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대기업이잖습니까. 누구나 마음속에 작은 꿈 하나씩은 간직하고 있다고요.”
“SG가 그렇게 욕심나냐?”
“실장님은 진짜로 욕심이 안 나십니까? 진짜 조금도? 한 번도 욕심났던 적이 없으셨다고요?”
“딱히. 그래도 요즘은, 굳이 주겠다고 하면 받을까 싶기도 하고.”
“오오오오.”
“해민 씨가 왜 후계자 다툼 같은 건 없냐고 궁금해하더라고. 해민 씨 성격에 그런 걸 탐낼 사람은 아닌데, SG 정도면 조금 미련이 생기나 싶고. 그래도 이정보다는 내가 갖는 걸 더 좋아하려나 싶고.”
“서해민 씨. 이제 보니 아주 야망이 큰 사람이었네요. 제가 말씀드렸던가요? 두 분 아주 잘 어울리십니다. 제가 처음 봤을 때부터 딱 알아봤습니다.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니까요.”
어떻게든 대기업의 이인자 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욕망에 눈이 먼 자의 아부였다.
“회장님이 크게 다치지 않으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만에 하나, 돌아가시기라도 했으면 골치 아플 뻔했는데. 붙잡아 두는 사람도 없으니 이정 부회장이 마음껏 날뛰었을 거 아닙니까.”
“이정이 아버지를 죽여?”
하, 하고 헛웃음을 흘린 이환이 고개를 내저었다.
“너, 아버지 체력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는구나. 아버지는 페로몬이 강한 축에 속하는 알파다. 나이가 있으시지만 이정 정도는 여전히 한 손으로 제압하실 양반이야. 같은 알파라고 해도 아버지와 이정이 붙으면, 이정이 밀리지.”
“…….”
그러고 보니 이정이 찌르는 칼을 손으로 붙잡아 막았다고 했던가.
본가에 심어 둔 소식통에게서 전달받은 이야기를 떠올린 백윤경이 뒤늦게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주억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어차피 SG는 나중 일이다.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주식 한 주 내놓지 않을 양반이고, 앞으로 이십 년은 족히 더 사실 양반이야. 벌써부터 후계자니 뭐니 하면서 끌려다닐 필요는 없지.”
“아아, 지금부터 설레발을 치지 않아도 실장님이 후계자로 지목되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다?”
“딱히 후계자로 인정받지 않더라도, 남은 두 녀석 중에 한 놈에게 물려주시겠다면 나중에 뺏어 와도 될 일이니까.”
“이야, 마음만 먹으면 못 할 것이 없다는 저 자신감!”
“이인자, 되기 싫어?”
“되고 싶습니다. 제 꿈이 실장님 돌아가실 때까지 견마지로를 다하는 겁니다.”
“간신 같은 놈이 견마지로는 무슨.”
“간신이라뇨! 그건 저에 대한 모독입니다. 취소하세요! 어느 모로 보나 충신 아닙니까, 충신.”
“됐고.”
본인의 충심을 의심하는 거냐며 날뛰려는 백윤경을 손짓 한 번으로 무시한 이환이 손가락으로 턱을 긁적였다.
“본가 쪽으로 라인 열어 둬. 저희들끼리 알아서 수습하겠지만, 아버지가 이정을 어떻게 처분하는지는 확인해 둬야 할 테니.”
“크, 본가 사모님. 김칫국 들이켜며 댄스 추고 계시는 거 아닐지 모르겠네요.”
“옆에서 같이 김칫국 마시고 있는 놈이. 쯧, 까불지 말고. 이십 년 넘게 속내 감추고 넙죽 엎드려 기다린 여자다. 어지간한 독심으로는 그렇게 못 해. 그 여자도 잘 마킹해 둬.”
“네.”
이환의 지적에 백윤경이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코앞으로 SG가 굴러 들어왔는데 애먼 놈에게 뺏길 수는 없죠. 제가 어중이떠중이 달려들어서 침 바르는 일 없도록,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겠습니다.”
물론 그 진중함이 오 분도 가지 않았다.
∞ ∞ ∞
“그래서, 고칠 수 있어 없어?”
“그…… 회장님. 지금 당장 바뀔 수 있다 없다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을 들여서 서서히 변화를 지켜봐야…….”
“시간을 들여? 제 아비를 칼로 찌른 놈이야! 언제 또 칼을 들고 날뛸지 모를 미친놈에게 시간을 줘?”
성을 내며 책상을 두드리자 손을 칭칭 감은 붕대에 희미하게 붉은 물이 스미었다.
“회, 회장님. 그렇게 화만 내실 일이 아닙니다.”
“자네, 또 이번과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나? 자네가 장담한다면 내 자네를 믿고 저 미친놈을 풀어놓지. 시간도 충분히 줄 테고.”
이 회장의 억지 아닌 억지에 병원장은 식은땀만 뻘뻘 흘렸다.
돈 있는 자들의 억지를 하루 이틀 겪는 것도 아니건만. 목숨을 위협당했던, 심지어 제 아들이 휘두른 칼에 상해를 입은 이 회장의 분노는 그 어느 때보다 강렬했다.
후우.
무거운 한숨을 쏟아 낸 이수한이 잠시 숨을 고르며 화를 억눌렀다.
“얼마나 걸릴 것 같나.”
“……예?”
“어차피 지금 당장 회사를 넘겨줄 건 아니니. 얼마나 시간을 주면 저 미친놈을 정상으로 만들 수 있느냔 말이야.”
정상으로 되돌리는 건 빼도 박도 못하는 결과가 되었다. 정신병에 완치란 단어를 사용하는 것부터 어폐가 있었으나, 그것을 이 회장에게 설명할 엄두도 나지 않았고 설명한다 하여 이 회장이 납득하리라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이, 일이 년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꾸준한 상담으로 환자의 마음을 여는 게 가장 중요한 문제이고, 이제껏 잠잠했던 도련님에게 무엇이 트리거로 작용했는지도 알아봐야 하고, 무엇보다 심리적인 안정을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하…….”
“내가 지금 환자의 심리적 안정이 어쩌고 하는 말을 듣자고 자넬 부른 줄 알아? 이 사람아.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말이 길어지는 거야. 당당하지 못한 사람들이 꼭 말이 길어지지. 그래서 몇 년!”
“정신적인 문제는 육체적인 문제와 다릅니다, 회장님. 배를 열어서 문제가 되는 장기를 떼어 내면 끝나는 수술과는 다르지요. 머리를 열어서 뇌를 주무를 수도 없고, 그런다고 고쳐지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병원장은 필사적으로 갖은 이유를 대며 이 회장을 진정시키려 했다.
“약 먹여. 필요하다면 한 대접씩 들이부어. 그렇게 해서라도 고칠 수 있으면 먹이란 말이네. 수술로 고칠 수 없는 병이라면 약이라도 먹여야지.”
“약물 치료를 한다고 단번에 나을 수 있는 병이 아닙니다. 오히려 약을 먹으면 부작용 때문에 일상생활이 힘든 경우가 많습니다.”
“그럼 지금은 일상생활이 가능하다고 보는가? 언제 사람한테 칼을 휘두를지 모르는데?”
“그러니까 시간이…….”
“시간, 시간! 그래서 그놈의 시간이 얼마나 필요하냐고!”
답답하다는 듯 내지른 호통에 병원장이 놀라 몸을 들썩였다.
“오 년, 아니, 십 년. 내가 자다가 죽는 일만 없다면 그 정도는 버티겠지. 그때까지 멀쩡해질 수 있는지나 말해 봐. 나는 확신이 필요하네. 그때까지 기다렸는데도 달라지는 게 없다면, SG는 미친놈 손아귀에 들어가거나 하이에나 같은 놈들에게 뜯어먹히겠지. 말해 보게. 내가 자네를 믿고 십 년을 기다려도 되는지, 후계자 자리를 공석으로 비워 놔도 되겠는지. 자네 한마디에 SG의 미래가 걸려 있어.”
부리부리하게 뜬 눈에서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그 기백에 병원장은 졸도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잘 대답해. 내가 자네를 믿고 십 년이라는 시간을 기다렸는데도 이정 그놈이 멀쩡해지지 않는다면, 자네는 지금의 선택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할 걸세. 다만, 자네가 내 장남을 멀쩡하게 돌려놓는다면 받을 대가가 달라지겠지. 상과 벌의 크기는 같을 게야. 몇 대가 먹고살 부를 얻거나, 몇 대가 그냥 끊어지거나.”
몇 대가 먹고살 ‘부’에서 꿀꺽 침을 삼켰던 병원장은 그 뒤에 이어진 말에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나이에 무슨 목표가 있고 무슨 바람이 남아 있을까. 이제는 그저 자식이 잘되고, 손주가 잘되고, 핏줄들이 잘 먹고 잘사는 모습을 보다 죽을 일만 남은 노인네인데.
이 회장의 곁에서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것 또한 자식들의 미래를 위해서였다. 자식들이 잘 먹고 잘살기를 바라며 부를 탐하지만, 처형대에 같이 오르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병원장의 이마 위로 땀 한 방울이 또르르 흘렀다. 한참의 침묵이 이어진 끝에, 그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회장님.”
“생각은 끝났나.”
“큰 도련님은…… 병을 고친다거나 정상으로 돌려놓는다고 말할 수 있는 케이스가 아닙니다. 큰 도련님에게 필요한 것은 교육입니다. ‘왜’ 하면 안 되는지가 아니라, 어떠한 행동을 함으로써 본인에게 어떤 불이익이 돌아오게 되는지. 그걸 통하여 정상적으로 보일 수 있게 하는 교육. 지금까지 그러한 교육이 필요치 않은 환경에서 지내 오셨지만, 이번 일을 시작으로 폭력적인 상황이 반복된다면…… 점점 더 위험해질 겁니다.”
“그게 자네의 답인가.”
흐음, 하고 목을 울린 이수한이 손가락으로 소파 팔걸이를 두드렸다.
“자네의 허심탄회한 의견을 듣고 싶었네. 의사가 환자만 치료하면 되지 그 외의 것에 신경을 쓰면 되나. 선택에 따른 대가는 내 몫이겠지. 애초에 자네 전공도 아니지 않나. 치료할 의사도 따로 있을 텐데, 자네한테 책임을 물리면 쓰나.”
이수한이 허허 웃음을 흘렸으나, 병원장은 그게 결코 본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길 가던 사람을 붙잡고도 아무 상관 없는 대가를 요구할 수 있는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
“개돼지라면 때려서라도 교육을 시켰을 텐데. 오히려 사람이 동물보다 더 통제하기가 어렵다니. 웃긴 일이지 않나.”
전혀 웃긴 일이 아니었으나 병원장은 이 회장의 비위를 맞추고자 억지웃음을 지었다.
“병원 공사 좀 해야겠네. 병실 하나 뚝 떼어서 어중이떠중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막아 둬. 전용 통로 하나 만들어 두고 다른 곳으로는 개미 새끼 하나 드나들 수 없도록. 그리고 그곳에 상주할 의사와 간호사를 뽑아. 최소 인원으로.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지.”
“네, 회장님.”
“공사 끝나면 바로 이동시킬 거야. 말이 흘러 나가는 일이 없어야 하네. 누구도 알아서는 안 돼.”
“조용히, 빈틈없이 진행하겠습니다. 그리고 전담 의사와 간호사도 입이 무거운 사람들로 골라 두겠습니다.”
“그래. 내 자네만 믿겠네.”
뻗어 나온 손이 병원장의 손등을 토닥거렸다. 붕대에 스민 핏물이 손등에 뻘건 자국을 남겼다. 그것이 마치 앞으로 저를 주시할 이 회장의 낙인처럼 느껴져, 병원장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