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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튼 퓨리티-157화 (157/172)
  • 157화

    말을 하면서도 내가 지금 무슨 개소리를 하고 있나 싶었는데, 대충 이해가 된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이환이 신기할 따름이다.

    “생활감이 느껴지지 않는 건, 아마 가재도구가 없어서 그럴 겁니다. 인테리어만 끝내 놨지, 실제로 생활에 필요한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잠시 앉자며 소파로 이끄는 이환의 손길에 따라 엉덩이를 내렸다. 몸이 아래로 쑥 꺼졌다. 소파가…… 생각보다 훨씬 더 푹신했다.

    “와, 깜짝 놀랐어요.”

    뒤로 나뒹굴어질 뻔하다가 등받이에 걸쳐 어정쩡하게 앉게 된 자세를 바로 하며 가슴을 쓸어내리자 이환이 웃음을 흘렸다.

    “소파가 너무 푹신해요.”

    “단단하거나 각 잡힌 소파가 아니라 최대한 쿠션감이 좋은 것으로 선택해 달라고 했거든요.”

    “거의 올 일도 없을 텐데…….”

    소파가 없어도 상관없었으리라는 내 말에 이환이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이곳이 해민 씨의 작은 동굴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작지만 해민 씨가 편히 쉴 수 있는 곳, 해민 씨를 편히 감싸 줄 수 있는 곳. 그래서 해민 씨가 어디에 눕거나 앉더라도 편안함을 느꼈으면 했습니다. 마음이 뾰족해지거나 움푹 파였을 때 이곳에 와서 쉴 수 있도록.”

    이환의 말을 증명하듯 침대만큼이나 크고 푹신하고 부드러운 소파였다.

    비록 전문가의 손을 거쳤다지만, 물건 하나하나 이환의 배려로 이루어진 공간이라고 생각하자 가슴이 따뜻하고 간지러워졌다.

    “어? 지금 엄청 감동받은 얼굴인데요.”

    “그 말만 아니었어도 엄청 감동받았을 텐데.”

    그 말을 듣는 순간 감동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려고 했다. 내 지적에 이환이 낄낄거리며 나를 꽉 끌어안았다.

    “구경만 시켜 주고 돌아가려고 했는데, 그냥 여기서 며칠 지낼까요?”

    “여기……에서요?”

    “좁으면 그만큼 바짝 붙어 있을 수 있으니까. 신혼부부 체험을 미리 해 본다는 의미로.”

    딱히 넓고 좁고의 문제는 아닐 듯싶은데.

    “그 넓은 호텔에서도 침실에서 딱 붙어 지내잖아요.”

    심지어 식사도 침대 위에서 할 거면서 뭐 하러 서재니 회의실이니 응접실이니 하는 공간이 포함된 객실을 빌렸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중에 들으니 그쪽은 백윤경과 경호원들이 머물고 있다고 했지만.

    아무튼 둘이 붙어 있는 거라면 호텔에서도 충분히 그러고 있었기에 특별히 끌리지 않았다. 심드렁한 내 반응에 이환이 힐끔 눈치를 보았다.

    “여기서 살 건 아니지만, 잠깐잠깐 머물러도 생활에 필요한 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당장 물 마실 컵도 없으니까요. 온 김에 기본적인 몇 가지는 사 두죠.”

    그러면서 휴대폰 메모장을 켠 이환은 “뭐가 있으면 좋을까요.” 하더니 먼저 말을 꺼냈다.

    “일단 컵하고. 밥 먹을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 수저도 있어야겠고. 혹시 모르니 밥그릇하고 접시도 몇 개 있으면 좋겠고.”

    “그렇게 본격적으로 마련할 건 아닌 듯싶은데요. 여길 언제 또 올지도 모르고.”

    “그러니까요. 언제 또 올지 모르니 미리 준비해 둬야죠.”

    이런 걸 두고 세상을 보는 다양한 관점이라고 하는 걸까.

    나와 다른 주장을 내세우는 이환을 빤히 바라보다가 어쩔 수 없이 끌려가 주기로 했다. 아닌 척하지만 은근히 상기된 듯 보인 탓이었다.

    저렇게 좋아하는데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줘야지.

    “침대 시트도 몇 개 더 있으면 좋겠고. 여름 이불과 겨울 이불도 미리 준비해 두면 좋을 듯하고.”

    문제라면 꼭 필요하다거나 가볍게 있으면 좋을 법한 범주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잠깐만요, 실장님.”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 쪽의 장을 열어 보았다.

    “이거 침대 시트 아니에요? 여분으로 몇 장 챙겨 두셨나 본데요.”

    “……그렇습니까?”

    “살펴보면 의외로 다 준비해 두셨을 수도 있어요. 무턱대고 사지 말고 좀 찾아봐요.”

    “그럴 리 없습니다.”

    “네?”

    “아, 아뇨. 정말 기본적인 인테리어만 부탁해서 아마 없을 거라고…….”

    등 뒤로 들려오는 이환의 말을 무시하고 주방의 찬장과 서랍을 열어 보았다.

    “와…….”

    “왜요?”

    “여기 냄비랑 프라이팬이랑 다 있어요. 컵이랑 수저도.”

    심지어 쓸 일이 없어 보이는 와인 잔까지 있었다.

    “전문가분이 진짜 신경 많이 써 주셨나 봐요.”

    “……그러게 말입니다. 쓸데없이.”

    등 뒤로 다가온 이환이 찬장 안을 살펴보며 혀를 찼다. 왜인지 못마땅함이 가득한 목소리에 힐끔 그를 돌아보았다.

    “따로 살 필요 없이 미리 다 준비해 주신 건데, 안 좋으세요?”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한 거 아닙니까. 해민 씨 취향도 생각해야지. 이건 월권입니다.”

    왜인지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닌 듯 느껴졌지만.

    투덜거리는 이환을 다독여 소파로 보내고 다른 서랍을 열어 또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기본적으로 필요한 건 다 있는 것 같아요.”

    이건 있으니까 지우고요, 이것도 지우고요.

    휴대폰 메모장에 기입한 것들을 지적하자, 이환이 살짝 토라진 얼굴로 메모장을 꺼 버렸다.

    “그런데 두 명이 산다고 생각하셨나 봐요. 죄다 두 개씩이던데요.”

    “……그렇습니까.”

    수저도 두 세트, 밥그릇과 국그릇도 두 세트, 와인 잔이나 머그잔 같은 것도 두 개. 여유분이나 손님용으로 두 개씩 준비해 두었다기엔 욕실에 구비되어 있던 칫솔도 두 개였다고 말하자 이환의 얼굴에 미묘한 웃음이 걸렸다. 매우 만족스러우면서도 그걸 들키고 싶지 않아 애써 참고 있지만 결국 실패한, 한마디로 요상한 표정이었다.

    “말하지도 않았는데 두 세트씩 잘도 준비해 놓다니, 역시 전문가답네요. 그럼 뭘 또 준비해 놨는지 한번 살펴볼까요?”

    아니, 나는 대충 다 살펴보고 왔는데?

    언제는 내 취향이 중요하다느니 월권이라느니 화를 냈으면서, 또 갑자기 태세를 전환하여 의욕적이 된 이환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직 오피스텔을 받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는데.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고 거절의 말을 꺼내기도 전에 무엇을 사네 마네 하면서 사람 정신을 쏙 빼놓더니, 어느 순간 내가 이 오피스텔을 받는 게 기정사실처럼 되어 버렸다.

    “실장님, 잠깐만요.”

    침실의 옷장 문을 열어 구비되어 있는 잠옷 두 벌과 샤워 가운 두 벌을 꺼내 살피는 이환을 불렀다.

    “구색만 맞춰 놓았나 싶었는데, 아무거나 가져다 놓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살펴보니 집에서 쓰는 제품과 같은 브랜드 물건이 많군요.”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요.”

    침대 시트며 잠옷을 들어 올려 본 이환이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오피스텔 받겠다고 말하지 않았는데요!”

    “이렇게까지 준비를 했는데?”

    “그러니까요. 너무 과하고 과분해요.”

    “전혀 과분하지 않습니다.”

    “그건 제가 판단할 문제죠.”

    “내가 예전에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건 주는 사람 사정에 맞추는 법이라고.”

    “아무리 그래도 이건…….”

    이환이 아니라면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과하다고 말할 수준의 선물이지 않을까.

    “그보다 해민 씨.”

    “네?”

    “내가 챙겨 오라고 한 건 챙겨 왔습니까.”

    “도장이요?”

    “네.”

    이유를 알지 못했으나 이환이 챙기라고 하기에 일단 챙겨 온 도장을 주머니에서 꺼내 보였다.

    “말도 잘 듣고 착해요.”

    자꾸 말을 돌리는 것 같은데?

    지적을 하기도 전에 나를 데리고 다시 소파로 돌아간 이환이 재킷 안주머니에서 서류 봉투 하나를 꺼냈다. 봉투 안에서 곱게 접힌 종이를 꺼내 펼쳐 보인 그가 “여기에 찍으면 됩니다.” 하고 말했다.

    “도장 막 찍는 거 아니라고 했는데.”

    “천천히 읽고 찍어도 됩니다.”

    미심쩍은 내 시선에 이환이 웃으며 종이를 건네주었다. 그것을 야무지게 손에 쥐고 천천히 읽어 보았다.

    주택 양도 계약서.

    자세히는 모르지만 도장을 찍으면 안 된다는 것은 확실히 알겠다.

    “내 명의로 두는 게 세금 문제도 그렇고 골치 아플 일이 적긴 하지만, 그러면 남의 집이라는 생각이 남아 있어서 해민 씨가 쉽게 드나들지 못할 듯해서요. 해민 씨 앞으로 돌려놓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에 도장을 찍으면 이 오피스텔을 받겠다는 뜻이 된다. 나는 도리도리 고개를 내저었다.

    “안 찍을래요.”

    “그러면 안 되는데.”

    “여기 도장 찍는 게 더 안 돼요.”

    종이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빼앗길 새라 도장을 두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정말 도장 안 찍을 겁니까?”

    “네.”

    “그럼 그거 말고 여기에 찍을까요?”

    이환의 재킷 안주머니에서 또 다른 봉투가 나왔다. 저 봉투 안에 들어 있는 건 또 무엇일까 순간 두려워졌다. 이환이 봉투 안에서 꺼내어 건네주는 종이를 떨리는 손으로 받아 들었다.

    혼인 신고서.

    “…….”

    “둘 중에 하나는 찍어야 합니다.”

    너무 극단적인 선택지였다. 어느 것 하나에도 찍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선택지이기도 했다.

    나는 눈으로 욕을 하며 이환을 바라보았다.

    “나랑 결혼할래요, 아니면 오피스텔 받을래요. 나, 아니면 오피스텔. 둘 중 하나는 받아야 합니다.”

    “…….”

    “도장도 챙겨 왔는데, 둘 중 하나에는 찍고 갑시다.”

    “아니, 이게 무슨…….”

    점심 메뉴 고르는 것도 아닌데 왜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해. 짜장면 짬뽕 고르는 것도 아니고, 물냉면 비빔냉면 고르는 것도 아니고. 점심 메뉴는 고민할 시간이라도 주지. 마음의 준비나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턱대고 서류부터 들이밀면 어쩌란 말인지.

    “생각해 볼게요.”

    “그 말은 저번에도 들은 것 같은데.”

    “조금만 더 생각해 볼게요.”

    사실 그렇게 말하고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살짝 양심이 아팠다. 하지만 일단은 지금의 상황을 넘겨야 하기에 똑같은 변명을 댔다. 이번에는 진짜 진지하게 고민을 해 봐야겠다는 반성도 함께 했다.

    “진지하게 고민해 줄 겁니까?”

    “네.”

    “저번처럼 상황을 모면하려고 생각해 보겠다는 핑계만 대고, 그 뒤로는 잊어버리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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