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튼 퓨리티-170화 (170/172)
  • 170화

    정신을 차리라는 의미로 마주하고 있던 이환의 이마를 내 이마로 콩 찧었다.

    “김밥 쌌어요.”

    “김밥?”

    “오늘 날씨 좋던데. 꽃구경 가요.”

    “…….”

    “며칠 더 지나면 벚꽃 다 질 거래요. 오늘이 아니면 안 돼요.”

    의미 전달이 지연된 로봇처럼 이환의 반응이 버벅거렸다.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그가 눈을 꽉 감았다가 떴다.

    “나 잠 깼습니까?”

    그걸 본인이 알지 내가 알까. 그런 질문을 했다는 것에서부터 잠이 덜 깬 증거였다.

    “지금 안 일어나시면 꽃구경 가기 싫다는 뜻으로 알 거예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환이 벌떡 몸을 일으켜 앉았다.

    “일어나자마자 김밥 안 넘어갈 거라고, 여사님이 죽 끓여 놓으신대요. 씻고 내려오세요.”

    “진짜네.”

    일어나려는 내 허리를 붙잡아 꽉 끌어안고 킁킁대며 냄새를 맡은 이환이 여전히 어리벙벙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 진짜로 꽃구경 가요.”

    “아니, 해민 씨가…….”

    무언가 말을 하려다 만 이환이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런 남자의 뺨을 붙잡아 쪽 입을 맞춰 주고 몸을 일으켰다.

    “먼저 내려가 있을게요.”

    완전히 정신이 깨어나는 데에 시간이 필요해 보이는 이환을 남겨 두고 침실을 나왔다.

    ∞ ∞ ∞

    평일 낮인데도 여의도에는 사람이 꽤 많았다. 서울 인구수가 많은 건 알지만 평일 낮에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사람이 이 정도로 많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환과 둘이 나왔다면 꽤나 고생을 했겠지만, 평범한 데이트도 재벌 2세가 대상이면 그 평범함에 딸려 오는 불가피한 불편함이 사라졌다.

    차가 줄줄이 늘어서 주차장에 들어가려고 대기하거나 주차 자리를 찾아 빙빙 돌 필요도 없이 운전기사에게 차를 맡기고 내린 우리는 챙겨 온 돗자리와 도시락을 경호원에게 맡겨 두고 천천히 벚꽃길을 걸었다.

    “벚꽃이 지기 전에 와서 다행이에요.”

    바람이 불 때마다 벚꽃잎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나뿐만 아니라 벚꽃길을 걷는 사람들 모두 감탄하는 얼굴이었다.

    “그러게요. 사람이 좀 많은 게 흠이지만.”

    “세상에 섞여 들어온 기분이라서 저는 좋은데요.”

    평범한 사람들처럼 한철 화려하게 피고 지는 꽃을 보겠다고 이곳까지 찾아와 구경하고 감탄하고 즐기는 이 순간, 나 역시도 평범한 사람이 된 기분이다. 무언가에 쫓기거나 말라비틀어지지 않고 멀쩡히 살아 있다고 확인받는 기분이었다.

    “해민 씨가 좋으면 나도 좋습니다. 꽃구경이야 매일 집에서 하고 있지만, 밖에 나와서 보니 더 예쁘네요.”

    “집에서요?”

    “옆에 있잖아요. 내가 매일 보는 꽃. 말도 하고 움직이기도 하는 꽃.”

    “…….”

    이런 개소리를 들을 때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현명하게 못 들은 척 걸음을 옮겼다.

    “부끄럽습니까?”

    “네.”

    이환의 발언이 부끄러웠다.

    남의 속도 모르고 킥킥거리며 웃은 이환이 “꽃님, 같이 갑시다.” 하고 말했다. 내가 꽃에 비견되어 부끄러운 게 아니라 이환의 개소리에 부끄러워한다는 사실을 그는 절대 모르겠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가 결국 손을 잡고 나란히 벚꽃길을 걸은 뒤에 공원으로 이동해 마음에 드는 벚나무 아래에 돗자리를 펴고 도시락을 꺼냈다.

    “이걸 해민 씨가 준비했습니까?”

    “네. 저번에 실장님이 싼 도시락 못 먹었잖아요. 미안하다는 의미로.”

    “그런 도시락은 안 먹어도 됩니다. 것보다 아침부터 김밥 싸느라 고생했겠네요.”

    무려 5단 도시락인데 그걸 먹을 기회가 없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나, 며칠 전부터 꽃구경 간다며 설레하던 사람의 마음을 짓밟기도 했고.

    그래서 벚꽃이 지기 전에 도시락을 싸 들고 여의도로 나왔다. 그날 이환이 입으라고 꺼내 놓았던 꼬까옷까지 입고.

    “엄청 맛있는데요.”

    김밥을 입에 넣으며 세상에 다시없을 김밥이라고 이환이 극찬을 했다. 특별한 재료를 넣은 것도 아니고 들어가야 할 것만 들어간 기본 김밥인데. 누가 보면 소고기나 장어라도 집어넣었다고 오해할 반응이었다.

    “그냥 김밥 맛인데요.”

    “그냥 김밥이 아닙니다. 해민 씨 정성이 들어가 있잖아요.”

    “아, 네.”

    할 말이 없어서 김밥만 꾸역꾸역 먹었다. 목마를 거라며 여사님이 챙겨 주신 구수한 보리차도 한 잔씩 나눠 마시니 배가 차며 몸이 늘어졌다. 입가심으로 과일을 집어 먹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나무에 눈송이처럼 매달린 꽃들이 보였다.

    “학교 다닐 때요. 매년 소풍 가잖아요.”

    “학교…… 다닐 때요. 네, 그렇죠.”

    너무 오래전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한지 이환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는 이런 기분 못 느꼈거든요. 소풍 간다고 애들이 좋아하니까 덩달아 들뜨긴 했지만, 막상 나오면 별로였어요. 재미도 없고, 친구도 없고, 도시락도 없고.”

    아버지가 없는 아이는, 엄마가 보살피지 않는 아이는,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아이는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표가 났다. 입고 있는 옷부터 목소리나 말투, 행동거지까지.

    아무리 순수한 나이라지만, 순수하기에 좋고 싫음이 더욱 명확한 나이이기도 했다. 자신감 없이 한껏 위축되어 청결하지 못한 의복에 흉터를 달고 다니는 아이와 어울리고 싶어 하는 아이들은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외톨이가 되었고 뒷말이 돌았다.

    쟤는 아빠가 없대. 엄마가 만날 술 먹고 때린대. 쟤네 집 엄청 가난하대.

    순수하기 때문에 악의 없는 칼날은 매서웠고, 순수하기 때문에 더욱 크게 상처 입었다.

    그때는 좋으면서도 싫었던 소풍인데.

    “사람들이 왜 소풍 나오는지 알 것 같아요.”

    한들한들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쭉 뻗은 발끝을 흔들었다.

    “매년 옵시다. 봄에는 꽃구경하고, 여름에는 바다 구경하고, 가을에는 단풍 구경, 겨울에는 눈 구경하러 가죠.”

    “계절마다 놀겠다고 하면 백 비서님이 기겁하실걸요. 일주일에 삼 일 출근하는 것도 잘 안 지킨다고 지금도 우는소리 하시잖아요.”

    “걔는 원래 우는소리가 생활화된 놈입니다. 그런 소리에 일일이 신경 쓸 필요 없어요.”

    백윤경이 들으면 기겁할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그게 진심인 듯 보여서 더욱 백윤경이 불쌍해졌다.

    “저는…… 오늘만으로도 충분해요. 하늘도 예쁘고, 꽃도 예쁘고, 잔디도 예쁘고, 한강도 예쁘고, 마주 앉은 실장님도 예쁘고.”

    “갑자기 칭찬이네요?”

    “오늘 이 순간이 저한테는 평생 추억할 거리가 될 거예요. 힘들어지는 때가 올 때마다 꺼내 볼 수 있는 기쁘고 즐겁고 예뻤던 순간이요.”

    “…….”

    “그래서 실장님한테 고마워요.”

    “해민 씨.”

    “실장님, 자전거 타실 수 있어요?”

    무언가 말을 하려는 이환을 막으며 물었다.

    “……네. 내가 또 못 하는 게 없습니다. 베스트 드라이버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요?”

    한 박자 늦게 입을 연 이환이 다소 쾌활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자전거 타고 싶습니까?”

    “전 자전거 못 타요.”

    “못 탑니까?”

    “배운 적이 없어서요.”

    “안 되겠네. 일어나요. 내가 자전거 타는 법 알려 주겠습니다.”

    “지금 배우기에는 무서운데.”

    “그럼 이 인용 자전거 탑시다. 대리 운전해 줄 테니까.”

    재벌 2세에게 대리 운전을 시키는 경험도 해 보게 생겼다.

    마침 자전거 타는 사람이 보여서 꺼낸 질문이었는데, 이환의 부추김에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경호원 한 명을 불러 자리를 지키게 하고, 자전거 대여소에서 이 인용 자전거 한 대를 빌렸다.

    “타요.”

    자전거 안장에 걸터앉아 시크하게 뒤를 턱짓하며 이환이 말했다. 그래 봤자 멋들어진 스포츠카나 회장님 스타일의 벤츠가 아니라 자전거라는 점은 달라지지 않았다.

    “페달은 안 돌려도 되는데, 기분 내고 싶으면 밟는 시늉 해도 되고.”

    왠지 자존심 상하는 말이었으나, 일단 나로 인해서 넘어지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얌전히 앉아 있기로 했다.

    “무서우면 허리 안아도 됩…….”

    출발하기 전에 뒤를 돌아보며 말하던 이환이 뒷자리의 손잡이를 꽉 쥐고 있는 나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왜 손잡이가 거기 붙어 있지? 둘이 타면 뒤에 앉은 사람이 앞 사람의 허리를 끌어안는 자세가 나와야 하지 않나. 어떻게 돼먹은 자전거지?

    이해할 수 없는 현실에 의아해하는 그의 속내가 훤히 보였다.

    “어서 출발하세요, 실장님.”

    키득거리며 이환의 허리를 손가락으로 꾹 찔렀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 자전거지만, 일단 출발하겠습니다.”

    살짝 기울어져 있던 자전거를 세우고 페달을 밟는다. 자전거의 바퀴가 굴러가며 부드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승차감 어때요.”

    한강을 배경으로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이환이 물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에 불어오는 바람으로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좀 불안하기는 한데, 그래도 좋아요.”

    “아니, 베스트 드라이버가 이렇게 안정적으로 운전을 해 주는데 불안합니까?”

    그의 말처럼 자전거는 작은 흔들림도 없이 쭉쭉 나아가고 있었다.

    “페달 밟고 있습니까?”

    “아뇨.”

    “요정님이 날로 먹고 계시네.”

    “저도 돌릴까요? 그런데 뒤에서 밟는다고 도움이 되긴 하는 거예요?”

    안 밟아도 자전거가 잘 움직이는데, 뒤에 달린 페달은 그냥 장식에 가깝지 않을까. 의구심을 느끼며 페달을 돌려 보았다. 딱히 달라짐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역시 기분 내기용이었나 보다.

    “실장님은 자전거 누구한테 배우셨어요?”

    “혼자 타면서 습득했습니다.”

    “혼자서요? 안 무서우셨어요?”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은 있었습니다. 운동 신경이 뛰어난 알파라고 해도 아이니까, 그것도 회장님 자식이니 혹시라도 다칠까 봐 주변 사람들이 더 덜덜 떨며 옆을 지켰죠.”

    왜인지 이환의 어린 시절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작게 웃음을 삼키며 고개를 돌려 한강을 바라보았다.

    “저는 자전거를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지켜봐 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무서워도 참고 배울 수 있었을 텐데. 뒤에서 붙잡아 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배웠을 텐데.”

    “앞으로 나아가지 못해도 됩니다. 내가 태우고 다니면 되니까. 그러다 스스로 나아가고 싶을 때 한 걸음 나아가 봐요. 무섭고 힘들면 주저앉아도 됩니다. 내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얼마가 걸리든 기다려 줄 수 있으니까.”

    이환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 그 역시 딱히 대답을 요구하지 않았다.

    우리는 조용히 흐르는 한강을 바라보며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