았다. 내 입으로 그만두겠다 말을 했음에도 미련이 남았다. 이대로 이곳을 나서는 순간, 유일하게 내게 호의적이었던 사람들과 헤어지게 된다는 사실이 마음 아프게 다가왔다.
그럼에도 나는 짐 가방을 쌌다.
이환이 내게 주었던 팔찌, 목걸이, 반지, 요정님 날개 같은 귀금속을 그대로 두고. 부잣집 도련님처럼 보이게 하던 값비싼 의복도 그대로 두고. 한 번 정리하여 버린 탓에 몇 벌 남지 않은 원래 내 옷가지와 속옷만 달랑 챙겨 가방 하나에 꾹꾹 밀어 넣었다.
움직이기에 편한 바지와 셔츠를 입고 얇은 긴팔 남방을 걸쳤다.
가방을 메고 일어나 침실을 둘러보았다. 길진 않았으나 이환과 함께 살을 비비고 지낸 침실이 어느새 익숙해져 있었다. 이환과 누웠던 저 침대도, 밥을 먹었던 식당도, 차를 마시던 거실도, 항상 눈에 담았던 정원도. 익숙해지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이 집이 마치 내 집처럼 느껴졌다.
이곳을 나서면 어디로 가야 할까.
오라는 곳도 없고 가야 할 곳도 없다. 그럼에도 나는 대문을 나서 걸음을 옮겨야 했다. 당장 이 집을 나가 어디로 갈지조차 생각하지 않았지만, 오늘 저녁 내가 어느 곳에서 잠들지조차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나는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는 나를 여사님이 가만히 서서 지켜보았다.
“가는 거예요?”
“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나는, 해민 씨가 다시 올 거라고 믿어요.”
“…….”
“좋은 거 많이 보고, 좋은 거 많이 먹고, 좋은 사람들 많이 만난 뒤에 다시 와요.”
“…….”
“그때는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가족으로 만나요. 나는 해민 씨가 그래 줄 거라고 믿어.”
다시 올 거냐고 묻는 것보다 더 무서운 믿음이었다. 역시 여사님이 제일 무서운 분이라니까.
조용히 웃는 나를 여사님이 두 팔 벌려 꽉 끌어안았다.
“어딜 가든 식사 잘 챙기고.”
“여사님도 건강하세요.”
두어 번 토닥토닥 등을 쓸어 주고 떨어진 여사님이 이 층을 올려다보며 투덜거렸다.
“도련님은 뭐 하느라 안 내려오신대.”
“서재에 계신 것 같던데요.”
아침을 먹고 서재에 틀어박힌 남자는 그 뒤로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비단 오늘만이 아니라, 내가 일을 그만두겠다고 말한 삼 일 전부터 이환은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식사는 꼬박꼬박 함께 했지만, 하루 회사에 나간 날만 제외하면 집에서는 대부분 서재에 틀어박혀 있었다.
얼굴 보기가 껄끄러운 걸까. 어쩌면 얼굴을 보는 것조차 싫어진 것일 수도 있다. 혹은 정을 떼려고 일부러 얼굴을 보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기분이 착잡했다.
가지 말라고, 생각을 바꾸라고 요구했다면 곤란했겠지만……. 그래도 끝난 관계라며 깔끔하게 손절 당하는 기분이 드는 지금의 상황은 조금 마음을 아리게 했다.
아니, 섭섭한 기분을 느끼는 것조차 이기적인 거지. 내 입으로 떠나겠다고 말을 해 놓고 붙잡지 않는다고, 미련을 보이지 않는다고 서운해한다면 내가 너무 쓰레기지.
그래도…… 가는 모습 정도는 봐 줘도 괜찮잖아.
“있어 봐요. 내가 올라가 볼 테니.”
내려와 보지 않는다고 그냥 가 버리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래도 인사는 하고 가야 할 듯싶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이 층에 올라갔다 내려온 여사님이 쯧쯧 하고 고개를 내저었다.
“조금만 기다려요. 씻고 옷 좀 갈아입고 내려오시겠대.”
그럼 조금만이 아닌데? 못해도 삼십 분은 기다려야 할 것 같은데?
깔끔한 이별을 상상했던 나는 역시나 상상과 현실은 다르다는 걸 깨달으며 짊어지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고 여사님과 함께 주방으로 들어갔다.
어디로 갈지 모르나 가다가 출출할 때 먹으라며 샌드위치를 만들어 주겠다는 여사님의 말에 손사래를 쳤지만, 그래도 그냥 보낼 수 없다고 고집을 부리시는 통에 하릴없이 주방 테이블에 얌전히 앉아 기다리게 되었다.
“돈은 있고?”
“월급 많이 주셨잖아요.”
“그거 다 어머니 병원비로 썼잖아. 얼마 전에 장례 치른다고 또 돈 나갔을 텐데.”
그동안 분에 넘치게 받아 병원비를 내고도 남은 월급을 알뜰살뜰 모아 뒀었다. 그렇게 모은 돈이 엄마 장례비로 들어가긴 했지만, 그래도 다행히 몇십만 원의 돈이 수중에 남았다.
“생각보다 많이 남았어요.”
덕분에 당장 오늘부터 노숙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양상추랑 계란 들어간 것부터 먹고, 잼 바른 것과 햄 치즈 들어간 건 오후에 먹어요. 해민 씨 먹는 양을 생각하면 안 남을 것 같지만.”
“저 평소에는 많이 안 먹어요. 그동안 여사님 음식 솜씨가 좋아서 많이 먹었던 거예요.”
“그래? 그럼 샌드위치도 금방 먹겠네.”
“그건…… 그러네요.”
여사님이 만들어 주신 건 샌드위치도 맛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