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왜……, 왜 가만히 두셨습니까.”
“뭐?”
“왜 가만히 두셨어요. 왜 그 쓰레기 같은 놈이 환이 곁에 있도록 그냥 두셨냐고요!”
“타일러도 보고 혼도 내 봤다. 환이 놈 붙잡고도 이야기해 보고, 그 서해민이란 놈을 불러서도 이야기해 봤다. 씨알도 안 먹히더구나. 그렇다고 부자지간의 연이라도 끊을까. 애초에 내가 말을 하기도 전에 환이가 그리하겠다고 하더구나. 이 이상 내가 무엇을 해!”
“죽여 버렸어야죠. 치워 버렸어야죠. 환이 옆에서 존재하지 않게, 눈에 보이지도 않게, 소식도 들을 수 없게!”
핏줄 선 눈으로 이수한을 노려보며 이정이 소리를 질렀다.
“아버지가 망쳤습니다. 아버지가 환이를 망쳤어요!”
비명과도 같은 고함을 지르는 이정의 뺨을 후려쳤다. 퍽 소리가 나며 돌아간 고개를 바로 한 이정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그런 쓸모없는 것들에게 신경 쓰지 마라. 앞을 봐. 뒤처진 것들을 돌아보지 말고 네 앞에 놓인 것들을 봐. 아래를 내려다보지 말고 위를 봐라. 너는 더 멀리, 그리고 더 높이 뻗어 나갈 SG의 미래다. 서해민은 네가 신경 쓸 가치도 없는 놈이야.”
정아. 너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이를 어르듯, 이정의 어깨를 감싸 쥐고 이수한이 속삭였다. 뒤처진 벌레를 보지 말고 반짝이는 네 앞을 보라고, 진창에서 뒹구는 그 조잡한 장난감을 보지 말고 네가 올라서야 할 하늘을 보라고.
이수한의 토닥거림에 힘없이 서 있던 이정이 툭 하고 이마를 기대 왔다. 이수한은 기꺼이 그런 아들의 등을 끌어안았다.
“환이는 네 동생이다. 핏줄은 버릴 수 없는 법이야. 지금 당장이야 좋아 죽을지언정, 수십 번을 만났다 헤어지는 인연과 핏줄을 비할 수 없지. 시간이 지나면 환이도……, 큽.”
장성한 아들의 등을 토닥이며 말을 하던 이수한이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 폭 안겨 있던 이정이 몸을 뒤로 물렸다.
“환이 옆에 그런 쓰레기가 붙어 있는 걸 일분일초도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내 동생이! 내 손을 벗어나는 건 용납할 수 없어요.”
툭, 투둑. 옆구리를 움켜쥔 이수한의 손가락 사이로 붉은 핏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아버지는 나를 막을 게 아니라 그 쓰레기부터 치웠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으셨죠. 참으라고, 기다리라고. 나한테만 요구하고 내 앞을 막아섰어요. 아버지는 도움이 안 됩니다.”
고저 없이 흘러나오는 이정의 목소리에 이수한이 눈을 부릅떴다.
“너, 너……. 네가 감히…….”
“오히려 방해물일 뿐이에요. 아버지가 그러셨죠. 방해가 되는 것은 치워야 한다고.”
흐으 하고 해괴하게 웃는 이정을 이수한이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작금의 상황을 파악하려는지 잠시 말이 없었다.
이수한은 옆구리에 대고 있던 손을 떼어 내 펼쳤다. 복부에 절반도 꽂히지 못한 과도가 그의 손바닥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피는 이수한의 복부가 아닌 칼을 움켜쥐었던 그의 손에서 흐르고 있었다.
“어, 어떻게…….”
예상과 다른 상황에 이정이 말을 더듬었다. 챙그랑, 과도를 바닥에 내던진 이수한이 이정의 뺨을 후려쳤다.
“이 후레자식. 네가 감히 아비에게 칼을 들이밀어!”
콰당 하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싱크대에 부딪쳐 넘어지는 이정의 몸 위로 이수한이 발을 올렸다.
“이 개자식. 아비도 못 알아보는 새끼. 너 같은 놈을 자식이라고 먹이고 키웠구나. 이 빌어먹을 새끼!”
소란스러움에 집 안으로 들어온 경호원들이 피를 뚝뚝 흘리는 이수한을 보고 놀라 다가왔다.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회장님.”
“진정하시고 상처부터 치료하시지요.”
바닥에 웅크리고 있는 이정을 짓밟아 대는 이수한을 경호원들이 만류하며 붙잡았다.
“저 개만도 못한 놈을 방에다 처박아 놔. 발광할 수도 있으니 밧줄로 묶어서.”
붉어진 얼굴로 씩씩거리는 이수한의 외침에 경호원들이 이정을 연행하듯이 끌고 갔다.
“병원으로 모시겠습니다.”
“이 꼴로 무슨 병원을 가! 병원장 오라고 해. 지금 당장!”
경호원들에게 끌려가는 이정을 부리부리한 눈으로 노려보던 이수한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에 수건을 대충 감았다.
“하…….”
이정이 앉아 있었던 의자를 끌어와 힘없이 주저앉은 그는 무거운 한숨을 토해 냈다.
“이제 보니 미친놈을 키웠구나.”
작게 중얼거린 이수한이 어이가 없는 마음에 허허, 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 ∞ ∞
“그래서 지금 아주 난리가 났답니다.”
이야기를 마친 백윤경이 목이 탄다며 커피를 들이켰다가 뜨겁다고 호들갑을 떨며 혀를 날름거리는 모습을 이환이 하찮게 바라보았다.
“아버지 꼴이 우습게 되었네.”
“이정 부회장이 그 정도로 미친놈인 줄은 몰랐다고 해도, 어느 정도 미친 건 인정을 하셨어야 했는데. 그걸 덮어놓고 모른 척한 회장님이 사실 도를 넘으셨던 거죠.”
유일하게 이정의 미친 짓을 넘어가 주는 사람이었는데, 하필이면 이정의 미친 짓이 이수한 회장에게로 향한 게 불행이었다고 봐야 하나. 아니면 결국 그렇게 될 일이었다고 해야 하나.
쯧쯧 혀를 찬 백윤경은 찬물 한 모금, 커피 한 모금, 다시 찬물 한 모금을 삼켰다.
쟤도 정상은 아닌 것 같은데.
“지금 뭔가 기분 나쁜 생각을 하신 것 같습니다, 실장님?”
“딱히 기분 나쁜 생각은 아닐걸.”
아주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판단이었을 뿐.
양심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아도 역시나 객관적인 판단이라며 이환이 제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정된 일이라고 봐야 하겠지.”
느긋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커피를 홀짝거리며 이환이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예상하고 계셨던 겁니까?”
“지금까지 겪어 놓고도 이정을 몰라? 이제껏 제가 원하는 건 다 가졌던 놈이야. 그런 이정 앞에 마음대로 되지 않는 서해민이 나타났어. 때맞춰 잘 가지고 놀던 동생도 엇나가기 시작했지. 이정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상황이 어그러진 걸 모두 해민 씨 탓으로 돌렸을 거다. 처음 납치는 이정에게 재미있는 시도였겠지만, 그 뒤로 쭉 무리수를 둔 것만 보아도 답이 나오잖아. 이 모든 건 서해민 탓이다. 그럼 서해민을 치워 버리고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면 되겠구나.”
“에이, 설마요. 사람이 어떻게 그런 단순한 생각을 합니까.”
“그놈은 그래. 아버지가 그놈을 단순하게 만들었어.”
그래도 예전에는 제법 머리도 잘 돌아가는 간사한 놈이었는데. 점점 아메바 같은 놈이 되어 가고 있다고 이환이 혀를 찼다.
“아무리 그래도 아메바라뇨. 아메바한테 사과하십쇼.”
들려오는 개소리는 가볍게 무시해 주었다.
“아무튼 그거랑 회장님을 찌른 게 무슨 상관이라고요.”
“상황을 변화시킨 게 서해민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서해민을 어떻게든 치우려고 하고 있잖아. 그런 와중에 아버지가 이쪽으로 접근을 금지시켰지. 그러면 이정의 원망이 누구에게로 향하겠어. 지금 이정에게 아버지는, 도움은커녕 방해만 되는 존재일 뿐이야. 지금 상황에서 불필요한, 배제해야 할 존재.”
“그래도 아버지인데…….”
“그러면 나는?”
나는 뭐 동생이 아니라서 벽돌을 던지고 자동차로 밀어 버리고 철근을 떨어뜨렸냐? 출생의 비밀이라도 있대?
이환의 지적에 백윤경이 그건 그렇죠, 하고 냉큼 백기를 들었다.
“이정에게 가족인 것과 칼부림하는 건 별개의 문제다. 가족이라도 방해물은 방해물일 뿐이지.”
“결국 언제 터져도 터질 문제였다는 뜻입니까?”
“칼로 찌를 것까지는 몰랐지만. 조만간 무슨 일을 저지를 거라고는 생각하고 있었지.”
백윤경은 침울한 표정으로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우리는 왜 여기서 커피를 마시는 겁니까. 겨울이 끝났다지만, 그래도 아직은 좀 추운데 말입니다.”
때마침 휭 하고 바람이 불었다. 새벽에 가까운 밤늦은 시간, 정원 한쪽에 놓인 야외 테이블에 마주 앉아 있던 백윤경이 어두워진 정원을 둘러보며 툴툴거렸다.
“안에서 이야기하다 해민 씨가 깰 수도 있고, 그러다 해민 씨가 들을 수도 있고, 그러면 해민 씨가 걱정할 수도 있고.”
“…….”
짜증 난다, 이 커플.
백윤경이 작게 중얼거렸다.
“아무튼 칼부림까지 당한 이상, 아버지가 이정을 계속 끌어안지는 않으시겠지.”
“아무리 회장님이라도 그건 무리겠죠. 좋게 이해하고 넘어갈 수준이 아니잖습니까.”
“다른 놈한테 칼질하는 건 괜찮다 이해하고 넘기셨을 거다. 그 칼이 본인에게 향했으니 이해하고 넘길 문제가 아니게 되어 버린 것일 뿐.”
“대상의 문제가 아니잖아요!”
“아버지에게는 대상의 문제다. 감히 본인에게 칼을 겨누다니, 장남이고 뭐고 용서할 수 없으실 거야. 그것만으로도 이정은 끝난 거지.”
아, 진짜 막장 가족.
작게 씨부렁거리는 소리에 이환이 웃음을 터뜨렸다.
“맞네, 그거. 막장. 흔한 재벌가의 막장 스토리.”
“그렇게 웃으실 때가 아닙니다. 이건 기회죠. 굳건했던 황태자 자리에서 장남이 나가리가 되었으니, 이제 실장님이 SG를 꿀꺽하실 일만 남은 것 아닙니까.”
“아버지가 고민 좀 하시겠지.”
“설마 그런 일을 겪으시고도 장남한테 미련을?”
“그건 아니고. ‘유능’하지만 컨트롤되지 않는 차남과 소심하고 의욕도 없는 데다 베타인 삼남, 욕심도 많고 의욕도 높지만 베타에 여자이기까지 한 막내딸. 본인의 목숨과도 같은 회사를 과연 누구에게 물려주어야 할지. 생각이 많으실 거다.”
유독 ‘유능하지만’을 강조하는 이환을 남모르게 흘겨보며 백윤경이 쯧쯧 고개를 내저었다.
저 자신감도 병이지.
차마 말하지 못하는 험담을 속으로 삼키며 백윤경이 “당연히 차남입지요.” 하고 간신처럼 딸랑였다.
“실장님처럼 유능하고 성실한 인재가 또 어디 있다고요. 실장님이 아니면 SG라는 거대한 제국을 물려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실장님이 바로 준비된 후계자 아니겠습니까.”
“너…… 아직도 이인자의 꿈을 못 버렸군.”
이환의 지적에 백윤경이 크흠 헛기침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