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튼 퓨리티-146화 (146/172)
  • 146화

    웅크린 내게로 손을 뻗은 이환이 조용히 나를 안아 주었다. 그의 품에 안겨 가만히 머리를 기댔다.

    “지금 오신 거예요?”

    언제 온 걸까.

    함께 있던 경호원이 누군가와 말을 하는 소리도, 문이 열리는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진짜 반쯤, 아니, 완전히 정신을 빼놓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런 일을 겪게 해서 미안합니다.”

    “제일 먼저 피해서 다친 곳도 없고 멀쩡해요. 그냥 조금 놀랐어요.”

    “얼굴이 하얗게 질렸습니다.”

    커다란 손이 등을 천천히 쓸어 주었다.

    “토했어요.”

    “저런.”

    “속이 좀 안 좋았어요.”

    “누워 있지 그랬어요. 놀라고 긴장한 상태에서 웅크리고 있으니 그렇죠.”

    그렇다고 속 편하게 누워 있을 상황도 아니지 않나.

    “밖은 어떻게 되었어요?”

    “다 정리하고 왔습니다.”

    “경호원분들은요? 엄청나게 맞던데.”

    “……봤습니까?”

    “네.”

    “엄선해서 뽑아 훈련시킨 사람들인데, 신뢰도가 낮아졌겠네요.”

    “쪽수에서 밀리면 은둔 고수여도 답이 없을걸요. 혼자 무쌍 찍는 건 영화에서나 나오는 일이죠.”

    내 대답에 이환이 소리 죽여 웃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맞는 소리만 하다니, 해민 씨답네요.”

    “다 정리했다면서요. 지금 상황이 뭐 별건가요.”

    “얼굴은 여전히 하얗게 질려서는.”

    “워낙 가진 것 없이 자라 악만 남아서. 반쯤 정신이 나가도 입은 움직이더라고요.”

    안고 있던 몸을 살짝 떨어뜨린 이환이 내 뺨을 붙잡아 이쪽저쪽으로 돌리며 살피는 시늉을 했다.

    “그렇게 보면 견적이 나와요?”

    “새삼스럽게 예뻐서 봤습니다.”

    칭찬인지 핀잔인지 모를 말을 던진 그가 내 손을 모아 잡고 살살 주물렀다.

    “손가락이 뻣뻣하게 굳었어요. 추웠습니까?”

    “추운지 더운지 생각할 정신까지는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경호원들은 어떻게 됐어요?”

    “다들 멀쩡합니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멀쩡하지는 않았을 것 같던데요.”

    “조금 상한 사람들이 있긴 한데 병원 보냈습니다. 목숨 붙어 있으면 멀쩡한 거죠.”

    치료받고 좀 누워서 요양하면 멀쩡해질 거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시간이 지나면 멀쩡해진다고 해도, 일단 지금은 안 멀쩡한 거잖아. 고장 난 가전제품을 고칠 거니까 멀쩡하다고 말하는 것과 뭐가 달라. 구멍 난 옷을 조금 이따 바느질한다 해도 지금 당장 구멍이 없는 건 아니잖아.

    이환의 이상한 화법에 절로 눈이 가늘게 뜨였다.

    “여사님은요? 장 보러 나가셨는데, 혹시 그때 집에 오신 건…….”

    하필 그 시간에 딱 맞춰 왔을 가능성은 작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다. 운이 나쁘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는 말이 있지 않나. 집도 침입당한 마당에 안 좋은 일이 겹쳐 일어났다고 해도 전혀 놀랍지 않았다.

    “연락드렸습니다. 사람 보내 놨으니 집 정리가 끝나면 모시고 올 겁니다. 걱정 말아요.”

    다행히 여사님에게는 별일이 없었던 모양이다.

    “정리 끝났다면서요.”

    “쓰레기는 치웠는데, 집이 좀 어질러졌습니다. 그거 압니까? 거실에 찬바람 쌩쌩 들어오고 있는 거.”

    “테라스 창을 빠루로 깨더라고요. 살짝 졸았다가 깜짝 놀라서 일어났어요.”

    “저런.”

    “눈을 떴는데 이상한 아저씨랑 눈이 딱 마주친 거예요. 그런데 그 아저씨가 윙크를 하더니 빠루로 테라스 유리창을 찍었어요.”

    “눈 괜찮습니까? 못 볼 것을 보고 시력 나빠진 거 아니에요? 나 잘 보입니까?”

    “네, 실장님 잘생긴 얼굴 잘 보여요.”

    “다행히 시력은 멀쩡하네요.”

    잘도 받아치는 이환의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조곤조곤 농담을 섞어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니 어느새 굳었던 몸도 풀리고, 차갑던 손에도 온기가 돌았다.

    “이제 조금 혈색이 돌아왔네요.”

    이환도 내심 신경을 쓰고 있었는지 말랑말랑해진 뺨을 손등으로 쓸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하얗게 질린 손가락을 주무르고, 손바닥을 문질러 비비고, 천천히 손목부터 팔꿈치를 거쳐 어깨까지 부드럽게 쓸어 주기를 반복했다.

    마치 녹슨 관절에 기름칠을 해 주듯, 경직된 피부를 세심하게 문질러 풀어 주었다.

    “아, 발은…….”

    “괜찮으니까 가만히 있어요.”

    웅크리고 있던 다리를 펴게 하여 제 무릎 위에 올려놓은 이환이 양말을 휙 벗겨 내고 퉁퉁 부은 발을 손으로 감쌌다.

    “발이 왜 이렇게 얼었습니까.”

    손으로 발끝을 쥐었던 이환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겨울이라서?”

    “수족냉증 있는 거 아닙니까? 약 한 재 지어 먹어야겠네요.”

    “겨울에 손발 차가운 건 당연한 현상이에요.”

    “혈액 순환이 잘되면 겨울에도 따뜻합니다.”

    그렇게 기겁할 정도로 놀라운 일이 아니었으나, 이환은 마치 내가 죽을병에라도 걸린 양 질겁했다.

    아프게 하여 열을 낼 목적인지 발가락을 콱콱 주무르고 발바닥을 꾹꾹 눌러 댄다. 그렇지 않아도 타인이 맨손으로 내 발을 만진다는 생각에 거부감이 드는 참인데, 아프기까지 하니 더 싫어졌다.

    “발은 하지 마세요.”

    아픔에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뒤틀다 기회를 엿봐 이환의 손에서 빼내며 말했다.

    “차갑게 얼어서 무슨 말입니까. 이리 내요.”

    “실장님이 하도 콱콱 주물러서 이제 열나요.”

    “아파서 하기 싫은 겁니까?”

    “음, 그렇기도 하고……. 더럽잖아요.”

    작게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하자 이환이 코웃음을 쳤다.

    “더럽긴 뭐가 더러워요. 내가 해민 씨 온몸 구석구석을 입으로도 빨아 본 사람인데. 기껏해야 손으로 발 좀 주물러 주는 게 더럽겠습니까.”

    “그런 건 말하지 마세요.”

    손으로 이환의 입을 막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세이프 룸에 함께 갇혀 있었던 경호원은 자리를 비운 상황이었다. 손바닥 아래에서 웃느라 휘어진 이환의 입술이 느껴졌다.

    “양말 다시 신게 발 줘요.”

    어서 얌전히 발을 내놓으라며 손을 흔드는 이환이 참 얄밉다. 삐죽 발을 내밀자 그가 벗겼던 양말을 다시 곱게 신겨 주었다.

    “언제까지 여기 있을 수는 없으니 자리를 옮기죠.”

    조심해서 일어나 보라며 이환이 나를 부축했다. 오랜 시간 웅크리고 있었던 탓에 척추가 시큰거렸다. 기지개를 켜듯 천천히 허리를 폈다.

    “이 층은 멀쩡하지만, 그래도 이곳에 있기엔 이래저래 심란하니 호텔에 가서 쉽시다.”

    내가 지하로 피하는 것을 다들 봤기에, 온 집 안을 헤집고 다닐 필요 없이 지하로 몰려들어 이 층은 비교적 무사하겠지만. 이 층으로 가려면 난장판이 된 일 층을 거쳐야 했다. 게다가 주방도 일 층에 있고, 냉장고도 일 층에 있고, 하다못해 물을 마시려고 해도 일 층으로 내려와야 하니까.

    결국 답은 호텔행인 모양이다.

    “……실장님.”

    “네.”

    “저 궁금한 거 있어요.”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봐야죠. 뭐가 궁금합니까.”

    “거실 테라스 유리창은 방탄유리였어요?”

    조심조심 걸어 세이프 룸을 나서며 묻자 이환이 푸흐흐,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게 궁금했습니까?”

    “네. 빠루로 내려치는데도 안 깨져서 신기했어요.”

    “맞아요. 어지간해서는 안 깨집니다. 지금 테라스 창도 유리가 깨진 게 아니라 구멍이 났던데. 구경할래요?”

    “……그건 좀.”

    신기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 참혹한 현장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손을 들어 보이며 진심으로 거절했다.

    이환은 일 층으로 올라가는 대신 주차장 쪽으로 나를 데려갔다. 침입자들이 주차장 쪽에도 있었는지 주차되어 있던 차들도 많이 망가졌고, 여기저기 피로 보이는 얼룩들도 보였다.

    “……멀쩡한 차가 남아 있나요?”

    “내가 끌고 온 차를 타면 됩니다. 대신 밖에서 타야 해요. 보시다시피 안에 주차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

    이건 누구한테 보상을 받아야 할까.

    테라스의 방탄유리도, 주차장에 세워 뒀던 이환의 자동차들도, 세이프 룸의 잠금장치도.

    “저를 잡아가려고 왔던 거예요, 저를 죽이려고 왔던 거예요?”

    한낮에, 부촌 동네에, 그런 깡패 같은 사람들을 동원해서 대체 뭘 얻고자 했던 걸까.

    “회장님이 보낸 사람들인지 부회장님이 보낸 사람들인지도 가늠이 안 돼요.”

    “미안합니다.”

    “실장님이 미안할 일은 아니고요. 저는 그냥…… 이해가 안 돼서 그래요.”

    내가 뭐라고. 이렇게 떠들썩하게 사람을 동원해서 쳐들어올 만큼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되었는지, 아니면 내가 그 정도로 거슬렸는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갚아 줄 겁니다.”

    “보상도 받으세요.”

    “그래요. 보상도 받읍시다.”

    지하 주차장을 통해서 집 밖으로 나왔다. 대문 앞에 시커먼 차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언젠가 봤던 장면인데, 하고 생각하며 이환이 열어 주는 문을 통해 차에 올라탔다.

    마치 귀빈을 경호하듯 앞뒤로 시커먼 차들이 함께 이동했다. 멀어지는 집 대문을 바라보다가 자동차 시트에 몸을 묻었다.

    “불편하더라도 당분간은 호텔에서 지내야 할 겁니다. 거실에 바람 들어와서 감기 걸리까 봐 걱정되거든요.”

    설마 진짜 그 이유일까 싶지만,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래저래 엉망이 된 집을 수리해야 할 텐데, 보안도 보안이지만 그 모습을 내게 보여 주기 싫은 마음을 알아차렸다.

    “세이프 룸이요. 전 그런 곳이 있는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

    “몰라야 비밀 공간이죠.”

    “CCTV도 엄청 많던데.”

    “오늘 같은 날이 아니면 안 씁니다. 평소에는 외부 카메라만 켜 두니까요.”

    “집에 그런 건 왜 만들어 둔 거예요? 덕분에 별일이 없긴 했지만, 엄청 당황했어요.”

    “혹시 몰라 만들어 뒀습니다. 만들어 놓고 사용한 적이 없어서 잊고 있었는데, 오늘 그 덕을 톡톡히 봤네요. 모처럼 뿌듯했습니다.”

    내 머리를 쓸어 넘기고 드러난 이마에 입을 맞추며 이환이 진심으로 뿌듯해했다.

    “저는 실장님 비밀 아지트인가 했는데.”

    “비밀 기지 만드는 건 독립하면서 졸업했습니다. 이제는 비밀기지보다 비밀 친구가 더 좋을 나이죠.”

    나랑 비밀 친구 할래요? 하고 이환이 은근한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비밀 친구라고 하기엔 동네방네 떠들고 다닌 탓에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게 된 듯한데. 너무 늦은 제안이 아닌가.

    샐쭉 눈을 흘기자 이환이 눈가에 입술을 눌러 비비며 희미하게 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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