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튼 퓨리티-158화 (158/172)

158화

알고 있었나 보다. 찔끔한 표정을 감추며 ‘전혀 아닌데요. 저번에도 엄청 열심히 고민했는데요. 여전히 심도 있게 고민하고 있는데요.’ 하고 뻔뻔한 얼굴을 했다. 딱히 믿는 기색은 아니었다.

“프러포즈는 예상치 못한 순간,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하시겠다더니…….”

주택 양도 계약서와 혼인 신고서를 들이밀며 양자택일을 강요할 줄이야. 정말 예상치 못한 순간, 예상치 못한 방법이었다.

“이래야 둘 중 하나는 받아 줄 것 같아서요.”

그리 말하며 이환이 작은 케이스를 꺼내 내 눈앞에서 활짝 열어 보였다. 저 재킷 안주머니는 얼마나 사이즈가 큰지, 저 주머니 안에 또 무엇이 들어 있을지. 문득 상황에 맞지 않는 생각을 했다.

“해민 씨?”

“네?”

“청혼 반지를 앞에 두고 딴생각합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요…….”

뺨을 긁적이며 이환의 손에 들린 케이스를 보았다. 커다란 알이 박혀 있는 반지가 보였다. 유난히도 크고 투명한 보석이 빛을 받아 영롱하게 반짝였다.

저 보석이 무엇인지 듣지 않아도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질겁한 표정을 지으며 도장을 쥔 손을 엉덩이 뒤로 감추었다.

“그런 반응이라니, 조금 상처인데.”

보석 없는 실반지였으면 조금 고민했을지도 모르겠으나, 왕 다이아가 박힌 반지는 보자마자 거부감을 일으켰다.

“그건 정말 아닌 것 같아서요.”

“마음에 안 듭니까.”

“그런 반지를 어떻게 끼고 다녀요. 그거 끼고는 걸레질도 못 할 것 같은데요.”

“보통 이런 걸 끼고 걸레질을 하지는 않죠.”

맞는 말이라며 고개를 끄덕인다.

간단하게 긍정하지 말라고!

그런 반지를 들이민 본인을 반성하라고!

“일단 한번 껴 보기만 할까요.”

뒤로 숨긴 손을 달라는 이환의 손짓에 그래 볼까, 하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 건 그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일까.

아니다. 그동안 이환의 대가 없는 호의에 날이 서 있던 신경이 잠시 무뎌진 것뿐이지, 나는 원래 의심도 경계심도 많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현재, 강남 오피스텔과 대왕 보석 반지 앞에서 경계심은 최고조를 찍은 상태였다.

“맞는지 안 맞는지 사이즈만 확인해 봅시다.”

“안 맞아요.”

“저런.”

껴 보지 않아도 안 맞고, 맞아도 안 맞는 거다.

단호한 대꾸에 이환이 혀를 찼다.

“원래 프러포즈 반지는 이렇게 보석 박힌 거 받는 겁니다. 인터넷 검색해 봐요. 프러포즈 치면 다들 다이아 반지 받았다고 나오지.”

“…….”

“이거 끼고 다니라는 말 아닙니다. 이런 걸 불편해서 어떻게 끼고 다닙니까. 내가 또 해민 씨 불편한 모습은 못 보지. 이건 프러포즈용 기념 반지 같은 거고, 보통은 커플링 겸 결혼반지를 심플한 디자인으로 맞춰서 끼고 다니죠.”

“…….”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처럼 잔뜩 경계하는 나를 어르며 이환이 부드럽게 설명했다.

“정 걱정되면 커플링은 같이 가서 고를까요? 해민 씨는 어떤 디자인을 마음에 들어 하려나.”

“……보석 없는 거요.”

“아, 보석 없는 거. 그럼 그냥 금반지? 아니면 옥가락지 같은 건 어때요. 의외로 해민 씨의 심미안이 고풍스러울 수도 있잖습니까.”

“그 정도는 아니거든요.”

헛웃음과 함께 이환의 팔뚝을 때리며 타박하자, 그가 얼른 내 손을 붙잡아 약지에 반지를 끼워 넣었다.

“어디 보자. 사이즈는 딱 맞네.”

“불편해요.”

손에 쇳덩이를 달아 놓은 듯한 기분에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불평을 했다. 손가락을 움직이기에도 불편하고, 무게 때문에 손가락이 축 늘어진 기분이었다.

“원래 이런 건 보기 좋으라고 끼는 겁니다. 이렇게 해 봐요. 예쁜가 보게.”

손가락을 세워 팔을 앞으로 쭉 내미는 이환을 따라 하자, 그가 흐음 하고 목을 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기하네. 어떻게 손가락 하나까지 다 예쁠 수 있지.”

“아니에요.”

굳은살이 잔뜩 박인 손가락은 내가 봐도 예쁘다 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반짝거리는 보석 반지가 이렇게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구나 통감하며 반지를 빼내려 하자, 이환이 황급히 내 손을 꽉 붙잡았다.

“조금 더 끼고 있어요. 그거 주문 넣어서 받기까지 한 달이나 걸렸는데, 십 분도 안 끼고 있으면 반지가 슬프지 않습니까.”

이런 손가락에 자리하고 있는 게 반지에게 더 슬픈 일이 아닐까. 그리고 이렇게 무거운 반지를 끼고 있느라 내 손가락은 이미 슬퍼하는 중이었다.

“반지 받았으니까 이제 혼인 신고서에 도장 찍는 겁니다?”

“이건 그냥 한번 껴 보기만 하라고 실장님이…….”

끼워 넣은 거잖아요.

심지어 내가 낀 것도 아니고 이환이 우격다짐으로 착용시킨 것인데.

어이가 없어서 입술만 벙긋거리자, 그가 “여기에 찍으면 됩니다.” 하고 친절하게 도장 찍을 곳을 손가락을 가리켰다.

“천천히 읽어 보고 생각할게요.”

“이왕 서류도 준비되었고 도장도 가져온 김에 시원하게 찍읍시다.”

“서류에 도장 함부로 찍는 거 아니랬어요. 가지고 있다가 천천히, 한 열 번 정도 읽어 본 뒤에 판단할래요.”

“……열 번이나 읽어 본 뒤에 생각할 문제입니까. 보통은 바로 답이 나오지 않나.”

“바로 답해 드려요?”

“천천히 생각해요. 열 번 말고 스무 번 생각해도 됩니다.”

내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두렵다며 나중에 듣겠다고 이환이 손사래를 쳤다. 픽 하고 웃으며 서류를 차곡차곡 접어 봉투에 다시 넣었다.

“나는 반지 받고 감동해서 울면서 당장 혼인 신고 접수하러 가자고 할 줄 알았는데.”

“진짜요?”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기꺼이 받아 줄 거란 기대는 했습니다.”

“실장님, 양심이…….”

서류 두 장을 놓고 양자택일을 요구하면서 그런 기대를 하셨다니, 양심이 행방불명된 수준이 아닌가.

떫은 표정으로 바라보았으나 이환은 반성을 몰랐다.

∞ ∞ ∞

‘시간은 금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시간을 소중히 하라는 뜻일 텐데, 이환의 곁에 있다 보면 ‘시간은 금으로 살 수 있다’라는 뜻으로 느껴질 때가 종종 있었다.

침입자들이 빠루로 부순 발코니 유리창도 다시 달고, 고장 낸 대문과 주차장 문과 세이프 룸의 보안장치도 고치고, 난장판이 된 정원의 잔디도 손보고, 겸사겸사 인테리어까지 뜯어고치겠다더니. 그 많은 일들이 이 주일 만에 해결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게 가능한 일이었어요? 저는 못해도 한 달은 걸릴 줄 알았는데.”

“인부를 많이 부르고, 돈을 많이 주고, 동시에 일을 진행하면 됩니다.”

그러면 안 될 일이 없긴 하겠지.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방법이지만 선뜻 그것을 행할 사람은 없는, 돈지랄에 가까운 방식이라 문제이지.

“돈을 얼마나 쓰셨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집에 간다니 좋아요.”

“인력비를 두 배씩 준다고 해도, 호텔 숙박비를 생각하면 오히려 이득입니다.”

그러네. 호텔 숙박비를 생각 못 했네.

하루 숙박비를 정확히 아는 건 아니지만, 일반 객실도 아니고 엄청나게 넓은 호화 객실에서 머무르고 있으니 어지간한 비용은 아닐 터였다. 그것을 생각하면 확실히 돈 좀 더 주고 공사 기간을 줄이는 쪽이 이득일 수도 있겠다.

그냥 돈이 썩어 나게 많아서 펑펑 쓴다고만 생각했는데, 의외로 이런 계산도 하는 사람이었구나.

나는 새삼스럽게 감탄하는 눈으로 이환을 바라보았다.

“순간 감동한 얼굴인데, 왜인지 조금 미묘하네요.”

“미묘해요?”

“‘와, 실장님은 역시 일 처리가 빨라.’ 하고 감동하는 게 아니라 ‘이 사람이 그런 생각도 하다니.’ 하는 대견함에 가깝다고 할까.”

“…….”

눈치가 아주 귀신이다.

슬그머니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다행스럽게도 이환이 집요하게 지적하는 일은 없었다. 대신 그는 붙잡고 있던 내 손을 만지작거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기분이 좋네요.”

“호텔에서 지내기 불편하셨어요?”

“딱히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제껏 내 명의로 되어 있는 내 소유의 건물, 잠을 자는 곳, 잠시 들어와 옷을 갈아입는 장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곳인데 해민 씨와 함께 돌아갈 곳이라고 생각하니 뭐랄까. 묘한 안정감, 그리움 같은 게 느껴집니다.”

그걸 이제야 느꼈다니 오히려 새삼스럽다. 아니, 일상이 주는 안락함이기에 오히려 평소에는 쉽사리 느낄 수 없었으려나.

“아무리 궁궐 같은 곳에서 지내도 내 집만큼 편한 곳이 없대요. 그래서 사람들이 그렇게 집을 사려고 하나 봐요. 평생에 걸쳐 푼돈을 모으고도 부족해 대출을 받아서 집을 사고, 갑자기 돈벼락을 맞아도 집부터 사고. 그래서 다들 내 집 마련이 인생의 최우선 목표라고 하나.”

“해민 씨도 내가 준 서류에 도장만 찍으면 인생의 최우선 목표를 달성할 수 있습니다.”

은근히 주택 양도 계약서를 언급하며 얼른 도장을 찍으라고 종용하는 이환의 말을 무시했다.

“해민 씨는 어떤 기분입니까. 궁금하네요. 나와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있을지, 아니면…… 잠시 쉬었다가 다시 일터에 나가는 기분일지.”

이 사람은 아닌 척하면서도 눈치가 빠르다.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그랬다. 순한 얼굴을 하고, 맹한 짓을 하면서도 속에 숨겨 둔 것들을 잘도 찾아냈었다. 나보다 곱절은 많이 살았기 때문일까. 이런 게 열네 살 많은 어른의 연륜인가.

“어, 지금 뭔가 나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것 봐.

터지는 웃음을 꾹 참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실장님, 눈치 빠르신 거 알아요?”

“그렇다기보다는, 내가 해민 씨에게 온 신경을 쏟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해민 씨의 표정을 보면서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지금 기분이 어떠할지 계속 생각하거든요.”

“왜…….”

그냥 가만히 있어도 힘든 세상에 왜 그런 짓을 하고 있어.

그러지 말라며 손으로 얼굴을 감추자, 이환이 내 손을 붙잡아 끌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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