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페로몬이 짙은 알파란 본디 그렇다. 페로몬이 짙으면 짙을수록 자기중심적이 되어 간다. 남과 나를 분리하는 경계가 깊어지고, 심할 경우 가족 또한 남에 포함된다. 태어나길 알파로 태어나 그 누구보다 짙은 페로몬을 가진 이환은 지극히 이성적이고 지능적이며 개인주의적이었다.
한껏 날이 서 있는 지금의 이환을 건드린다는 것은 이쪽도 크게 피를 볼 각오를 하지 않고서야 선뜻 행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수한에게 무엇이 가장 소중한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이환은 공격받았다고 판단하는 즉시 어떤 식으로든 SG에 흠집을 내고 그 상처를 있는 힘껏 찢어 벌릴 것이 분명했다.
이수한이 원하는 건 누구보다 뛰어난 후계자가 아니었다.
남에게 뒤처지지 않고, 적당히 뛰어나고, 적당히 말을 잘 듣는 자식이다. 이정은 그에 딱 부합하는 자식이었다.
있는 집 자식으로 태어나 사람을 부릴 줄 알고, 적당히 머리도 좋았으며, 적당히 냉정하고, 가면을 쓰고 사람을 대하는 이중성도 지녔다. 좋은 피를 타고 태어났고, 알파로 발현하여 우수종이 되었다. 육체는 더 단단해졌고, 머리는 더 우수해졌다.
이정의 모든 것이 부품 하나하나 손으로 설계하여 짜 맞춘 듯 완벽한 후계자라고 생각했다.
“일어나 앉아라.”
그사이에 기절이라도 했는지 미동도 없는 몸뚱이를 발로 툭 건드리며 말했다. 서서히 정신이 돌아오는지 이정이 바닥에서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일어나 앉아!”
힘없이 쓰러져 있던 장남은 비척거리며 바닥을 기어 소파에 올라가 앉았다. 형편없이 망가진 얼굴을 바라보며 이수한이 혀를 찼다.
“네가 지금까지 환이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안다.”
“아버지. 그건 환이를 위해서였습니다.”
입안이 터졌는지 몇 마디 말을 하는 와중에 입술을 오물거리며 인상을 찌푸린다. 그마저도 오늘따라 못나 보이기만 했다.
바꿔야 했을까.
싹이 노랗게 보인다 싶었을 때 솎아 내야 했을까.
그동안 키워 온 노력이 아까워 뽑아내지 못한 것이 실책이었나.
아니, 아니다.
이정보다 적당한 대체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컨트롤할 수 없는 차남은 애당초 후보에 올릴 생각조차 없었고, 다른 쌍둥이는 알파도 오메가도 아닌 베타였다. 누구보다 훌륭한 싹이 있는데, 그보다 못한 싹에 공을 들일 이유가 없지 않은가.
“환이의 꿈을 지켜 줘야죠. 그게 환이를 위한 일입니다.”
“네가 했던 일을 환이가 안다.”
“……. 일 처리가 미흡했어요. 한 실장이 일을 지저분하게 처리한 탓입니다.”
“적절하게 사람을 부리는 것도 네 능력이지.”
“앞으로는 환이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할 겁니다.”
“하지 마.”
“아버지!”
“환이에게 신경 쓰지 마. 관심 가지지 말고, 시선도 주지 마라. 건드리지 마. 오늘같이 개처럼 끌려다니고 싶으냐? SG 그룹 부회장이라는 놈이, 앞으로 회장 자리에 오를 놈이 제 동생에게 개처럼 처맞고 멱살 잡혀 돌아다니는 사진이 퍼졌으면 좋겠어! 회사에 먹칠하라고 내가 너를 그 자리에 두는 줄 알아!”
“하지만 아버지.”
퉁퉁 붓다 못해 푸르스름하게 멍이 올라오는 얼굴을 찌푸리며 이정이 말을 끌었다.
“환이가 요정님을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요정이 없다는 걸 알면 얼마나 실망하겠어요. 걔는 지금까지 산타클로스도 믿는 놈이라고요. 환이를 지켜 줘야 합니다.”
“환이는 분명하게 거절하고 갔다. 그러니 너도 오늘 이후로 환이에게서 손 떼. 네가 조금이라도 환이에게 관심을 보이면, 그 녀석이 이를 드러낼 거다. 오늘은 내가 무마시켜 돌려보냈지만, 다음에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다. 환이를 이길 자신이 있다면 네 멋대로 해. 그게 아니라면 환이는 더 이상 신경 쓰지 말고 회사 일에만 집중해라.”
“아버지.”
“정아. 아비가 선택지를 주마. 환이든 회사든 하나만 선택해.”
“……아버지?”
이제껏 단 한 순간도 후계자 자리에서 밀려난다는 생각을, 일말의 의심조차 해 본 적 없던 이정은 이수한의 말에 당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목숨을 걸겠단다. 네가 다시 일을 벌인다면, 그때는 네가 죽든 제가 죽든 둘 중 하나라고 말하고 갔다. 나는 언제 죽을지 모를 자식을 후계자로 둘 생각 없다. 다른 녀석들에게 후계자 교육을 시키기엔 늦은 감이 있지만, 더 늦기 전에 지금이라도 시켜야겠지. 수희라면 욕심이 많으니 잘 따라올 거다. 그러니 선택해.”
다른 자식들은 안중에도 없었으나 이정을 설득하려면 없는 말이라도 해야 했다. 이런 엄포도 먹히지 않는다면, 정말 이환의 말처럼 목줄이라도 매어 두는 수밖에 없다.
이수한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이정을 쏘아보며 대답을 요구했다.
제 생각처럼 일이 풀리지 않는 상황에 이정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입술을 앙다물었다. 꽉 힘이 들어간 뺨이 푸들푸들 떨리는 것이 보였다.
“……알겠습니다.”
“후계자, 포기할 거냐.”
“아닙니다. 환이에게 신경 쓰지 않겠습니다.”
“잘 생각했다. 환이는 저 알아서 살게 둬. 어디서 굴러들어 왔는지 모를 사내놈한테 홀려 가족 등지겠다는 놈을 핏줄이라고 생각할 필요도 없다. 너는 앞으로 회사에만 신경 써라.”
“……네.”
미덥지 못한 대꾸에 이수한이 이정을 빤히 바라보았다.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그만 제 집으로 건너가겠습니다. 좀 누워야 내일 출근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래. 가서 쉬어.”
손을 내젓는 이수한에게 인사를 하고 힘겹게 서재를 걸어 나가는 이정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역시나 미덥지 않았다.
지금 당장은 알겠다고 답했으나, 속으로는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무래도 눈을 붙여 두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이수한이 비서실장을 호출했다.
21
손가락 하나 다치지도 않았는데, 이환은 마치 나를 중병 환자처럼 보듬어 호텔로 옮겼다. 평소 이환의 유별난 반응을 생각하면 놀라서 심장에 무리가 왔을지도 모른다며 병원에 데려갔을 법도 한데, 얌전히 호텔로 온 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기껏해야 급히 세이프 룸으로 도망친 게 전부였고, 맞는 것도 때리는 것도 싸우는 것도 죄다 밖에 있는 경호원들이 했다. 그런데도 푹신한 침대에 눕자 긴장이 풀려 버려서 금방 몸이 노곤해졌다.
“한숨 자요.”
이불을 덮어 주며 속삭이는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눈을 감고 몇 번 숨을 고르는 사이 나도 모르게 잠에 빠졌다.
다시 눈을 뜬 것은 호텔의 창밖이 시커멓게 물든 뒤였다.
“일어났습니까.”
침대 옆으로 끌고 온 암체어에 앉아 있던 이환이 다가오며 물었다.
“실장님.”
갈라져 나오는 쇳소리에 이환이 물을 건네주었다.
“너무 오래 잤나 봐요.”
마른입을 축이고 시간을 확인했다. 자정에 가까워진 시간이었다.
“긴장이 풀려서 그럴 겁니다. 푹 자는 것도 좋지만, 깬 김에 일어나요. 밥은 먹고 자야지.”
“딱히 배고프지는 않은데요.”
“그래도 먹어야 합니다. 식사도 하지 않고 계속 자기만 하면 몸 상해요.”
한 끼 정도 건너뛴다고 상할 몸이면 이미 몸이라고 부를 수도 없을 텐데.
룸에 구비된 전화로 식사를 시키는 이환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계속 여기 계셨어요?”
“해민 씨 잘 때 잠깐 나갔다 왔습니다.”
“네에.”
“서운합니까?”
“왜요?”
“옆에 같이 있어 주지 않아서.”
“자는데 옆에 있어서 뭐 해요. 오히려 그랬다면 더 걱정스러웠겠죠.”
이환의 입장이 매우 걱정스러웠을 거다. 할 일이 없는 사람도 아닌데, 자는 사람 옆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으면 다들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이정을 데리고 아버지를 만나러 갔습니다.”
“……부회장님과요?”
“네. 아버지는 마냥 쉬쉬하며 좋게 좋게 넘어가려고 하고, 이정은 아무래도 말을 못 알아듣는 것 같아서. 보고 싶지 않은 얼굴들이지만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삼자대면을 한다고 해도 딱히 말이 통하실 분들은 아니셨을 텐데.”
“그러니까 말입니다.”
한숨을 포옥 내쉰 이환이 “큰일이에요.” 하고 덧붙였다.
“나는 괜찮지만 해민 씨는 툭 하고 쳐도 최소 골절일 정도로 약하고, 납치나 폭력 앞에서 무력하니.”
보통 사람들은 그런 상황에서 누구나 다 무력하다는 사실을 이환에게 말해 주고 싶었다.
“어쩔 수 없이 저랑 딱 달라붙어 있을 수밖에요. 집까지 쳐들어와 납치를 하려 했으니 앞으로 또 무슨 짓을 하려 할지 모릅니다. 항상 내 옆에 있어요. 화장실 갈 때도 같이 갑시다. 내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
걱정해 주는 건 좋은데, 고맙고 감사하고 참 좋은데……, 살짝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24시간, 화장실에 갈 때에도 붙어 있을 일인가 싶고. 상황이 이렇게까지 악화되는 것을 이환이 순순히 지켜보고만 있었을까 싶고.
내가 아는 이환이라면 내가 위험해지는 상황을 알면서도 지켜만 보고 있을 리 없었다. 그만큼 이환이 나를 좋아하니까, 라는 자만심이 아니라. 뭐라고 해야 할까, 내가 봐 온 이환은 아버지와 형의 고집을 어찌하지 못하고 그대로 당하기만 할 사람이 아니었다.
“정말로, 어쩔 수 없구나 하고 그냥 오신 거예요?”
“…….”
“진짜로? 앞으로 더 조심해야겠다는 경각심만 느꼈다고요?”
“…….”
“깽판 안 치셨고요?”
애써 무표정을 연기하던 이환이 마지막 질문에 턱을 움찔 떨었다.
“실장님?”
“깽판 안 쳤습니다.”
그는 조금 토라진 얼굴로, 불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건 정당한 대응이었습니다.”
“정당한 대응이요?”
“네. 정당한 대응.”
“정당하게, 어떻게 대응하셨는데요?”
“……그저 ……정당하게.”
“정당하게?”
“정당하게…….”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정당하지만 깔끔한 방식은 아니었나 보다. 빤히 쳐다보는 시선을 견디지 못한 이환이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