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튼 퓨리티-155화 (155/172)
  • 155화

    “이정 부회장님이 아니더라도, 세이프 룸이 있으면 위험한 일은 없을 것 같아서요.”

    세이프 룸이 뭔지 모르던, 아니, 세상에 그런 것이 있는지조차 모르던 상황에서도 이제껏 잘 살아왔지만. 돈 나올 구석이 없기에 강도나 납치범들도 피해 갈 법한 가난뱅이지만. 이환 이정 형제와 얽힌 뒤로는 상황이 달라졌다.

    가난뱅이인 것은 여전하나 언제 어느 때에 어떻게 폭주할지 모를 ‘이정’이라는 존재가 나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잃을 게 없으니까 괜찮아.’ 하며 칠렐레팔렐레 돌아다닐 수는 없다. 가진 재물이 없어도 목숨은 소중하니까. 그러니 이환에게만 맡겨 두지 말고 나 스스로도 경각심을 가지고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형이 밉네요.”

    “네?”

    내 머리에 뺨을 기대고 있던 이환이 웅얼거리며 말했다.

    “해민 씨가 안전하다 느끼지 못하고 걱정을 하게 만든 이정이 밉습니다. 확 가서 죽여 버릴까요. 그럼 해민 씨가 안전하다고 느낄 테니까.”

    “……안전합니다. 안전해요. 안전하니까 지금 당장 누굴 죽이겠다거나 하는 생각은 하지 마세요. 그게 더 안전하지 않아요!”

    놀라서 빽 소리를 지르자 이환이 흐응, 하고 못마땅한 소리를 냈다.

    “진짜로요. 세이프 룸은…… 그냥 예방 차원에서 있으면 좋지 않나. 지금은 안전해졌으니까 필요 없지만 어차피 일회용도 아니고 이왕 존재하는 거, 없는 곳으로 이사하는 것보다는 세이프 룸이 있는 지금 저택이 더 낫지 않나 싶은 생각에 말씀드린 거예요. 부회장님은 회장님이 잘 잡아 두실 거라면서요.”

    혹시나 이환이 다른 생각을 품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얼른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실장님이 지켜 주실 거잖아요.”

    “…….”

    “앞으로도 쭉 지켜 주실 거잖아요.”

    아니, 왜 갑자기 답이 없어. 이런 상황에서는 즉각 답이 나와야지.

    이환의 얼굴을 보려고 몸을 돌리려 할 때, 그가 내 몸을 꽉 끌어안고 둥개둥개 흔들었다.

    “당연합니다.”

    그런 건 빠릿빠릿하게 대답하라고. 사람 불안하게 만들지 말고.

    “앞으로 계속, 쭉, 영원히 지켜 줄 겁니다.”

    “영원할 필요는 없고요.”

    그건 좀 부담스러워서 거절하고 싶다.

    점잖게 사양했으나 왜인지 기분이 좋아진 이환에게는 닿지 않았는지, 그는 그 뒤로도 ‘평생, 죽을 때까지, 죽어서도, 영혼이 되어서도.’ 같이 무서운 소리를 지껄였다.

    “그럼 이번 기회에 싹 밀어 버리고, 비밀 통로랑 비밀 공간을 여기저기 추가해서 새로 지을까요?”

    “……네?”

    뭘 밀어요?

    꽉 끌어안고 있는 팔을 풀어내고 겨우 몸을 돌렸다. 가랑이 사이에서 빠져나간 거시기의 끝이 이제는 배를 꾹꾹 찔러 댔으나 모른 척하며 이환을 바라보았다.

    “집을요?”

    “네. 해민 씨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는 집이면 더 좋지 않겠습니까.”

    “지금도 충분히 안정감을 주는데요.”

    “어느 정도 예상했고 대비하고 있었다지만 그건 내 사정이고, 해민 씨에게는 생각지도 못했던 한낮의 침입 사건이잖아요. 그 집에서 계속 머문다면 생각하고 싶지 않아도 문득문득 떠오를 테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불안한 마음이 생겨나겠죠. 나는 해민 씨가 그런 기분을 느끼는 게 싫습니다. 해민 씨에게 편안하고 안락하고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집을 주고 싶어요.”

    “…….”

    집이라는 건 뭘까.

    밖에 나갔다가 돌아올 수 있는 곳.

    몇 시간, 혹은 며칠을 밖에서 떠돌아도 결국 돌아오게 되는 곳.

    다른 사람들에게 치이고, 일 때문에 힘들고, 이런저런 사정으로 경계하고 잔뜩 긴장했던 몸과 마음을 유일하게 편히 내려놓을 수 있는 곳.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 눈치 보지 않고 실컷 웃고 울 수 있는 곳.

    모두에게 내쳐져도 유일하게 나를 보듬어 줄 수 있는 곳.

    늘 변함없이 나를 맞이해 주는 나만의 낙원.

    그리고 내게는…… 언제나 원했으나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한 꿈과 같은 장소.

    꿈은 꿈일 뿐이기에 이룰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환은 그 꿈을 내게 주고 싶다 말하고 있었다.

    편안하고 안락하고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낙원을.

    “저 지금 좀 감동했어요.”

    이환의 목을 포옥 끌어안고 어깨에 이마를 기대며 속삭였다.

    “그럼 결혼할까요?”

    틈새를 공략하듯 슬그머니 묻는 목소리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조금 더 생각해 보고요.”

    이환이 안타깝다는 듯 아, 하고 탄성을 흘렸다.

    ∞ ∞ ∞

    중간에 이런저런 일이 있어 두 달 만에 찾아간 엄마는 마치 혼자 두 달이 아닌 이 년의 시간을 보낸 것처럼 눈에 띄게 기력이 쇠한 모습이었다. 이제는 패악을 부릴 힘도 남아 있지 않은지 무기력하게 침대에 누워 숨을 쉴 때마다 끄륵끄륵 소리가 났다.

    저번에 병원을 뛰쳐나갔던 이후로 눈에 띄게 잠잠해지더니, 잠깐의 변화가 아니라 쭉 지속되고 있는 모양이다. 이렇게 점차 악화되는 것 또한 예정된 과정이겠지.

    배뇨 실수야 예전에도 종종 있었던 일이지만, 이제는 화장실도 가지 않고 침대에 누운 상태에서 볼일을 봐 버린다고. 그래서 성인용 기저귀를 항시 착용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지난번에 들었다. 슬쩍 엄마의 허리춤을 확인하자 속옷 대신 맨질맨질한 일회용 기저귀가 만져졌다.

    “나는…… 엄마가 평생 정정할 줄 알았어.”

    눈동자가 어지러이 흔들리지만 나를 보고 있지는 않았다. 목표를 잃고 방황하는 시선 속에는 언제나처럼 내가 없었다. 엄마는 변해 가고 있었지만 변하지 않는 것도 있었다.

    “치매에 걸렸어도 엄마는 똑같았잖아. 여전히 괄괄하고, 여전히 나를 때리고, 여전히 힘도 좋고. 평소랑 치매에 걸렸을 때랑 다름이 없어서, 그래서 문제가 생겼는지도 나중에 알아차렸지만. 단 한 번도 힘없이 누워 있는 엄마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너무 낯설다.”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엄마의 손등을 덮었다. 말라비틀어진 동물의 가죽처럼 살은 없고 거칠고 질긴 살가죽만 만져졌다.

    “지금 보니까 엄마도 많이 늙었네. 아파서 그런가, 더 늙어 보여. 누가 보면 오십이 아니라 육십, 칠십 먹은 노인네인 줄 알겠다. 그래도 예전에는 파마도 하고, 립스틱도 바르고, 가끔 꾸미기도 했었잖아.”

    그렇게 꾸미고 나가서도 술을 마셨지만.

    엄마의 모습은 두 가지였다. 집에서 거지꼴로 술을 마시거나, 꾸미고 나가서 술을 마시거나. 어느 순간부터 엄마의 모습은 항상 그러했다.

    “그거 알아요? 엄마는 잠꼬대도 욕이었어. 그래도 자면서 때리지는 않으니까, 엄마 잘 때가 제일 편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나마도 엄마가 자다 깨 버리면 기분 나쁘다고 또 때렸잖아. 한 번도…… 안심하면서 자 본 적이 없어.”

    주먹질에, 발길질에 자다 깬 적이 수도 없이 많았다. 잠을 자는 시간만큼은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였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마저도 안심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엄마가 언제 일어나 내게 화풀이를 할까 긴장하여 최대한 몸을 웅크리고 새우잠을 잤었다.

    “항상 지옥이었어. 엄마를 벗어나고 싶었어. 그런데 막상 혼자가 될 생각을 하니까 무서운 거야. 애초에 혼자가 아니었던 적도 없었으면서. 바보같이 그걸 인정하지 못했어. 나는 항상 혼자였는데.”

    아무 도움도 되지 않고 내게 악영향만 주는 여자도 엄마라고, 가족이라고. 세상과 나를 이어 주는 끈처럼 생각했다. 엄마가 없으면 홀로 견뎌 낼 수 없을 것처럼 세상이 너무나 커 보였다.

    정작 세상으로 떠밀려 나온 뒤에 알았다. 엄마라는 여자가 나와 세상을 단절시키고 있었다는 걸. 내가 오롯이 설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는 걸. 한쪽 발에 엄마라는 족쇄를 차고, 나머지 한 발로 선 나는 절름발이였다.

    “나는 아직도 후회해요. 엄마를 일찍 끊어 냈어야 했는데. 최악을 보기 전에, 그나마 어린 시절의 좋은 기억이라도 남겨 뒀어야 했는데. 너무 늦어서…… 엄마한테 다 빼앗겨 버렸어.”

    원망스러웠다.

    엄마가 일을 하지 않고, 돈을 벌어 오지 않고, 나를 돌보지 않는 것은 괜찮았다. 하지만 엄마가 나의 어린 시절 그나마 좋았던 기억들까지 퇴색되게 만들었다는 것은 슬펐다.

    아버지를 의식해서였을 테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괜찮았던 엄마는 사라졌다. 술에 취해서 나를 때리고 욕을 쏟아 내는 악귀만 남아 버렸다.

    “왜…… 나를 낳았어. 아버지를 가질 방법이 정말 그것뿐이었어요? 나도 사람인데, 왜 나를 도구로 낳았어.”

    “……미아안.”

    말라붙은 입술이 달싹이며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잘못 들은 거라고, 내 착각이라고, 환청이라고 부정했으나 그 희미한 목소리는 내 기대를 깨부수고 다시 들려왔다.

    “미아내…….”

    “미안해?”

    엄마가, 미안하다고, 나한테.

    일순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엄마가 미안하다는 감정을 알아? 누구한테 미안한데. 뭐가 미안한데.”

    “……미아……내.”

    초점 없는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여전히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괜찮아요.”

    엄마의 손을 꽉 붙잡았다. 뼈만 남은 앙상한 손이 마치 나뭇가지처럼 느껴졌다.

    “사과하지 말아요.”

    이렇게 엄마의 손을 잡아 본 게 언제였을까. 어느 순간 모자간의 접촉은 폭력이 전부가 되어 버렸다. 엄마가 내게 닿아 오는 건 나를 때릴 때뿐이었다. 울고, 빌고, 애원해도 엄마는 내 손을 잡아 주지 않았다.

    “진심이 아니라는 거 아니까. 엄마는 누군가에게 미안해할 사람도, 사과할 사람도 아니잖아. 설사 진심이라고 해도,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덜렁 던져 놓고 마음 편하게 죽는 꼴 못 봐. 사과하지 말아요. 사과 한마디로 풀기엔, 내가 너무 많이 망가졌어.”

    엄마의 손을 꽉 붙잡고 손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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