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튼 퓨리티-160화 (160/172)

160화

Rotten Peter Pan

“좋은 아침.”

말쑥한 남자의 인사에 데스크에서 업무 준비를 하던 비서들이 일제히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부회장님.”

“일정 브리핑 전에 커피 한 잔 부탁해요.”

“네, 부회장님.”

비서들의 인사에 담백하게 응수한 이정이 부회장실로 들어갔다.

얼마 전 사무실 안에서 동생과 싸우고 무자비하게 머리채를 붙잡혀 끌려 나갔던 그는 일주일 정도를 쉬고 멀쩡하게 복귀했다.

분명 얼굴이 엉망이 되도록 맞은 것을 보았는데, 겉으로만 심해 보였던 것일까. 그보다는 알파의 월등한 회복력과 괴물 같은 체력이 일주일이라는 짧은 시간 사이에 그를 회복시켰다고 보는 쪽이 맞겠지. 실제로 일주일 뒤에 복귀한 이정의 얼굴에는 옅은 노란색의 멍 자국만이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표나지 않는 얼굴로, 무슨 일이 있었냐는 양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로 인사를 하며 출근한 이정을 맞이하는 비서진들이 미약한 괴이함을 느낀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부끄럽다거나 수치스럽다거나, 아니면 그래서 더 당당함을 꾸며 내려는 모습과는 달랐다. 이정은 평소와 조금도 다름없이 행동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척이 아니라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유일한 변화라면 이정이 수족처럼 부리던 한 실장이 하루아침에 쫓겨나듯 퇴사했다는 점뿐이었으나, 그마저도 이정은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인사를 남기고 부회장실 안으로 들어가는 이정을 바라보던 비서진은 커피와 오늘 일정 브리핑을 준비했다.

똑똑, 노크를 하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선 비서가 커피를 건넸다.

“고마워요.”

눈을 감고 커피 향을 음미한 이정이 가볍게 한 모금을 머금어 넘긴 뒤 비서를 바라보았다. 그에 비서가 태블릿을 터치해 이정의 오늘 일정을 보고했다.

“오케이. 오늘도 힘내 봅시다.”

싱긋 웃으며 비서를 내보낸 이정의 입꼬리가 내려갔다. 무표정하게 변한 얼굴로 모니터를 멍하게 바라보는 이정의 손가락이 불안정하게 책상 위를 두드려 댔다.

그는 정해진 순서처럼 컴퓨터를 켜고 주머니에서 꺼낸 휴대폰으로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조금의 기다림도 없이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기계적인 대응 음이 들려왔다. 신호음조차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차단을 해 놓았음이 분명했다.

어제도, 그제도, 일주일 전에도, 아니, 몇 주 전부터 들었던 그 목소리가 짜증을 일으켰다. 휴대폰을 쥔 이정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핏줄이 불거질 정도로 꽉 힘을 주며 화를 참아 낸 그가 후우 하고 무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잠시 거칠어진 숨을 가라앉힌 이정이 서랍에서 다른 휴대폰을 꺼내 저장된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연결 시도조차 되지 않고 끊어지던 조금 전의 번호와 달리 몇 번의 신호가 가기도 전에 네, 하고 답이 들려왔다.

“보고해.”

―목표 쪽은 움직임이 없습니다. 다만 어제 자택 공사가 끝났다고 합니다. 어제 오후에 업체가 철수했고, 가정부라던 노인네가 집으로 들어간 뒤에 몇 명의 아줌마들이 더 방문했습니다. 몇 시간 뒤에 나오는 아줌마들에게 사람을 보내 물어봤더니 청소 때문에 부른 용역이었다고 합니다.

“집 공사가…… 끝났다?”

―네.

그 말인즉.

“호텔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겠네?”

―빠르면 오늘, 늦어도 이번 주 안에는 그럴 듯싶습니다.

오랜만에 듣는 희소식이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속이 조금 누그러졌다.

두 놈이 무슨 짓을 하는지 호텔에만 처박혀 코빼기도 비추지 않는 시간 동안 얼마나 답답했던가. 그나마 밖에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도 집이 아닌 다른 곳으로 빠지는 바람에 만나러 갈 타이밍이 나지 않았다. 아니, 만나러 갈 수야 있겠지만 정작 만나지는 못하고 아버지의 귀에 이야기만 들어갔겠지.

아버지가 소식을 듣는다면 크게 화를 내시겠지만, 환이와 화해만 한다면 괜찮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이환과 만나기만 한다면 말이다. 대신 만나려는 시도에서 끝나고 만나지도 못할 경우가 문제이지.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해 줄 때까지 계속 시도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단 한 번의 시도가 중요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어그러진 건 모두 그 새끼 때문인데. 그 빌어먹을 거지새끼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환이가 가족과 척질 아이가 아닌데. 그런데 그 주제도 모르는 놈은 팔자 좋게 호텔 방에 처박혀 내 동생과 뒹굴고 있단 말이지.

곁에서 뭐라고 이간질을 하고 환이를 충동질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의 상황이 모두 그 새끼 때문이라는 사실은 자명했다.

그 벌레 같은 놈을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환이가 관심을 갖는 장난감이라고 그냥 두고 보는 게 아니었는데.

격에 맞지 않는 물건은 빨리 치워 버렸어야 했는데.

“잘 지켜보고 있다가 호텔 나오면 연락해. 늦지 말고.”

―네.

호텔로 쳐들어간다면 막힐 것이 당연했고, 이동하는 이환을 뒤쫓는다면 만나기도 전에 차단당할 것이다. 싸구려 장난감과 함께 있을 때에는 경호원들을 빼곡히 배치해 두기에 이환 혼자 움직일 때를 노려야 하는데, 정작 그 두 놈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소란을 일으키는 건 아버지가 제일 싫어하는 행동이다. 결국 소란을 피해 환이를 만나기 위해서는 이환이 차에 타거나 내릴 때를 노려 그 앞에 서야 했다.

이환이 언제 호텔에서 나올지도 모르는 마당에 무턱대고 호텔 주차장에서 기다리다가는 만나기도 전에 잡혀 올 가능성이 크니, 환이가 호텔에서 나와 집에 들어가는 그 순간이 유일한 기회라고 볼 수 있었다.

기회는 한 번뿐이다.

“한 번만 만나면 돼. 만나서 이야기만 잘하면…….”

괜찮을 거다.

다시 착하고 순했던 내 동생 이환으로 돌아오겠지.

긍정적인 생각과 달리 이정의 손가락은 초조하게 책상 위를 두드리고 있었다.

∞ ∞ ∞

―목표가 움직입니다. 지금 호텔에서 나왔습니다. 동행인과 경호 인력들을 대동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추가로, 호텔에서 체크아웃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좋았어.”

다급히 전해져 온 연락에 이정이 낮게 환호했다. 그는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정장 재킷과 휴대폰을 챙겨 사무실을 나섰다.

“잠시 자리 좀 비웁니다.”

“부회장님! 삼십 분 뒤에 회의가…….”

이정의 통보에 비서진이 다급히 만류했으나, 이정은 관심도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오후 일정 캔슬합니다.”

거침없이 걸음을 내디딘 이정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비서들의 난처한 얼굴이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너머로 사라졌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에 오르는 순간까지도 이정은 초조했다. 시동을 켜고 운전대를 잡은 그는 빠르게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행선지 파악됐어?”

전화를 걸어 묻자, 지금 어디를 지나고 있는지 답이 돌아왔다.

“계속 따라붙어. 도착할 때까지 놓치지 말고 따라붙으라고!”

대충 어디로 가는지 예상이 되었고, 다행히 그 예상지는 이정 자신이 향하고 있는 곳과 일치했다. 이제 빠르지도 늦지도 않은 타이밍에 도착하여 대면하는 일만이 남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이밍이었다.

“전화 끊지 말고, 지나치는 지점 계속 보고해.”

이정은 속도를 높여 익숙한 길을 달렸다.

같은 서울 내에 있기에 거리는 멀지 않았으나 지옥 같은 교통 체증으로 어딜 가든 꽉 막힌 서울의 도로가 속을 갑갑하게 했다.

“씨발, 비켜. 비키라고.”

빵빵거리며 클랙슨을 울리고 거칠게 차선 변경을 하며 이환의 자택이 있는 동네로 접어들었을 무렵.

―골목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저희는 따라 들어가지 않고 여기서 멈추겠습니다.

“수고했어. 보수는 오늘 안으로 보내도록 하지.”

전화를 끊으며 거칠게 차선을 변경했다. 깜빡이를 켬과 동시에 차 앞부리를 들이밀자 여기저기서 빵빵 소리가 울렸다.

“시끄러, 이 벌레 새끼들아.”

욕설을 내뱉으며 막 빨간불로 바뀐 신호를 무시하고 핸들을 돌렸다. 반대편 차선에서 달려오던 차를 아슬아슬하게 비켜나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저 멀리 집 앞에서 내려 대문을 열고 들어가는 인영이 보였다.

“아직, 들어가면, 안 된다고.”

부웅, 하고 급발진을 하듯 속도를 낸 차가 방지턱을 넘어가며 덜컹 흔들렸다.

저대로 들어가게 둔다면 끝이다. 대문이 닫힌 뒤에는 경호원들에게 막혀 힘으로 밀고 들어갈 수도 없고, 인터폰을 누른다고 해도 나와 보지 않겠지.

씨발. 작게 욕설을 뇌까린 이정이 그대로 담벼락 옆 주차장 문에 차를 들이박았다. 쾅 소리를 내며 충격이 전해졌으나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충돌로 인해 흩어졌던 경호 인력들이 몰려왔다.

“괜찮으십니까. 정신 드셨으면 좀 내려 보세요.”

창문을 두드리며 말소리가 들려왔다. 살짝 어지러운 머리를 흔들어 정신을 차리고 차에서 내리자 주변을 감싸고 있는 경호원들이 보였다.

“환이는?”

“……이정 부회장?”

저희끼리 작게 맞지? 하고 확인하듯 묻는 소리가 들렸다.

“환이는 어디 있어?”

“이정 부회장님.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환이부터 불러와.”

“실장님은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시면 타고 가실 차를 불러드리겠습니다.”

“환이부터 불러오라고, 새끼야!”

대문 쪽으로 다가서는 이정의 앞을 경호원들이 막아섰다.

“감히, 내 앞을 막아? 니들 다 잘리고 싶어?”

우격다짐으로 밀쳐 내는 이정의 힘에도 경호원들은 밀리지 않았다. 마치 인간 펜스처럼 제자리를 지키고 선 경호원들은 이정의 협박이 들리지 않는다는 양 표정 변화조차 없었다.

“건방진 새끼들이…….”

씨근덕거리며 주먹이라도 날리려 할 때. 끼익 소리를 내며 대문이 열렸다. 앞을 가로막고 있던 경호원들이 양옆으로 물러나며 이환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 이래야 내 동생이지. 형이 왔는데 내 동생이 얼굴도 안 비출 리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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