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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튼 퓨리티-150화 (150/172)
  • 150화

    이환의 말에 찌부러진 캔처럼 구겨져 있던 침입자 중 하나가 기어 와 이환의 발에 매달렸다.

    “나 사장님 아닌데.”

    “선생님. 선생님. 살려 주세요.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살려 줄 겁니다. 내가 말했잖아요. 경찰한테 넘기겠다고. 우리나라 사형 제도 폐지된 지 오래라 감옥 간다고 안 죽어. 사람 죽인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무단 침입인데, 몇 달, 길어 봤자 일이 년이겠네. 운 좋으면 바로 나올 수도 있어요.”

    겁먹지 마. 하고 웃는 이환의 얼굴을 올려다보던 남자가 땅바닥에 이마를 쿵쿵 찧었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 가족은 제발…….”

    남자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던 이환이 무릎을 구부려 앉아 남자와 시선을 마주했다.

    “가족이 많습니까?”

    “……애들이 ……둘 있습니다. 와이프랑 애들이…….”

    “저런. 부모님은 살아 계시고?”

    이환의 물음에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고, 하필이면 딸린 식구도 많아. 돌봐야 할 사람도 많은 분이 왜 이런 험한 일을 합니까? 가족들 걱정하게.”

    이환이 남자의 어깨를 격려하듯 톡톡 두드렸다.

    “남의 약점을 건드릴 때, 내 약점이 무사하리라는 희망찬 기대는 버렸어야지.”

    “죄,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돈이, 돈이 급해서, 애 수술비가 급해서…….”

    “압니다, 알아요. 이유 없는 변명은 없는 법이거든.”

    남자의 손을 털어 내고 일어선 이환이 냉랭한 시선으로 쓰러져 있는 침입자들을 바라보았다.

    “살짝 위험했습니다. 오합지졸도 머릿수로 밀고 들어오면 꽤 위협적이라는 걸 오늘 알았네. 그래도 많이 와 줘서 다행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화풀이할 대상이 많아졌다는 뜻이라 기분이 좋아요.”

    조금 심하게 맞은 침입자들은 간헐적으로 꿈틀거렸고, 몇몇은 앞선 남자를 따라 이환의 앞으로 힘겹게 기어 오기도 했다.

    “난 이런 일 하는 사람들은 피도 눈물도 없을 줄 알았는데, 생각 외로 가족애가 깊은 사람들이 있네. 애먼 사장님, 선생님 찾지 마시고. 정 빌고 싶으면 경찰분들한테 빌어요. 내가 또 마음이 약한 사람이라서.”

    곁에 서 있던 백윤경이 일순 질색한 표정을 지었다.

    “비록 우리가 안 좋은 일로 엮였지만, 그래도 나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싶다 생각하시는 분은 내 변호사를 보낼 테니 말하도록 해요. 어떻게 일을 수주받았는지는 기본이고, 옵션으로 본인 범죄 이력이든 옆의 사람 범죄 이력이든 팔면 됩니다. 가격은 넉넉하게 쳐 줄 겁니다.”

    “그, 그럼 가족들은…….”

    “말했잖아. 가격은 넉넉하게 쳐 줄 거라고.”

    그제야 이환의 요구 사항의 의미를 깨달은 침입자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환이 턱짓을 하자 경호원들이 휴대폰을 꺼내 침입자들의 얼굴 사진을 찍었다. 뒤이어 흘러나온 피로 한 명 한 명 수첩에 지문을 찍게 했다.

    “다친 인원 있습니까?”

    신발을 신은 채로 집 안으로 들어서며 이환이 경호팀장에게 물었다.

    “몇 명이 조금 상했습니다.”

    “기다리게 하지 말고, 바로 병원 보내요. 남은 인원으로 정리 가능하죠?”

    “네.”

    “나 가고 나면 경찰에 넘기고.”

    “네.”

    어질러진 거실을 지나 계단을 내려갔다. 세이프 룸의 비밀번호를 누르려다 망가져 버린 도어락 장치를 보고 혀를 차며 메시지를 보냈다. 바로 문이 열렸다.

    안쪽에 있던 경호원이 이환을 맞이하며 인사를 했다. 손을 내저어 내보내고 안으로 들어섰다. 초라한 간이침대 위에서 무릎을 껴안은 자세로 웅크리고 있는 서해민이 보였다.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다가가 단정한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뾰족하던 기분이 마법처럼 누그러들었다.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내내 빠르게 뛰던 심장 박동이 천천히 느려졌고, 바짝 조이고 있던 근육이 이완되었다.

    모든 일은 생각한 대로 진행되었고, 서해민은 다친 곳 없이 무사했고, 끝마무리까지 완벽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도 모르게 걱정하고 있었나 보다.

    “해민 씨.”

    이환의 부름에 움찔 몸을 떤 서해민이 약간의 망설임 끝에 고개를 들었다. 흐릿하던 눈동자에 이환이 들어찼다.

    “……실장님.”

    화사하게 피어나는 꽃처럼, 또렷하게 살아나는 표정을 지켜보며 이환은 생각했다.

    아……, 내가 이 사람을 많이 좋아하는구나.

    내가 정말, 이 사람을 사랑하는구나.

    손을 뻗어 작은 몸뚱이를 끌어안으며 가슴에 차오르는 벅찬 안도감을 느꼈다.

    ∞ ∞ ∞

    서해민이 잠든 것을 확인한 이환이 조용히 침실 문을 닫고 걸어 나왔다. 프라이빗 공간을 가르는 문 너머에는 미리 세워 둔 경호원들이 바글바글 진을 치고 있었다. 홀로 느긋하게 소파에 앉아 태블릿으로 일을 처리하던 백윤경이 이환을 확인하고 다가왔다.

    “서해민 씨는요?”

    “잠들었다.”

    “식사는 나중에 일어나면 시키겠습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아무도 들이지 말고, 잘 지켜. 혹시라도 내가 오기 전에 해민 씨가 깨서 나오면 잘 설명해 주고.”

    “지금 가시려고요?”

    “그래.”

    “따라나서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어, 여기 있어. 아무래도 가족끼리 허심탄회한 시간을 가져야 할 듯하니까.”

    고개를 끄덕인 백윤경이 다시 소파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룸을 나섰다.

    기사도 대동하지 않고 직접 운전대를 잡은 이환이 SG 그룹 사옥으로 향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상층에 위치한 부회장실로 올라가기까지 이환의 걸음은 거침없었다.

    “안녕하십니까.”

    비서진이 이환의 얼굴을 확인하고 산뜻한 미소와 함께 인사했다. 손가락으로 안을 가리키자 계십니다, 하는 답변이 돌아왔다. 고개를 까닥인 이환이 부회장실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환아. 형 사무실까지 웬일이야. ……우리 환이, 화 난 얼굴이네?”

    음, 하고 고개를 든 이정이 이환의 얼굴을 확인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치 회사에 놀러 온 동생을 반가이 맞이하듯 두 팔을 활짝 벌리는 이정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차고 있던 시계를 빼서 주머니에 넣은 이환이 한쪽 어깨를 뒤로 뺐다가 힘껏 주먹을 날렸다.

    찰나의 공격에 대비하지 못한 이정이 광대뼈로 주먹을 맞이하며 뒤로 날아갔다. 우당탕 소리를 내며 의자가 함께 쓰러졌다.

    “화…….”

    이정의 멱살을 잡고 일으켜 세운 이환이 검지를 세워 입술을 붙였다.

    쉿. 아무 말도 하지 마. 입 닥쳐. 이빨 꽉 깨물어.

    말 대신 행동으로 경고한 이환이 이정의 얼굴을 과녁 삼아 짧게 펀치를 날렸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연거푸 얻어맞던 이정이 힘겹게 이환을 밀어냈다.

    “이게 무슨…….”

    주르륵 흘러내린 코피를 손으로 훔치는 이정의 얼굴 위로 황망함이 번졌다. 뻗어 오는 손을 쳐 내는 이정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이화아아안!”

    악에 받친 고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환이 발을 들어 이정의 배를 밀어 찼다. 쓰러진 의자 위로 나뒹군 이정이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쓰러진 이정의 머리채를 잡아 올려 책상에 쾅쾅 처박은 이환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그의 복부에 구두 앞부리를 처박았다. 끅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엎어진 이정이 구역질을 하며 토사물을 쏟아 냈다.

    이환은 감흥 없는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다시 머리채를 붙잡아 걸음을 옮겼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이정이 두 손을 허우적거리며 끌려왔다.

    쾅, 소리를 내며 문을 열어젖히고 밖으로 나가자 요란한 소리에 어리둥절하던 비서진이 이정의 모습을 보고 꺅 비명을 질렀다.

    “부, 부회장님!”

    “괜찮습니다. 집안싸움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본가로 갈 거니 기사는 대기시키지 않아도 좋습니다.”

    평온한 목소리로 비서들에게 말한 이환이 이정의 머리채를 잡은 채 휘적휘적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었다. 연락을 받고 왔는지 경호원들이 뛰어와 이환의 주변을 에워쌌다.

    “내가 집안싸움이라고 말했을 텐데.”

    “실장님. 일단 부회장님을 놓아주시죠.”

    “왜? 이 꼴로 끌려 나가면 쪽팔릴까 봐? 겨우 이 정도로?”

    이환이 움켜쥔 이정의 머리채를 장난치듯 이리저리 흔들었다.

    “부회장님 신병부터 확보해.”

    이정이 데리고 다니는 한 실장이라던 비서 놈의 말에 경호원들이 한 걸음 다가왔다. 가장 가까이 다가온 경호원의 목울대를 주먹으로 쳐올리고, 붙잡고 있던 이정의 얼굴을 벽에 대고 갈았다. 끄윽, 하고 신음이 터졌다.

    “이대로 잘나신 부회장님 얼굴 갈리는 꼴 보고 싶으면 계속 그렇게 건방지게 굴든지.”

    “이환 실장님.”

    “너, 한 실장이었던가?”

    이환이 비스듬히 머리를 기울이며 한 실장을 바라보았다.

    “이정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란 거 알아. 그런데 해도 되는 일이 있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어. 댁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고, 난 그 대가를 아주 값비싸게 받아 낼 거야. 그 어떤 이유, 변명, 회피 같은 건 안 통해.”

    빤히 쏘아보는 시선에 한 실장의 얼굴이 파리해졌다.

    “상황 파악됐으면 비켜.”

    입술을 뒤틀며 한 글자 한 글자 끊어 내뱉자, 지진이 난 듯이 흔들리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한 실장이 후들거리는 다리에 꽉 힘을 주었다.

    “당장, 부회장님을 모셔!”

    “아까 내 집에 주제도 모르는 것들이 쳐들어왔어.”

    피를 토하듯 내지른 한 실장의 말을 무시하며 이환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국 깡패, 조선족 깡패 골고루도 왔더라. 한 실장, 내가 걔들을 어떻게 했을 것 같아요?”

    “…….”

    “싹 잡아서 경찰에 넘겼어.”

    이환의 말에 한 실장은 약간의 의아함과 안도감 섞인 얼굴을 했다.

    “그 새끼들 족치는 건 너무 쉽잖아. 그래서 그 새끼들 경찰에 넘기고, 그사이에 가족들을 잡아 오라고 했지.”

    가서 개 한 마리 잡아 오라는 것처럼 가볍게 내뱉은 말에 한 실장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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