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튼 퓨리티-147화 (147/172)

147화

Rotten Peter Pan

“적당히 괜찮은 것 같네. ……너무 좁은가?”

“여기서 살 것도 아니고, 혼자 잠깐잠깐 와 있을 곳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 정도면 충분하죠.”

“네 기준에서 충분하다는 말은 좁다는 뜻인데.”

“같은 말이라도 꼭 그렇게 차별성을 부각시키시는 발언. 크, 해민 씨도 실장님의 이런 모습을 봤어야 했는데.”

쯧쯧, 하고 혀를 차는 백윤경의 엉덩이를 차는 시늉을 하며 이환이 매의 눈으로 주변을 훑어보았다.

“뷰는…… 그렇게 좋지는 않네.”

“서울 빌딩 숲에서 무슨 뷰를 따집니까? 한강 변도 아니고.”

그나마 층이 높아서 앞을 가로막는 건물이 없으니, 이 정도면 나쁘다고 말할 수 없는 경치였다. 비록 보이는 건 다른 건물들의 옥상뿐이지만, 앞이 뻥 뚫려 있고 시선을 들면 하늘도 보인다. 그것을 어필했으나 이환은 만족스럽지 못한 얼굴이었다.

“건물도 신축인 데다 보안도 나쁘지 않습니다.”

“따로 가드가 있는 것도 아닌데, 보안이야 거기서 거기겠지.”

“일 층에 관리 매니저가 24시간 상주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건물 입구에서 방문객 한 번 거르고, 엘리베이터도 카드 키로 작동되니 이 정도면 보안 나쁘다는 소리 안 듣습니다.”

보안과 프라이버시를 장점으로 내세우며 분양한 고급 오피스텔이었다. 평수가 그리 넓지 않지만, 애초에 1인 가구를 타깃으로 한 오피스텔인 만큼 특별히 좁은 것도 아니었다.

“거실에 방 하나, 화장실 하나. 너무 답답하지 않나.”

여기저기 이동하며 살펴볼 것도 없이, 신발을 벗고 올라와 한 바퀴를 돌면 더 이상 둘러볼 곳도 없을 정도로 좁은 내부. 그것이 마땅찮은지 이환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넓은 곳은 안 된다고 말씀하신 분은 실장님입니다.”

“그렇지.”

“사실 여기도 혼자 살기에 그리 좁지는 않거든요.”

“사는 건 아니고 잠깐 와 있을 곳.”

“네. 그러니 딱 적당하다는 겁니다. 이보다 큰 평수는 진짜 확 넓어집니다. 그리고 여기보다 더 좁은 곳은 싫다고 하실 것 아닙니까.”

“여기서 더 좁으면 누울 공간이 있긴 해?”

“이보다 훨씬 좁은 집에서 사는 사람도 많습니다.”

열 평도 안 되는 원룸을 안 가 봐서 저런다며 백윤경은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이환이 ‘조금 작은 사이즈’를 요구했지만, 그렇다고 진짜 열 평도 안 되는 원룸을 들이밀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다만 본인이 작은 사이즈의 공간을 요구해 놓고 작아도 너무 작다고 불평하는 이환의 양심을 욕할 뿐이었다.

“이십 평이면 보통 거실에 방 두 개가 나옵니다. 여긴 방이 하나인 대신 거실과 침실의 면적을 넓게 뺐습니다. 드레스룸 혹은 팬트리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도 있고, 여기저기 수납공간도 많고요.”

“어차피 사용할 일도 없는데.”

어차피 사용할 일도 없는데 왜 이리 트집을 잡고 계신 거죠?

백윤경이 눈으로 욕을 했다.

“아파트는 아니고, 빌라도 아닌 것 같고. 오피스텔인가?”

“고급 원룸 오피스텔이랍니다. 정확히 원룸은 아니고 1.5룸이지만요. 아무래도 강남이나 청담 쪽은 단지를 세우기 힘드니 건물 하나 높게 올려서 로얄 딱지 붙여 판매하는 추세입니다. 대신 매매가가 높고 관리비가 세지만요.”

하지만 매매가나 관리비가 문제 될 사람은 아니니, 얼마나 비싼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이렇게 작은데 고급이라고?”

“고급 ‘원룸’ 오피스텔입니다.”

고급이든 저급이든 중요한 건 ‘원룸’이었다. 정확히는 1.5룸. 아니, 원룸이고 1.5룸이고를 떠나서 애초에 작은 평수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었으면 좋겠다고 백윤경은 한탄했다.

작은 평수가 싫으면 그냥 처음부터 큰 평수를 찾아보라고 시켰어야지!

“윤경, 이게 최선인가? 여기가 최선이야?”

“네!”

백윤경이 냉큼 답했다.

다른 곳을 찾아와 보여 준다고 해도 이환의 마음에 드는 곳이 없으리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양심에 손을 얹고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그래, 이것이 최선이다.

백윤경은 당당했다.

“그보다, 서해민 씨가 여기서 지낼 것도 아니라면서 왜 굳이 머물 곳을 마련하시려는 겁니까?

“사람이 살다 보면 자신만의 공간이 필요할 때가 있어. 아무리 좁아도 내 한 몸 누일 공간이 있는 것과 없는 것에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모르는 건 아니겠지?”

“다 좋은데, 그걸 실장님이 저한테 이야기하는 지금의 상황이 좀 아이러니합니다.”

없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결핍에 관해 이야기하는 상황이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것만큼이나 어색하고 이상했다.

“그럴 일이야 없어야겠지만, 혹시라도 나한테 화가 나거나, 나랑 다투거나, 혹은 어떤 일로 힘들다거나 할 수도 있잖아. 그게 아니라도 문득 갑자기 다 내려놓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푹 쉬고 싶다거나, 현실에서 잠깐 눈 돌리고 싶어질 때.”

“그래서요?”

“그럴 때 자신만의 공간이 있다면 거기 틀어박히지만, 그런 공간이 없다면 길을 잃어버려. 나는 해민 씨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방황하지 않았으면 해. 여긴 그럴 때를 위해 마련하는 공간이고.”

덤덤한 이환의 대꾸에 백윤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것보다 실장님이 아는 공간에 틀어박혀 주기를 바라는 거였군요.”

실장님의 큰 그림을 뒤늦게 깨달았다고 감탄하는 백윤경을 이환이 흘겨보았다.

“실장님은 평소에도 참 완벽하고 계획적이시지만, 서해민 씨를 대상으로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야지. 그래야 마땅한 사람이고.”

“좋은 뜻으로 말한 거 아닌데…….”

작은 중얼거림에 이환이 무표정한 얼굴로 백윤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니, 서해민 씨가 참 좋아하겠다, 그런 뜻이었습니다. 어휴, 부럽다. 나도 누가 과보호하고, 위치 추적하고, 어디 가둬 둬도 좋으니까 강남에 아파트 하나 사 줬으면 좋겠네. 아휴, 부러워.”

백윤경이 과하게 너스레를 떨며 이환의 시선을 떨쳐 냈다.

“그럼 여기로 결정하시는 겁니다? 나중에 마음이 바뀌었다거나 다시 알아보라거나 하기 없기입니다?”

“정말 최선 맞아? 귀찮아서 대충 인터넷으로 검색해 본 거 아니야?”

“최선입니다. 듣는 비서 서운한 말씀은 그만하시고, 계약할지 말지나 얼른 결정해 주십쇼.”

“흡족하진 않지만 최선이라니 어쩔 수 없지.”

“네, 네. 감사합니다. 그럼 얼른 회사로 돌아가시죠. 실장님 자리에 없는 거 알면 대표님이 통곡을 할 겁니다. 일주일에 꼴랑 삼 일 출근하면서, 하필 출근 날 개인 업무를 보러 돌아다닌다고요.”

“그럼 언제 돌아다녀?”

“출근 안 하는 날이요! 일주일에 나흘이나 되는 출근 안 하는 날!”

“그때는 해민 씨랑 있어야지.”

“그럼 같이 집 보러 다니시든가요.”

“선물 줄 때, 선물 받을 사람과 같이 선물을 고르러 다니지는 않지.”

그렇게 말하면 또 그게 맞는 말처럼 느껴지기는 하지만, 그건 일반적인 선물이고 집 선물은 다르지 않나. 잠깐 수긍할 뻔했다며 백윤경이 절로 끄덕여지려던 고개에 딱 힘을 주었다.

“아무튼 여기로 결정했으니 얼른 회사로 돌아가시죠. 제가 계약 끝내고 가구랑 가전제품 싹 세팅해 두겠습니다.”

“아니, 기본적인 것만.”

어떻게든 한시라도 빨리 상사를 회사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며 백윤경이 상황을 마무리 지으려 했다. 이환의 이해할 수 없는 요구가 아니었다면 그리했을 터였다.

“……기본적인 것만요?”

“침실에 침대, 거실에 소파, 냉장고랑 세탁기는 작은 사이즈로. 딱 그 정도만 들여놓으면 되겠네.”

“옷장은 드레스룸을 쓰고, 서랍장은 수납공간이 있으니 굳이 필요 없다지만. 그래도 그 정도만요? 테이블이나 티브이, 전자레인지 이런 것도 없이 말입니까?”

뷰가 마음에 들지 않고, 아파트 면적이 너무 좁고, 답답하고 어쩌고 실컷 트집을 잡아 대던 주제에. 정작 살림살이는 최소한만 들여놓으라니. 그리하겠다고 넙죽 대답하기엔 너무 성의 없는 요구인지라 확인하듯 되물었다.

“그래.”

“너무 기본 아닙니까.”

“여기서 편히 쉬라고 마련해 주는 것 같아?”

이환이 고개를 살짝 기울여 물었다.

“혼자 지내도 불편하고 외롭다는 걸 느껴야 돌아오지. 내 곁으로.”

“와아…….”

무감정한 이환의 목소리에 백윤경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소오름. 서해민 씨도 압니까?”

“뭘?”

“실장님이 지금 한 말이요.”

“그걸 질문이라고 하나?”

역시 모르겠지.

불쌍한 서해민.

“서해민 씨의 미래가 진지하게 걱정되고 있습니다.”

“네가 해민 씨 걱정을 왜 해. 하지 마. 나만 해도 충분하니까.”

“그래서 더 걱정되는 겁니다.”

겉으로는 안 그런 척하며 뒤에서 뒷조사를 하고, 위치 추적을 하고, 도망칠 공간조차 제 손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이환의 집착을 정상이라고 말하긴 어려웠다.

“비정상인 거 아시죠?”

“사람은 원래 완벽하지 못해. 어디 한 곳은 비정상이기 마련이지. 비정상인 부분을 드러내면 병인 거고, 완벽하게 감추면 정상 소리를 듣는 거다.”

그래도 본인이 정상이라는 소리는 안 한다. 그만큼 객관화가 잘 되어 있다는 뜻이고, 그만큼 세상과 저 자신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뜻이다. 저런 사람의 관심과 집착을 받고 있는 서해민의 팔자도 참 기구했다.

“백윤경. 왠지 속으로 건방진 생각을 하는 것 같은데.”

“아닙니다. 저는 절대로 서해민 씨가 불쌍하다거나, 박복한 팔자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굳이 드러내어 맞을 소리만 하는 너도 정상은 아니다.”

쯧쯧, 혀를 차는 이환의 태도에 오늘도 불순한 마음이 차곡차곡 쌓여만 갔다.

확 그냥, 서해민한테 가서 다 말해 버릴까 보다.

백윤경의 불순한 마음을 읽은 사람처럼 이환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백윤경이 얼른 겸손한 눈빛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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