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해민 씨가 혼자 속상하지 않게 위로해 주고 싶고, 해민 씨가 혼자 기뻐하지 않게 같이 즐거워하고 싶고, 해민 씨가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으면 혼내 주려고?”
“저 이상한 생각 안 해요.”
“불순한 생각 종종 합니다. 표정에서 다 드러나요.”
“아닌데.”
“나야말로 ‘아닌데’입니다. 해민 씨가 이 집에 왔었을 초창기에만 해도, 나를 볼 때마다 엄청 이상한 표정을 자주 지었습니다.”
“제가요?”
“네. 마치…… 미친놈을 보는 표정이었죠.”
“…….”
몰랐는데 내가 표정에서 생각이 드러나는 타입이었나 보다.
“그래서 귀여웠습니다. 아, 내 요정님은 참 솔직하고 순수하구나. 선을 긋고 딱딱하게 굴어도 아직 세상의 때가 묻지 않았구나.”
“…….”
“그때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네요?”
“지금 제 표정이 어떤데요.”
“묘하게 환멸스러운 표정?”
역시나 눈치가 빨랐다.
키득거리며 웃던 이환이 정색하고 있는 나를 꽈악 끌어안았다.
“내 요정님 왜 이렇게 귀엽지. 한 살 더 먹었는데, 오히려 더 귀여워졌네요. 요정님은 나이를 먹을수록 더 귀여워지는 법칙이라도 있습니까.”
“종족의 특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어서요. 나중에 알게 되면 말씀드릴게요.”
컨셉에는 그보다 더한 컨셉으로 응수하며 역지사지를 보여 줘야 지켜보는 입장에서 얼마나 괴로운지를 깨달을 텐데, 차마 이환보다 더한 컨셉을 잡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럴 때는 ‘안 돼요, 싫어요, 하지 마세요.’보다는 그냥 정색하고 진지하게 대답해 주는 것이 최선이었다.
어느새 도착한 집 앞에서 이환이 차 문을 열어 주었다.
몇 주 만에 다시 오게 된 집은, 비록 내 집이 아닐지언정 ‘돌아왔다’는 기분을 느끼게 했다. 역시, 이래서 사람들이 집을 사나 보다. 돌아올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리저리 부평초처럼 흔들리던 마음이 지탱되는 기분이다.
말끔하게 고쳐진 대문과 주차장 문을 한 차례 살펴 확인하고 안심하며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엄청 오랜만에 온 기분이에요.”
“호텔 생활이 좋았습니까?”
“집은 집 특유의 안정감이 있어요. 궁궐 같은 호텔이라도 그건 채워 주지 못하는 것 같아요.”
“해민 씨가 이곳에서 안정감을 느낀다는 말이 최고의 칭찬이네요.”
내 어깨에 손을 둘러 감싸 안고 나란히 정원의 계단을 올랐다. 마지막 계단에 올라섰을 때, 쾅 하고 요란한 소리가 났다.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우르르 몰려가는 경비 인력들이 보였다.
“……우리 집인 모양인데요?”
아, 하고 낮게 탄식한 이환이 먼저 들어가 있으라며 손짓했으나 가만히 서서 보이지 않는 대문 너머를 힐끗거렸다.
다가온 경비원 한 명이 이환에게 무언가를 속삭였다.
“아, 씨발 새끼.”
이환이 낮게 욕설을 뇌까렸다.
은근히 박력 있어.
항상 점잖고 상냥하고 젠틀한 사람이 가끔 욕하는 모습을 보면 놀랍기도 하지만 그게 또 묘하게 절제된 흉포함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마치 호랑이나 사자가 뿜어내는 포식자의 야성 같은. 이런 게 나쁜 남자의 매력이라는 건가.
어울리지 않는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이환이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갔다. 두어 걸음 떨어져 그를 뒤따랐다. 대문을 열고 나가자 무언가가 이환을 확 덮쳐들었다.
“환아!”
이제 볼 일이 없을 거라던 이정이었다.
진심으로 짜증이 난 듯이 미간을 찌푸린 이환이 이정의 몸을 밀어 떨어뜨렸다.
“환아. 저번에 네가 화내고 간 뒤에 형이 이야기하려고 계속 연락했는데,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우리 환이가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아서, 형이 오해도 풀고 사과도 하고 싶어서 계속 전화했는데. 전화도 받지 않고, 집에도 없다고 하고…….”
집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은 장본인이 왜 집에 없었냐고 물으니 참으로 뻔뻔해 보였다.
사람을 시켜 납치를 청부하고, 환한 대낮에 남의 집에 조폭을 보내서 집을 다 부숴 놓고, 온갖 위험한 짓은 다 시킨 주제에 그걸 우리가 모르고 있으리라 생각하는 건가.
그동안 사고로 위장하여 이환의 머리 위에 철근을 떨어뜨리고, 어린 이환을 창고에 가두고 벽돌을 떨어뜨리고 교통사고를 나게 만든 것은 어찌어찌 불운한 일이라며 넘어갈 수 있다 쳐도. 난데없는 납치와 가택 침입은 누가 봐도 사주한 사람이 있으리라 생각할 텐데.
그리 뻔히 보이는 수를 쓰고서도 뻔뻔하게 이환의 앞에 나타나서 오해라느니 사과라느니 주절거리는 이정의 정신 상태가 이해되지 않았다.
“이정.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
“이환. 형이 지금 너 걱정되어서 찾아왔는데 그게 무슨 태도야.”
“우리 장남이 아버지한테 혼이 덜 났나.”
손을 뻗어 이정의 목을 콱 잡아챈 이환이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평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환의 손에 붙들린 이정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환을 말려야 할까 고민했으나, 주변에 나 말고도 경호 인력이 많이 있음을 깨닫고 위험하다 싶으면 알아서 말리겠지 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까 들은 쾅 소리는 이정이 차로 주차장 문을 들이받으며 난 소리였는지, 새롭게 단장한 주차장 문을 우그러뜨리고 처박힌 이정의 차가 보였다.
진짜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놈이네.
이제 겨우 집수리를 끝내고 오늘 집으로 돌아왔는데, 차를 주차장에 집어넣기도 전에 또 문제를 일으켜 놨다. 결국 수리한 주차장의 문은 작동 한번 해 보지 못하고 다시 교체될 운명에 놓였다.
한숨을 내쉬는데 골목 안으로 줄줄이 들어온 세단이 코앞에 멈춰 서며 정장 차림의 사내들이 재빠르게 내려 다가왔다.
“도련님. 부회장님은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다가온 남자가 이정의 목을 쥐고 있는 이환에게 말했다.
“일 제대로 안 하지.”
“죄송합니다.”
“다음에 또 보이면 진짜 죽인다.”
“……죄송합니다.”
죽인다는 대상이 이정인지 아니면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한 남자들인지는 모르겠으나, 찾아온 정장 남자들은 그저 고개를 수그릴 뿐이었다.
“데려가.”
내던지다시피 거칠게 놓아준 이정의 몸뚱이가 흔들렸다. 곁에 있던 사내가 이정을 부축하자 그가 “이거 놔.” 하고 진저리를 치며 사내를 떠밀었다.
“이러시면 회장님께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부회장님.”
“이 개새끼가.”
노기를 참지 못한 이정이 사내의 뺨을 철썩 갈겼다.
“주는 돈 받아먹는 것밖에 못 하는 새끼들이 감히 누구한테 협박이야. 건방진 새끼들.”
저런 태도를 보면 확실히 지배자로 키워진 사람다웠다. 누구도 제 위에 자리할 수 없고, 모두가 제 발밑에 있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 날 때부터 지배 계급으로 태어나 자라 온 사람. 제 말 한마디에 세상이 바뀐다고 믿는 사람.
“뭐 해? 모셔.”
“이 새끼들이…….”
그런 사람이 이제는 정장 남자들에게 붙잡혀 거의 연행되듯 끌려가고 있었다.
그의 머리 위에 자리한 회장님의 존재를 망각한 불찰인지도 모르겠다.
“이거 안 놔? 놔, 이 새끼들아.”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격하게 반항하는 이정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그러면서도 단호하게 끌고 가 차에 밀어 넣은 남자들이 우리 쪽으로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재빠르게 차에 올랐다.
누가 보면 한낮에 부촌 동네에서 납치 사건이 일어났다고 오해할 법한 모습이었다.
“남이 볼까 무섭다는 말이 이런 상황에 쓰는 말인가 봐요.”
마지막으로 이정이 끌고 왔을 차에 정장 남자 한 명이 올라타 후진을 하자 움푹 우그러진 주차장 문이 드러났다. 줄지어 골목을 빠져나가는 검은색 세단의 꽁무니로 찌그러진 이정의 차가 따라붙었다.
어휴, 하며 육성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저분은 대체 왜 온 거예요.”
올 거면 얌전히 올 것이지, 남의 집 주차장 문은 왜 부숴 놓고.
정작 와서는 멱살 한 번 잡힌 게 전부이고, 별다른 용건도 없이 끌려갔다. 등장만큼이나 요란하고 빠른 퇴장이었다.
“설마…… 납치는 아니겠죠?”
너무 당당하게 데려가긴 했는데, 억지로 데려가는 걸 보면 거의 납치 수준이지 않나.
“아버지가 붙여 놓은 사람들일 겁니다.”
“그럼 주차장 부숴 놓기 전에 막았어야지. 애먼 주차장 문만 부서졌어요.”
시무룩하게 말하자 이환이 내 어깨를 끌어안고 토닥거렸다.
“아버지한테 청구하면 되니까 걱정 말아요.”
“겸사겸사 집 수리비도 같이요.”
“그럴까요?”
“당연하죠. 회장님이 부회장님을 감싸기로 하셨으니까, 당연히 손해 비용도 회장님이 대셔야죠. 꼭 받아 내세요. 이건 돈의 문제가 아니라 책임의 문제예요.”
나도 그렇지만 이환도 그럴 생각은 안 했나 보다. 이 중요한 책임 소재를 그냥 넘기려고 했었다니. 이런 문제일수록 깔끔하게 정리해야 하는데.
강력한 주장에 이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골목을 빠져나가는 차의 행렬을 가만히 보고 있던 이환이 입술을 달싹였다.
“이정이 많이 조급한 모양이네요.”
“부회장님이요?”
내 물음에 이환이 고개를 돌려 나를 내려다보았다. 어둡게 침잠한 까만 눈동자가 지금만큼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되지 않았다.
“조만간 결론이 날 겁니다.”
“결론……이요?”
“이정은 인내를 배우지 못했거든요.”
원하는 건 즉시즉시 손에 들어왔을 테니 인내할 필요가 없었겠지만, 그 이야기를 지금 하는 이유는 뭘까.
“또 찾아오실까요.”
부회장님이요.
이런 극적인 등장은 이제 그만 경험하고 싶은데.
약간의 불안이 담긴 물음에 이환이 고개를 내저었다.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그러면 알아서 끝날 거예요.”
피해자가 가만히 있는데 어떻게 끝나지. 그냥 참고 감내하라는 뜻인가. 이환이 그렇게 말할 사람은 아닌데.
하지만 평온하고 고요한 그의 음성을 듣고 있노라면, 그의 말처럼 어느 순간 일이 잘 마무리되어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실장님이…… 더는 위험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럴 겁니다. 이번 위험은 다른 사람에게 향할 것 같거든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한 이환이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집 안으로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