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나는 아니라도 내 자식은 욕심낼 수 있겠지. 네가 여전히 회사에 관심이 없다면 말이야.”
“글쎄요. 내가 아니더라도 어렵지 않겠습니까.”
“왜. 베타라서?”
“역량이 부족하다는 생각은 안 하시고?”
“베타라서, 여자라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가 아니라면 내 자식들이 너희와 다를 게 뭐 있다고. 오히려 너희 형제들보다 훨씬 멀쩡한 아이들이지.”
“그런데 어쩝니까. 하필이면 아버지가 보수적이고 엄청난 고집쟁이인 것을요.”
“하지만 네가 후계자 자리에 욕심이 없다면……, 그이도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것을 깨닫지 않겠니.”
사모님은 상냥한 얼굴로 웃으며 그렇지? 하고 물었다. 그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이환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첫째는 완전히 그이 눈 밖에 났어. 아무리 장남밖에 모르는 양반이라지만, 그 장남이 저를 찌르려 했는데도 감쌀 정도로 마음이 넓은 사람은 아니잖니. 너희 아버지라는 사람은.”
누가 누구를 찔러?
처음 듣는 이야기에 눈을 끔뻑거리며 사모님과 이환을 쳐다보았다.
“집에서 한 발자국도 못 나오게 막고 있어. 조만간 병원에 처넣겠다고 하더구나.”
“원래 자기 보신에 끔찍하신 분 아닙니까.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죠.”
“그러니 너만 확실하게 의사를 말해 주면 좋겠는데. 너도 SG에 출근하는 거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잖니.”
“아아, 그러니까. 김칫국 시원하게 드시면서 신나서 오신 모양입니다?”
재미없는 몸 개그를 눈앞에서 구경한 사람처럼 이환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쯧쯧 혀를 찼다.
“이십 년 넘게 노인네 옆에서 알랑방귀 뀌며 버텨 오신 분이 아직도 아버지를 모르시네. 이런 식으로 움직이는 걸 알면 오히려 괘씸죄로 무슨 패널티를 받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안 해 보셨고?”
“그래 봤자 죽이기를 할까 정신 병원에 처넣기를 할까. 호텔에서 내 자리를 뺀다고 해도 수희나 수영이가 SG 꼭대기에 앉으면 남는 장사 아닐까. 이 정도면 계산 못 한다는 소리는 안 들을 것 같은데.”
궁금한 것도 많고 묻고 싶은 것도 많지만 그걸 애써 참느라 움찔거리고 있는 내게로 사모님의 시선이 옮겨 왔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물 한 잔도 못 얻어 마셨네. 이렇게 손님맞이가 별로면 남이 욕해.”
“물…… 드릴까요?”
“그럴래요? 이래서 늙은 사람을 쓰면 안 된다니까. 눈치도 없고 일도 영 시원찮거든. 거기에 고용 기간이 길어지면 자기가 집주인이라도 된 것처럼 착각을 하더라고. 아무리 오래 버텼어도 하인은 하인일 뿐인데. 그걸 착각하는 사람들이 참 많아.”
아니, 이렇게 돌려서 깐다고요?
생각해 보면 여사님이 표나게 자리를 피했는데, 사모님이 그걸 못 알아차렸을 리가 없었다. 나름은 회장 사모님이신데 그걸 모른 척 넘기기엔 자존심이 상했을 수도 있고.
아무리 사모님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손님맞이가 부족했던 건 여사님의 실책이라 할 수 있었기에 편을 들어 줄 수 없었지만, 역시나 사모님의 말투도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냥 으음, 하고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나도 딱히 좋은 고용인은 못 되지.
“물 가져다드릴게요.”
“이왕이면 커피로 부탁해도 될까요.”
“네에. 원두커피로 드릴까요, 캡슐 커피로 드릴까요.”
“편한 쪽으로 줘요. 나 그렇게 까다로운 사람 아니야.”
예전이야 그렇게 보였지만 오늘은 엄청 까다로워 보이시는데.
“마침 커피가 다 떨어졌던데, 타이밍이 참. 물 가져다드리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는 이환을 붙잡아 앉혔다.
“커피 가져다드릴게요.”
“해민 씨는 이런 심부름 안 해도 됩니다. 내가…….”
“말씀 나누고 계세요.”
이환에게 시선으로 무언의 압박을 가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둘 사이에서 오고 갈 이야기가 궁금했지만, 점점 들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고. 정 내가 알아야 할 이야기라면 이환이 나중에라도 이야기해 주겠거니 싶어 자리를 비웠다.
정말 목이 말라서 커피를 요구한 건 아니실 테니 적당히 시간을 끌면 되려나.
그라인더에 원두를 넣고 세월아 네월아 천천히 손잡이를 돌려 갈았다. 이보다 더 곱게 갈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가루가 되어 버린 원두를 탬핑하여 머신에 넣고 물을 채웠다.
설마 사모님이 ‘얼죽아’는 아니시겠지.
따뜻하게 데운 컵에 추출되어 나오는 에스프레소를 멍하니 지켜보며 헛생각을 했다.
무슨 맛으로 마시는지 절대 이해하지 못할 에스프레소 두 잔을 쟁반에 올려 거실로 나가는데, 붉어진 얼굴로 쿵쿵거리며 걸어 나오는 사모님과 마주쳤다.
“커피 지금…….”
가지고 가는 길인데, 라는 말을 내뱉기도 전에 현관을 나가 버리는 사모님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뒤따라 나온 이환이 내 옆에 서서 쯧쯧 혀를 찼다.
“저 사람도 정상적인 성격은 못 되는 것 같습니다.”
비정상적인 성격을 유발케 한 게 아니고?
의심이 가는 시선으로 이환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기 싸움에 가까운 대화를 눈앞에서 목격한, 매우 근거 있는 의심이었다.
“커피 어쩌죠.”
“우리끼리 마십시다. 마침 두 잔만 가져왔네요.”
“네, 저는 에스프레소가 너무 써서요.”
“……”
“실장님은 드실 거죠?”
“라떼 만들어 주겠습니다.”
라떼라면 인정이지.
내 손에서 쟁반을 가져가 주방으로 들어가는 이환의 뒤를 쫓았다.
“사모님은 왜 가신 거예요? 화나신 듯 보였는데.”
“현실을 말해 줬을 뿐입니다. 다만,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사람들이 있어서 문제죠.”
내가 자리를 비운 뒤에도 기 싸움이 계속 이어졌던 모양이다. 대충 고개를 주억이며 스팀기로 우유를 데우는 이환을 바라보았다.
“친정 쪽 손을 빌려 몰래 주식을 모으고 있는 모양인데. 내 귀에 들어올 정도면 아버지도 알고 계시겠죠.”
단순한 기 싸움이 아니라 물밑에서 재벌가의 암투가 오갔었나. 보지 않았지만 치열했겠지. 치열했다고 생각하자. 기껏 말싸움에서 졌다고 화를 내고 가 버렸다기엔 사모님의 위신이 많이 떨어질 듯했다.
“실장님.”
“네, 해민 씨.”
컵을 비스듬히 들고 데운 우유로 능숙하게 하트를 만들며 이환이 가볍게 대꾸했다.
“아까 사모님이…… 찔렀다? 그런 말씀을 하시던데요. 누가 누구를 찔렀다는 거예요?”
“아, 이정이 아버지를 찔렀습니다.”
그게 그렇게 가볍게 할 이야기인가. 우유로 그리는 하트에 온 신경을 쏟아부으며 영혼 없이 대꾸할 이야기냐고.
혹시 바늘이나 볼펜으로 찔렀다거나.
“칼로 찔렀습니다.”
딱히 큰 기대는 하지 않았으나 역시 아니었던 모양이다. 내 생각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추가된 설명에 아, 하고 짧은 신음을 토해 냈다.
“해민 씨를 향한 내 마음입니다.”
“……잘 마시겠습니다.”
하얀색의 하트가 커다랗게 그려진 커피 잔을 건네주며 이환이 말했다. 짧게 감사합니다, 하고 컵에 입술을 댔다. 후루룩 라떼 한 모금과 함께 하트가 입 안으로 쑥 빨려 들어왔다. 이런 하트 하나하나에 감탄하고 감동하기엔 내 감수성이 메마른 상태였다.
“다음엔 하트 세 개에 도전해 볼까 합니다.”
“아, 네.”
하트가 세 개로 늘어난다고 하여 감동이 세 배가 되지는 않겠으나 힘내라며 가볍게 응원을 해 주었다.
“회장님은…… 많이 다치셨어요? 가 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생명에 지장은 없답니다. 손으로 칼을 잡아서 손이 좀 다치신 모양인데, 그런 일로 병문안을 가면 남들이 요란 떤다고 욕합니다.”
“아, 칼을 손으로…….”
“알파라서 그런지, 나이답지 않게 반사 신경이 살아 있었던 모양입니다.”
아니었다면 돌아가셨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개가 지나간다는 듯이 별일 아닌 것처럼 말했다.
찌르는 칼을 손으로 잡았다는 것도 놀랍고, 회장님이 크게 다치지 않으셨다니 다행이기도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아들이 아버지를 칼로 찔렀다는 것 아닐까.
“그런데 이정 부회장님이 왜…….”
그렇게 본인만 보고, 본인만 위하고, 본인만 감싸던 회장님을 이정이 왜 칼로 찔렀을까.
“아버지가 이쪽과 접촉하지 못하게 막으셨으니까요.”
“겨우 그런 이유로요?”
“원래 미친놈은 이해하기 어려운 법입니다. 굳이 이유를 찾고 이해하려고 하지 말아요.”
애초에 다른 세상에서 다른 생각으로 살아가는 놈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만큼 부질없는 일도 없다고, 그보다 커피를 마시는 것이 훨씬 더 생산적인 일이라며 이환이 에스프레소를 홀짝였다.
“회장님이 크게 다치지 않으셨다니 다행이네요.”
“그렇죠. 이번 일로 이정이 아버지의 눈 밖에 났으니, 그 여자가 신이 나서 달려올 만도 합니다.”
“후계자에서도 탈락된 거예요?”
“감히 본인에게 칼을 들이민 자식에게 회사를 넘겨줄 만큼 속 넓은 사람이 아니라서요. 남을 얼마나 찌르고 다니든 상관 안 할 양반이지만, 그게 본인 이야기가 되면 또 다르거든요. 이정이 정상인지 아닌지 보다 괘씸죄의 문제죠.”
그건 또 그것대로 정상처럼 들리지 않는 소리인데.
가끔 보면 회장님도 정상인과는 살짝 거리가 먼 듯이 느껴지곤 했다. 그런 스팩타클한 이야기를 무미건조하게 전달하고 있는 이환도…….
“해민 씨, 지금 시선이 살짝 불순합니다. 나쁜 생각 했습니까?”
“아, 아닌데요.”
“왜 말을 더듬지?”
“절대 아닌데요.”
“요정님이 거짓말해도 됩니까?”
“그러니까 거짓말 아닙니다.”
“역시, 요정님이 거짓말을 할 리 없죠?”
“네.”
오늘만큼은 요정님이 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