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튼 퓨리티-151화 (151/172)
  • 151화

    “한 실장님. 지금 부회장님 걱정하실 때가 아니에요. 이 답답한 양반아. 그쪽 부모, 와이프, 자식, 친척, 사돈의 팔촌, 세컨드, 친구. 다 멀쩡히 있는지 이번에 안부 전화나 돌려 봐요.”

    “그, 그런…….”

    “누차 말하지만, 뭔가를 얻기 위해서는 포기해야 하는 것도 있는 법인데 사람들은 이걸 모르더라고.”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던 이환이 표정을 지우고 정색하며 덧붙였다.

    “남의 사적인 부분을 건드릴 때는 그만한 각오를 했어야지.”

    한 실장이 다급히 휴대폰을 꺼내 여기저기 연락을 돌리는 사이, 이환은 꿈틀거리는 이정의 머리채를 힘주어 끌어당겼다. 잠시 살 만해졌던 이정이 크흡, 하고 밭은 숨을 토해 냈다.

    상황이 묘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알아차린 경호원들이 이환과 이정의 비서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고 있을 때, 이환은 느긋하게 엘리베이터에 올라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이정의 머리채를 붙잡은 상태로 질질 끌어 주차해 둔 차의 조수석에 밀어 넣고, 보닛을 빙 돌아 운전석에 올랐다. 시동을 켜고 주차장을 빠져나와 본가로 향하는 동안 이환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너어…… 형한테……. 이환……, 후회할 거다. 형이 널 얼마나…….”

    “닥치고 있어.”

    더 처맞기 싫으면.

    이환의 협박에 이정이 입을 꾹 다물었다.

    거칠게 운전하여 본가에 도착한 이환은 이정의 멱살을 잡고 차에서 끌어 내렸다. 성큼성큼 걸어 본채로 들어갔다.

    “도련님, 이 시간에 어쩐……, 허억.”

    이환을 맞이하러 나왔던 가정부가 엉망진창인 꼴로 그에게 끌려오는 이정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버지 어디 계십니까.”

    “서, 서재에…….”

    “마실 것은 필요 없으니 내오지 마세요.”

    냉랭한 얼굴로 말한 이환이 이정의 멱살을 쥔 채 서재로 향했다. 쾅 소리 나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이환이 끌고 온 이정을 책상 앞으로 밀어 던졌다. 힘없이 바닥을 데굴데굴 구른 이정이 그들의 아버지, 이수한의 발밑에 쓰러졌다.

    “……이게 무슨 짓이냐.”

    “나는 그만두겠다고 말했습니다. 애초에 아버지의 허락도 필요 없는 결정이었지만 예의상 말씀드렸고, 형에게 말하지 말아 달라는 아버지의 부탁도 들어 드렸습니다. 그런데 변한 게 아무것도 없네요. 내가 얼마나 더 저 새끼의 뻘짓을 지켜보고 참아 줘야 합니까.”

    “형이다. 네 형이야!”

    “형이란 놈이 깡패를 시켜 내 집을 쳐들어오게 만들고, 내 사람을 데려가려고 했습니다. 심지어 환한 대낮에.”

    “…….”

    그래도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이 나오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소리까지 들었다면 이 자리에서 저 새끼를 죽였을 텐데.

    “그래서 네 형을 회사에서부터 집까지 개처럼 끌고 온 게냐.”

    “네. 개 같은 짓만 해서 개처럼 끌고 왔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네 형이다. 네 가족이고, 그룹의 부회장이야. 그런 사람을 저 지경으로 만들어서 끌고 와.”

    책상을 탕 소리 나게 내려친 이수한이 노기 어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가족. 가족이요. 그러게요, 생각해 보니 내가 너무했네요. 나도 형처럼 집을 쳐부수고 형수님이나 조카를 건드렸어야 했는데. 차마 사람으로서 그 짓까지는 못 하겠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쌍놈 소리 들으며 개처럼 끌고 왔습니다. 제가 참 잘못했네요.”

    “빈정거리지 마라.”

    “내가 원하는 건 하나였습니다. 서해민에게 손대지 마라. 경고하고 또 경고했는데 도통 들어먹질 않아요. 아버지. 지금 이 상황에서 약속과 배려는 아무 소용도 없는 듯한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정이에게는 내가 잘 이야기해 두마.”

    “이제까지는 잘 이야기 안 하셨습니까?”

    “정이에게도 시간이 필요하다.”

    “그냥 저 새끼를 죽이죠. 아니면 정신 병원에 처넣거나.”

    “이환!”

    진심으로 한 말이 거부당했다. 익숙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이환이 힘없이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내뱉었다.

    “지금 이 꼴을 보세요. 모두 아버지의 책임이고 아버지의 잘못입니다.”

    “내가 이제껏 너희를 키워 준 것은 생각하지 않고, 모두 아비 탓이다?”

    “아버지가 형을, 나를 어떻게 키웠습니까.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재워 준 것만으로 자식을 키웠다고 말하지 않아요. 형을 보세요. 아버지의 자랑스러운 장남은 점점 저능아가 되어 가고 있고, 나는 아버지와 형을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

    “아버지.”

    “환아.”

    이환의 부름에 이수한이 먹먹한 목소리로 답했다.

    “한 번 더 이런 일이 생기면, 아버지가 사랑하는 장남의 얼굴이 동영상 플랫폼과 SNS에 도배될 겁니다. 아버지의 돈이 닿지 않는 곳에 형의 얼굴이 퍼질 겁니다. 아버지의 자랑스러운 회사에 고발 문서가 뜰 겁니다. 내부 비리, 비자금, 횡령, 이중장부, 고용 문제가 연이어 터질 겁니다.”

    “……뭐?”

    “제가 왜 월급도 받지 않으면서 십 년 동안 얌전히 회사 일을 도왔다고 생각하세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리며 이환이 씩 미소 지었다.

    “누누이 말씀드렸을 겁니다. 나는 회사에 욕심이 없다고. 회사가 잘되든 못 되든 관심 없다고. 욕심도 없고 관심도 없는 회사, 망하게는 못 하더라도 타격 한 번 못 줄 것 같습니까?”

    “너, 너……. 네가 감히 내 회사를!”

    이수한은 이환이 쥐어 터진 이정을 개처럼 끌고 들이닥쳤을 때보다 더 크게 노하여 소리를 질렀다.

    “회사를 건드리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이환, 넌 그때부터 내 아들이 아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네가 가진 모든 것들을 찢어 버리겠다. 네가 손에 쥐고 아낀다던 그 천한 놈을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지워 버릴 거야!”

    이수한의 고성에 이환이 킬킬 웃음을 흘렸다.

    “결국 아버지에게 중요한 건 자식도, 장남도 아닌 회사일 뿐이죠. 그런 점에서 참 이해가 안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소중한 회사를 왜 저런 머저리에게 물려주려고 하시는지. 아버지 돌아가신 뒤에 저 새끼가 회사 말아먹을 게 훤히 보이는데, 왜 그걸 아버지는 못 보시는 건지.”

    아버지가 쌓아 올린 기초가 있으니 단번에 무너지지는 않겠지만. 아버지가 기대하는 백 년, 이백 년 역사의 SG는 이루어지지 못할 터였다.

    “뭐, 그건 제가 걱정할 일이 아니니 미뤄 두고. 이제 판 위에 각자의 킹이 올라온 듯하네요. 아버지의 회사, 그리고 서해민. 굳이 상대를 죽일 필요도, 이길 필요도 없습니다. 건드리지만 않으면 저절로 나뉠 판이에요. 대신…… 건드리면 같이 죽는 겁니다.”

    전혀 연관 없는 두 가지가 같은 판 위에 올라왔다. 이수한의 소중한 것, 그리고 이환의 소중한 것. 서로가 목숨만큼 아끼는 것.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해서라도 그 무엇보다 지켜 내고 싶은 것.

    “이정의 목줄을 잡으세요. 날뛰지 않게, 근처에 오지 못하게, 관심조차 주지 않도록. 회사와 장남을 같이 지켜 내고 싶으시면 그만큼 노력을 들이세요. 이정이 내게, 서해민에게 다시 한번 관심을 갖는 순간, 우리는 남을 넘어서 적이 되는 겁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통보하며 이수한을 바라보자, 그는 침통하게 입을 열었다.

    “네 형이 너를 얼마나 아꼈는지를 떠올려 봐라. 어린 너를 보살폈던 게 네 형이다.”

    “압니다. 형이 나를 많이 아꼈죠. 나를 너무 아껴서 벽돌로 내 머리를 깨려 하고, 차로 나를 치게 하고, 공사 현장에서 내 머리 위로 철근을 떨어뜨린 사람입니다. 그런 관심과 보살핌, 제가 아버지와 형에게 돌려 드린다면 어떠세요. 가족의 정으로 넘기실 수 있겠습니까?”

    “…….”

    “말씀해 보세요, 아버지. 이전처럼 가족애라고, 형이 나를 많이 아껴서 그러는 거라고. 그럼 저도 없던 가족애가 생길 것 같은데.”

    “정이는 내가 잘 타이르마.”

    “잘 타이르는 수준으로는 안 됩니다. 확실하게 못 박아 두세요. 이제부터 이정이 하는 모든 짓은 아버지의 책임입니다. 아버지가 이정을 보듬은 순간 아버지의 몫이 된 겁니다.”

    “차라리 원하는 걸 말해라.”

    하, 하고 헛웃음을 내뱉은 이환이 입술을 뒤틀었다.

    “원하는 거 없습니다. 아니, 두 가지가 생각나네요. 하나는 이씨 집안에서 나오는 것. 다른 하나는 서해민과의 결혼. 하나는 불가능하고, 다른 하나는 아버지의 허락이 필요하지 않은 일이니. 아버지가 내게 해 주실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버지의 소중한 장남이나 잘 붙들고 계세요.”

    할 말을 끝내고 홀가분하게 자리에서 일어선 이환이 여전히 바닥에 구겨져 있는 이정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아버지가 그렇게 주장하는 가족의 정을 봐서 오늘 일은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다만, 또다시 수작을 부린다면 그땐 진짜 죽일 겁니다. 나는 아버지의 장남처럼 어설프지 않아요. 흔적도 없이, 어느 순간 세상에서 사라지게 만들 겁니다.”

    “결혼을 허락하마.”

    이환이 서재를 나서기 전, 이수한이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그 천한 놈과 결혼하고 싶다면 말리지 않겠다. 허락해 주마.”

    이환이 살짝 고개를 돌려 피로한 얼굴인 이수한을 비웃었다.

    “어떻게든 생색내고 싶으신 모양인데, 아쉽게도 아버지의 허락이 필요하지 않은 일입니다. 가 보겠습니다.”

    서재의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뚜벅뚜벅 걸어 나가는 이환의 뒷모습을 이수한이 조용히 바라보았다.

    양 팔꿈치를 책상에 기대고 두 손을 모아 이마를 짚은 이수한은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다른 자식들과는 다르게 애초부터 회사에 욕심이 없던 이환이었다. 거래라는 명목하에 일찌감치 한 재산 두둑이 챙겼기 때문인지 유산에 대한 미련도 없었다. 가진 만큼 더 가지길 원하는 게 사람 욕심인데도 이환은 흔들리지도, 타협하지도 않았다.

    너무 멋대로 자란 탓인지, 알파의 피가 너무 짙게 태어난 탓인지. 어릴 때부터 컨트롤하기가 까다로웠던 차남은 머리가 굵어진 뒤로 완전히 그의 손에서 벗어났다.

    가족애를 들먹이기엔 누구보다 냉정한 놈이었고, 회사의 중책을 맡겨도 더 높이 올라가겠다는 향상심보다 귀찮아하기만 했다. 쥐여 주는 재물에도 이제는 심드렁하여 더는 내밀 당근이 없었다.

    그렇다고 채찍질을 하기엔 자식 놈이 너무 거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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