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튼 퓨리티-153화 (153/172)

153화

“나랑 같이 있는 게 싫습니까?”

“싫은 건 아닌데요.”

“싫지는 않지만 좋지도 않다?”

뭘 또 그렇게까지.

“아뇨, 좋아요.”

내 대답에 토라진 양 얼굴을 돌리고 있던 이환의 입술 끝이 살짝 말려 올라가는 게 보였다.

“크흠.”

본인도 통제 상태에서 벗어난 입술을 느꼈는지 이환이 멋쩍게 헛기침을 했다.

“좋은데요. 그래도 24시간, 화장실 갈 때에도 붙어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서요. 그리고 실장님이라면 그런 상황을 두고 보셨을 것 같지도 않고요.”

“나를 믿는 겁니까?”

“네.”

이환을 믿었다. 이환의 성격을 믿었다. 내게는 마냥 다정하고 친절하지만, 제 아버지와 형을 대할 때 보였던 냉정함과 냉소적인 그의 태도를 떠올려 보면 지금의 상황에서 ‘어쩔 수 없구나.’ 하고 가볍게 넘어갈 사람이 아님을 믿었다.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던 이환의 어깨가 십 센티 정도 올라간 듯했다.

“아버지를 잘 협박하고 왔습니다. 여전히 이정에게 진실을 말해 줄 생각은 없겠지만, 더 이상 ‘다음’은 없음을 느끼셨을 테니 이정을 적절하게 컨트롤할 겁니다.”

“협박이요?”

“아니, 대화.”

말실수를 했다는 듯 황급히 단어를 정정했으나 이미 의심의 싹이 피어오른 뒤였다.

“정당한 대응이라고…….”

“네, 정당한 대화.”

“정당한 협박이 아니고요?”

“나 믿는다면서요. 그 믿음 어디 갔습니까.”

그 믿음, 있었는데 없어졌습니다.

내 의심 어린 눈초리에 이환이 억울하다며 눈썹을 늘어뜨렸다.

“부회장님이 납득하실까요. 말로 설득하는 것과 화내며 혼내는 게 다르긴 하지만, 생각해 보면 크게 다를 것도 없잖아요. 회장님이 부회장님을 때려서 혼내실 것 같지도 않고, 부회장님이 때린다고 말을 들을 나이도 아니고. 크게 달라질 게 있을까 싶어요.”

역시 지금까지처럼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여 외출을 자제하거나 이환의 말처럼 24시간을 붙어 있어야 할까.

한숨을 포옥 내쉬며 하는 말에 이환이 슬금슬금 내 눈치를 보았다. 할 말은 많지만 차마 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얼굴이었다.

“나는, 해민 씨에게 착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요. 착한 사람, 좋은 사람, 의지할 수 있는 사람.”

“충분히 착하고 좋은 분이에요, 실장님은. 많이 의지하고 있어요.”

“내가 만약에…… 형을 죽기 직전까지 패고, 아버지에게 형의 목숨으로 협박했다면…….”

이환이 왜 선뜻 말해 주지 못하고 망설였는지 이해가 되었다.

“패셨어요?”

“가정입니다. 가정해서 묻는 거죠.”

내 물음에 이환이 황급히 덧붙였다. 아니라고 부정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상황을 파악해 버렸지만.

“‘아무나’ 패고 다니시는 건 아니죠? ‘형’만인 거죠?”

“네.”

“그럼…… 괜찮지 않을까요. 아니, 괜찮다기보다는 어쩔 수 없다? 되도록 대화로 상황을 풀어 나가면 좋겠지만, 이정 부회장님은 대화가 통하는 상대도 아니고. 실장님이 회장님에게 그만두겠다고 말한 뒤로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여전하시잖아요. 여전한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위험한 짓을 벌이시고.”

“그렇습니까?”

힐끔거리며 눈치를 보던 이환의 얼굴이 확 펴졌다.

“말로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면 주먹으로……. 아니, 이건 좀 폭력적인데. 그래도 실장님 집안 문제니까 실장님도 생각이 있으셨을 거고. 사실 이정 부회장님을 마주하고 있으면 저도 가끔은 울컥울컥하고 주먹이 불끈 쥐어질 때도 있고. 실장님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그래요.”

“그 인간이 사람의 폭력성을 깨우는 데에 능력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맞을 짓, 맞을 소리만 골라 한다는 뜻이었고, 나는 그 말에 격하게 동의했다.

“이정이 맞아서 정신을 차릴 놈은 아니지만, 적어도 아버지는 상황의 심각성을 느끼셨을 테니 지금까지처럼 이정을 마냥 풀어놓지는 않으실 겁니다.”

“……부회장님이 죽을까 봐서요?”

정말 이정을 죽일 마음이 있는 거냐고, 아니면 그냥 협박일 뿐이냐고.

입에 내지는 않았으나, 이면에 숨어 있는 의미를 알아차렸는지 이환은 내 눈을 빤히 바라보다 싱긋 웃었다.

“사실, 나는 괜찮아요. 조금 귀찮고 번거롭지만 그게 전부일 뿐이니까. 하지만 해민 씨를 건드린다면 나는 아주 화가 날 겁니다. 이미 그 새끼가 건드렸고, 나는 화가 났지만. 경고를 했는데도 또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진짜로, 아주 많이 화가 나겠죠.”

“…….”

“하루에도 몇 차례씩 일어나는 살인 사건의 불씨가 얼마나 사소한 감정싸움에서 시작되는지 압니까? 들으면 겨우 저런 일로 사람을 죽여? 하는 말이 나올 겁니다. 의외로 살인을 저지르는 데에 거창한 이유는 없습니다. 하물며 소중한 사람을 건드린다면 백 퍼센트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까요.”

죽일 각오로 협박을 했다는 뜻이구나.

때로는 명확하게 듣지 않아도 그 의미를 알게 되는 순간이 있다. 지금이 그러했다.

본인을 위해서가 아닌 나를 위해서 부모와 등지고 형제를 죽일 생각까지 했다는 이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조금 놀랍고 또 조금은 경악스러우면서도 조금은 감동적이기도 했다. 나를 위해서, 나에게 위해를 가하는 사람을 향해 죽이겠다 말해 줄 이가 또 어디 있을까.

“그래도 죽이지는 마세요.”

“내가 무섭습니까.”

“그게 아니라……, 사람을 죽이면 아무리 재벌 2세라고 해도 감옥에 갈 테니까. 이정 부회장님이 아니라 실장님을 위해서 죽이지는 마세요.”

어설픈 설득에 작은 웃음소리가 돌아왔다.

“나 걱정하는 겁니까?”

“네. 지금 상황에 이정 부회장님을 걱정하지는 않죠.”

“그래요. 해민 씨 두고 감옥에 갈 수는 없죠. 죽지 않을 정도로만 손을 쓰겠습니다. 그보다 더 좋은 건 이정이 해민 씨 근처에 얼씬도 안 하는 거고요.”

“지금 실장님의 각오를 회장님에게 보여 드리고 왔다니, 앞으로 부회장님 만날 일은 없을 것 같은데요.”

그렇게 아끼는 장남이 차남 손에 세상 하직하는 일을 보지 않으려면 회장님이 고생 좀 하셔야지.

“저 자는 동안 고생하셨습니다.”

누구는 편하게 쿨쿨 잠만 잤는데, 누구는 그사이에 사람도 때리고 협박도 하고 아주 바쁘게 움직이셨다.

내 인사에 이환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고생이야 몇 번이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오늘 같은 일이 또 일어나서는 안 되겠지만요. 오늘 일을 생각하면 내가 해민 씨에게 많이 미안합니다. 미친놈을 가족으로 둔 내 탓이에요.”

“그게 왜 실장님 탓이에요. 이정 부회장님 본인 탓이고, 자식 관리 못한 회장님 탓이지. 회장님은 부모 교육을 받으셨어야 했어요.”

요즘은 부모들도 아이 낳기 전부터 부모 교육을 받는다던데. 아이를 어떻게 양육할 것인지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고민한다던데.

대기업 회장님이라는 사람이 말이야, 자식을 어쩜 그렇게 막 키울 수 있느냔 말이야. 아니, 재벌 회장님이라서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키운 건가. 못 해줄 것이 없으니까?

그럴 거면 자식들을 죄다 막 키우든가. 왜 장남하고 다른 자식들하고 차별해. 이환이 차남으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이정보다 부족한 구석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이정보다 회장님에게 더 화가 난다.

뒤늦게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씩씩거리는 사이 도착한 식사를 이환이 가져왔다.

“그만 씩씩거리고 식사해요. 좋지 못한 사람들 생각은 그만하고. 그러다 체합니다.”

음식이 담긴 트레이를 내 무릎 위에 올려 주며 이환이 말했다.

죽과 몇 가지 곁들임 반찬이 전부인 간소한 상이었다. 이환이 나를 아픈 사람 취급하는 건지, 아니면 밤늦은 시간이라 가볍게 먹게끔 선택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폭풍이 순식간에 지나간 기분이에요. 뭔가 정신없었고, 정작 정신을 차리니 실장님이 다 해결했다고 하셔서.”

성둥성둥 잘라 넣은 전복과 곱게 간 쇠고기가 듬뿍 들어간 죽은 비린 맛도 없이 고소하기만 했다. 숟가락으로 크게 떠서 삼키며 배를 채웠다. 입이 즐거운 음식이었으나, 음식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허한 기분을 느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름 치열했습니다.”

“혹시…… 때리면서 맞으신 거예요?”

걱정스러운 내 물음에 이환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주먹이 오가고 피가 흐르는 난투극이었습니다. 해민 씨가 보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다친 곳은 없어요? 코피 나신 거예요?”

놀라 숟가락을 툭 떨어뜨리자 이환이 지금은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고 어서 식사 마저 하라며 숟가락을 쥐여 주었다.

“봐요. 어디 상한 곳 있나.”

그릇에 숟가락을 던지듯 내려놓고 이환의 얼굴을 붙잡아 이쪽저쪽으로 돌려 보았다. 뽀송뽀송한 피부도 멀쩡하고, 오뚝한 콧날도, 붉은색의 맵시 좋은 입매도 멀쩡하다. 멍이나 긁힌 자국 하나 보이지 않는 것을 두 번, 세 번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다행히 상한 곳은 없는 것 같아요.”

“잘생긴 얼굴에 흉지면 해민 씨가 슬퍼할 것 같아서, 얼굴만큼은 사수했습니다.”

잘생긴 얼굴이라니. 본인 입으로 본인 얼굴을 그렇게 판단하다니, 좀 당황스럽다. 물론 잘생기긴 했지만. 누구도 이견을 낼 수 없는 얼굴이라 생각하며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이환의 어깨가 들썩했다.

“안 보이는 곳이 좀 아픈 것 같습니다.”

“안 보이는…… 곳이요?”

“배도 좀 아픈 것 같고, 허리도 아픈 것 같고…….”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 법한 재벌 2세들이 남들이 알아차리도록 얼굴을 때리지는 않았겠지. 보이지 않는 곳만 골라 가며 지능적으로 때렸을 수도 있다. 간사하고 악독한 이정이라면 그랬을 가능성이 아주 컸다.

그 자식이 초등학생인 동생에게 했던 일을 떠올려 보면, 그 어떤 악독한 짓을 저질렀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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