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튼 퓨리티-164화 (164/172)

16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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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기의 앞을 슬리퍼가 가로막는다. 슬쩍 방향을 바꿔 다른 쪽으로 밀자 길쭉한 다리가 벌어지며 내가 향하는 방향을 쫓는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리저리 방향만 바꾸자, 재미가 들렸는지 리듬까지 타면서 패널티 킥을 막으려 하는 골키퍼처럼 어느 방향으로 향할지 가늠하듯 몸을 이리저리 흔든다.

“실장님.”

결국 한숨을 내쉬며 잠시 청소기를 껐다.

“다 했습니까?”

“누가 봐도 다 한 게 아니라 다 못 한 거죠. 그렇게 가는 길마다 막아서면 청소기를 어떻게 밀어요.”

양심은 가지고 계시냐는 투로 말해 보았으나 딱히 반성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지 말고 외출합시다. 모처럼 쉬는 날인데.”

모처럼 쉬는 날이라고 말을 하려면 적어도 월화수목금 주5일은 회사에 나가시든가. 격일로 출근하면서 모처럼 쉬는 날이라고 말씀을 하시니 오히려 듣는 내가 더 양심이 아팠다.

“오늘은 이불 빨래할 거예요. 날이 좋아서.”

“날이 좋은데 왜 빨래를 합니까. 놀러 나가야지.”

“이제 겨울 이불 집어넣고 봄 이불 꺼내야죠. 두꺼운 이불 덮기에는 덥잖아요.”

“글쎄요.”

애초에 이불을 잘 덮지 않는 이환은 선뜻 공감하기 어려워했다.

“실장님은 옷도 안 입고 주무시잖아요. 그럼 이불이라도 잘 덮어야 하는데…….”

생각해 보면 잠옷도 안 챙겨 입고 자는 사람이 이불이라고 잘 챙겨 덮을까 싶고. 이불의 두껍고 얇음의 문제가 아닌가도 싶고.

“아무튼요. 배 내놓고 자면 탈 나요.”

“그럼 해민 씨가 ‘엄마 손은 약손’ 해 주면 되죠.”

“배탈 나면 병원에 가야지, 약손은 무슨.”

“민간요법이 미신과 연관되어 있기도 하지만, 의외로 의학적이기도 합니다. 손으로 배를 문지른다는 건 복부를 마찰시키며 열기를…….”

이때다 싶어 민간요법의 의학적 접근을 설명하는 이환을 피하여 청소기를 밀었다. 제 옆을 휭하니 스치고 지나가는 나를 보며 이환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벚꽃 구경 갑시다. 벚나무 아래에 돗자리 깔고 앉아서 치맥 어때요.”

“벚꽃은 아직 이르지 않아요? 적어도 한 주 정도는 더 있어야 할 것 같은데요.”

“부산이나 전주 쪽은 한창일 겁니다.”

“…….”

벚꽃을 보러 부산이나 전주까지 가야 해? 일주일만 더 기다리면 길바닥에 널리고 널린 게 벚꽃일 텐데?

침묵 속에 담긴 무수히 많은 말을 그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이 꽃구경 다녀왔다는 이야기만 들어 봤지 직접 가 본 적은 없거든요. 나도 해민 씨랑 꽃구경 가고 싶습니다.”

“안 가 보셨어요?”

“해민 씨는요?”

“저도 뭐. 그냥 오다가다 길에 핀 꽃만 봤지, 마음먹고 꽃구경을 하러 어딜 가거나 한 적은 없어요. 그보다는 실장님도 꽃구경을 해 본 적 없다는 게 더 놀랍네요.”

“그런 건 보통 가족이나 친구, 연인끼리 가는 거 아닙니까.”

가족은 꽃구경을 같이 갈 만큼 가깝지 않고, 연인은 있어 본 적이 없다고 했고, 친구는…….

“아, 실장님 친구 없으시지.”

“…….”

뒤늦은 깨달음에 이환이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보다는 무의미한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어차피 같이 갈 사람도 없었겠고만.

하지만 이 말은 굳이 내뱉지 않았다.

“다음 주에 가요.”

“다음 주요?”

“여의도에……, 매년 벚꽃축제 크게 하잖아요. 항상 이야기를 듣기만 해서 저도 언제 한번 가 보고 싶었어요. 돗자리 깔아 놓고 앉아서 싸 온 도시락도 먹고, 자장면도 시켜 먹고, 치맥도 하고.”

“음, 뭔가 먹는 게 주가 되는 느낌이지만……. 그래요, 피자랑 족발도 시켜요. 그날은 불량 식품 다 시켜도 됩니다.”

피자와 치킨이 몸에 좋은 음식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불량 식품까지는 아니지.

“그럼 다음 주에 꽃구경을 하러 가기 위해서라도 오늘 꼭 이불 빨래를 해야겠네요.”

그러니까 청소기부터 얼른 돌려야 한다며 잠시 이야기를 나누느라 멈추었던 청소기의 전원을 켰다.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이환이 주변에서 서성거렸다.

“아직도 청소기 가지고 씨름하고 있는 거야?”

언제 이 층으로 올라오셨는지 여사님이 어이구 하며 물었다.

“오신 김에 실장님 좀 모시고 내려가 주세요.”

누구라고 말은 안 하겠지만, 자꾸 청소기를 막는 탓에 청소가 끝나지 않고 있음을 넌지시 피력해 보았다.

“둘 다 내려가야겠어요. 손님 오셨어.”

청소기는 두고 일 층으로 내려가 보라며 여사님이 나와 이환에게 손짓했다.

오늘 안으로 이불 빨래는커녕 청소기나 제대로 돌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손님이요?”

“본가 사모님이 오셨네.”

여사님이 돌아가신 사모님의 친정에서부터 함께 오셨다고 했었나. 그런 여사님에게 현재의 사모님은 조금 껄끄러운 상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환이라면 그런 미묘한 기류를 생각해 독립하며 여사님을 모셔 왔던 것일 수도 있고.

사모님의 방문을 알리는 여사님은 딱히 반기는 기색도, 그렇다고 또 딱히 싫어하는 기색도 아니었다. 별다른 감정도 없고 감상도 없는, 물건을 팔러 온 방문 판매원이나 전도를 위해 찾아온 동네 교회의 신도를 대하는 느낌에 가까웠다.

아니, 어쩌면 이런 태도가 문제였을 수도 있다. 몇십 년을 함께해 온 여사님이지만, 냉정하게 말하면 여사님은 고용인이고 현재 사모님은 재혼 대상이라 하더라도 고용주 가족이니까.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개인의 호불호를 표 내서는 안 되는 입장이지.

“청소기는 내가 밀 테니까 내려가 봐요.”

약간 심드렁하게 느껴지는 태도로 내 손에서 청소기를 가져간 여사님이 내 등을 밀었다. 같이 내려갈 생각이 없어 보이는 여사님을 두고 이환과 함께 계단을 내려왔다.

거실 발코니 창 앞에 서서 정원을 내다보고 있던 손님이 인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았다.

분홍색 투피스 치마 정장에 한껏 힘준 헤어, 화려해진 화장.

무채색처럼 보였던 이전과 달리 온몸으로 존재감을 뿜어내는 회장 사모님의 모습이 낯설었다.

“둘 다 집에 있었네.”

“알고 오셨으면서 새삼스러운 말씀은 하지 마시고.”

이환의 면박에 무안해할 만도 하건만, 사모님은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 하고 자연스럽게 소파에 앉았다.

“이야기 좀 하려고 왔어. 앉아. 해민 씨는 새해 첫날에 보고 처음인가? 오랜만이라 반갑지만 둘째랑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러니 자리 좀 비켜 줄래요?”

“현실이 미쳐 돌아가니, 객이 주인한테 자리 비켜 달라는 소리도 들어 봅니다.”

앉아요, 해민 씨. 하고 내 어깨를 감싸 사모님이 앉아 있는 소파 맞은편에 나란히 앉은 이환이 비스듬히 다리를 꼬았다.

“헛소리는 관두고 오신 용건이나 말씀하시죠.”

“벌써 이 집 주인 자리에 들어앉은 거야? 빠르네, 빨라.”

“놀러 오셨어요?”

“그럴 리가.”

오고 가는 말이 곱지는 않지만 그래도 마주 앉아서 대화를 나눌 분위기는 만들어진 듯한데. 다리를 꼬고 비스듬히 앉아 있는 이환도 그렇고, 네일아트를 받고 오셨는지 반짝거리는 손톱을 매만지는 사모님도 그렇고. 정작 대화 자리에 앉은 사람들의 태도가 영 글러 먹었다.

“첫째 소식은 들었니?”

“가족 소식이야 언제나 듣고 있지요.”

“초주검을 만들어서 멱살 잡고 끌고 다닌 사람 입에서도 가족 소리가 나오는구나.”

“가족이라도 맞을 짓을 하면 맞아야죠. 때리는 사람이 없으니 저라도 나설 수밖에요.”

“그래도 이번만큼은 그이도 덮어 두지 못하겠는지 매를 들었더구나.”

이번 일이라면 깡패들을 집에 보냈던 일을 말하는 걸까, 아니면 경고를 받고 다짐을 해 놓고서도 기어이 찾아왔던 얼마 전의 일을 말하는 걸까.

깡패와 관련된 일이라면 시간이 너무 지난 뒤에 혼을 내셨다는, 조금 뒷북 같은 느낌이고. 얼마 전에 찾아왔던 일이라면 그전에 벌인 일들이 너무 막장이라 겨우 그 정도 일로 화를 내셨다는 게 오버스러운 느낌이다.

“그 소식을 전하러 오셨을 리는 없고, 본론이나 말씀하시죠.”

냉랭한 대꾸에 사모님이 만지작거리던 손톱에서 시선을 떼어 이환을 바라보았다.

“후계자 자리가 빌 예정이니, 우리도 슬슬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준비요? 우리에게 준비가 필요합니까. 게다가 ‘우리’로 같이 엮이기엔……. 말 안 해도 아시죠?”

웃기지도 않는 소리를 들었다며 이환이 콧방귀를 뀌었다.

나는 그보다 후계자 자리가 빌 예정이라는 사모님의 말에 더 놀랐다. 이정이 온갖 미친 짓을 하고 돌아다녀도 견고하던 후계자 자리가 아니던가.

이환도 회장님이 절대 이정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 확언을 했었는데. 왜 갑자기 후계자 자리가 공백이 될 예정이라는 거지? 그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를 같이 들었으면서 이환은 왜 놀라거나 부정하지 않는 거고.

“예전부터 그랬지. 너는 회사에 욕심이 없다고. 네 생각을 듣고 싶어서 왔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니?”

“왜요. 욕심이 나십니까. 그러기엔 연세가……. 아버지가 아무리 나이를 드셨어도 아직 정정하시잖아요. 제가 보기엔 아버지랑 비슷하게 가실 것 같은데, 욕심내시기엔 너무 무리 아닙니까.”

장난스러운 이환의 대꾸에 사모님의 이마 위로 힘줄이 꿈틀거렸다. 고상하게 웃고 계시지만 힘이 들어간 뺨이 파르르 떨리는 듯도 했다.

“나이가 문제겠니. 내 나이가 서른이었어도 내 손에는 뭐 하나 쥐여 주지 않을 영감이지.”

“그걸 알면 가만히 계시죠. 그래야 지금 앉아 있는 그 자리라도 보존하실 거 아닙니까. 다 늙은 영감한테 알랑방귀 뀌어 얻어 낸 호텔인데.”

그 자리에서 쫓겨나면 얼마나 속이 쓰리실까.

장난스러운 말에도 사모님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더는 이정 이환 형제를 두려워하며 말도 제대로 못 하던 겁 많은 여자가 아니었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걸까, 아니면 원래 이런 사람이었는데 본 모습을 감추고 있었던 걸까. 후자라면 왜 갑자기 쓰고 있던 가면을 벗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을까.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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