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오늘부터 내 나이가 스물하나, 이환이 서른다섯. 십 년 뒤에는 내 나이 서른하나, 이환은 마흔다섯.
서른다섯일 때는 몰랐는데, 마흔다섯이라고 하니까 나이 차이가 확 느껴진다.
“역시 생각을 좀 해 봐야겠어요.”
이환의 품에서 벗어나 몸을 뒤로 물리자, 그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지금 뭔가 거리감이 느껴졌는데, 기분 탓입니까?”
“실장님과 저의 나이 차이를 실감했어요.”
“아…….”
이환이 짧게 탄식했다.
“역시 내 나이가 많은 게 문제입니까. 서른다섯이면 그렇게 늙은 것도 아닙니다. 한창때죠.”
“한창때인데, 저보다 많은 건 사실이라……. 지금은 절대적 수치보다 상대적 수치를 봐야죠.”
이환이 나름대로 항변했으나, 기준부터가 잘못되었다는 내 지적에 풀 죽은 얼굴을 했다.
“문제라는 건 아닌데요. 저는, 음……. 결혼을 꼭 해야겠다거나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거든요. 그래도 만약에 결혼을 하게 된다면…… 오래오래 같이 살고 싶어요. 지금까지 쭉 혼자였어서, 물론 엄마가 살아 있기는 하지만 사랑을 느껴 본 적도 없고 거의 방치하다시피 커서. 결혼을 하게 된다면 둘이 되는 거잖아요. 계속 쭉 혼자라면 모르겠지만, 혼자였다가 둘이었다가 다시 혼자가 되면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일 때보다 더 외로울 것 같아요. 둘이었던 기억이 있으니까.”
“나는 해민 씨랑 끝까지 함께할 겁니다. 절대 헤어지지 않을 거예요. 한눈팔지도 않을 거고, 실수로라도 다른 사람을 보는 일 따위 없을 겁니다.”
미래의 일을 어떻게 장담해. 나중에 자신이 잘못할 거라고 말하고 다니는 사람도 있나. 다들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말하지만, 그건 진짜 나중이 되어야 알 일이다.
그리고 내가 걱정하는 건 이혼이나 배우자의 외도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우리가 열네 살 차이가 나잖아요. 사고로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게 사람이라지만, 아무튼 사고나 병 없이 본인 수명대로 산다고 하면요. 실장님이 십사 년 정도 일찍 죽을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잖아요.”
“…….”
내 말을 듣고 있던 이환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화가 난 것도 아니고, 짜증이 난 것도 아니고, 슬퍼하는 것도 아니고, 즐거워하는 것도 아니고. 제 감정이 어떤지 본인조차 정의 내릴 수 없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는 얼굴이 잠시 파업을 한 듯한 표정이랄까.
“알파는…… 오래 삽니다.”
“오래 살아요?”
“베타보다 평균 수명이 훨씬 깁니다. 오메가보다도 더 오래 살아요. 그리고 페로몬이 짙을수록 더 건강하고 튼튼합니다.”
“진짜요?”
“네.”
“십사 년 정도는 더 힘내서 살 수 있는 거예요?”
“그렇……죠. 어쩌면 해민 씨보다 더 오래 살 수도 있을 겁니다.”
“정말요?”
“네.”
“와아…….”
왜인지 설명해 주는 이환의 표정이 침울해 보였다. 약간의 자괴감이 전해지기도 했다.
“이제 나이 차이에 따른 수명 걱정은 해결된 겁니까?”
“네. 조금 안심이 됐어요.”
“그럼 우리 결혼하는 겁니까?”
“그건 조금 더 생각해 보고요.”
“평균 수명 말고 또 문제가 남아 있는 겁니까?”
이환이 힘 빠진 얼굴로 물었다.
“진지하게 고민해 보고 싶어요. 결혼하면 죽을 때까지 같이 살아야 하잖아요. 저는, 결혼을 한다면 정말 좋아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고 싶어요. 의무감이나 책임감 말고요.”
억지로, 떠밀리듯 하는 결혼이 얼마나 불행한지 옆에서 지켜봤기에 알고 있다. 그 불행이 파생된 나라는 존재에게까지 전염되어 충분히 고통스럽기도 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이 이상 불행과 고통을 겪고 싶지 않았다.
“내 마음이 부족할까 봐 걱정입니까?”
“아뇨. 저요. 제가 너무 걱정이 돼요. 엄마를 혐오했던 아버지처럼 내 마음이 부족할까 봐, 아버지에게 집착했던 엄마처럼 내가 너무 과할까 봐. 그게 너무 걱정돼요. ……불행해지지 않을 마음의 한계를 모르겠어요.”
내가 당신을 얼마만큼 사랑해야 할지, 얼마만큼 사랑해도 좋을지. 그걸 알지 못한다면 분명히 불행해질 거다.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이환이 손을 뻗어 뺨을 감쌌다.
“해민 씨가 부족하다면 내가 채워 주겠습니다. 넘치도록 과하다면 그걸 다 수용할 수 있도록 내 마음을 더 키울 겁니다. 하지만 넘칠 일은 없을 테니, 날 많이 사랑할 생각만 해요.”
넘칠 걱정은 하지 말고, 더 많이 좋아하고 더 많이 사랑해 달라고.
이환이 속삭였다.
뺨에 닿은 손끝이 따뜻했다.
∞ ∞ ∞
“어머, 눈이다.”
차 두 잔을 타서 거실로 나오던 여사님이 유리창 너머를 보고는 소녀처럼 탄성을 흘렸다. 고개를 돌리자 하늘하늘 떨어지는 하얀 눈송이가 보였다.
“그러게요. 눈 오네요.”
“에이, 쌓이는 눈은 아니네. 그래도 눈 오는 거 보니까 좋다.”
좋은가.
이렇게 가만히 앉아 창밖으로 구경했던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
하늘에서 눈이든 비든 오는 날에는 야외 작업이 올스톱되니까 일을 못 하고, 실내에서 일을 할 때는 발자국이 남아서 일이 더 많아지고, 우산 관리도 해야 하고, 노숙도 불가능했다. 그래서 단 한 번도 좋았던 적이 없다.
“해민 씨는 눈 오는 거 좋아해?”
“아뇨.”
“눈 펑펑 와서 쌓이면 예쁘잖아.”
“……저는 맑은 날이 좋아요.”
“으음, 깨끗한 하늘도 좋지.”
여사님처럼 감성적인 이유는 아니지만, 하늘이 깨끗하면 날이 좋다는 뜻이니 대충 비슷했다.
“따뜻할 때 마셔. 모과청이 잘 만들어졌어.”
가을에 산 모과를 깨끗하게 씻어 설탕에 절여 두었다. 그리고 한동안 잊고 지내다가 오늘 처음 개봉한 것이다. 여사님의 말처럼 모과의 향긋함과 단내가 진하게 났다.
“향이 좋아요.”
“응. 맛도 괜찮아. 이번 모과청은 해민 씨랑 같이 만들어서 그런가. 완전 대성공이라니까.”
여사님의 뿌듯한 자랑에 고개를 끄덕이며 모과차를 호록호록 삼켰다.
“유자청도 만들어 둘걸. 이것저것 만들어서 겨울에 마시면 좋거든. 해민 씨 혹시 감기 잘 걸리나?”
“유난히 잘 걸리지는 않고요. 그냥 가끔 몸 관리 못 하면 걸리곤 해요.”
“그건 몸살감기지. 혹시 모르니까 배 좀 사 와야겠다.”
“배요?”
“으슬으슬할 때 배랑 말린 대추랑 생강 넣고 푹 끓여서 마시면 좋거든. 뜨듯하게 한 사발 마시고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감기 기운이 딱 떨어진다니까.”
필요할 때 쓰려고 하면 꼭 한 가지씩 없다고, 미리 챙겨 둬야 한다며 여사님이 장 볼 목록을 끼적였다.
“올해는 감기 안 걸릴 것 같은데요.”
“누구는 걸릴 것 같아서 걸리나.”
“올해 겨울은 따뜻해서요.”
바깥에서 일하지도 않고, 바깥에서 잘 일도 없다. 외출도 거의 하지 않고 집에만 있는데, 이놈의 집은 유리창이 많은 것에 비해 공사를 얼마나 잘 해 놨는지 외풍도 없이 훈기만 돈다.
이 집에 들어온 뒤 나는 처음으로 시원한 여름을 보냈고, 따뜻한 겨울을 지내고 있었다.
“눈 그치기 전에 장 보러 가야겠다.”
“보통은 눈이나 비 그치고 움직이지 않아요?”
“눈 올 때 걷는 게 얼마나 운치 있는데.”
“길이 질척질척해서 걷기 찝찝하잖아요. 흙탕이라 길도 더럽고, 신발도 더러워지고.”
“땅을 보지 말고 하늘을 봐야지. 발아래만 내려다보고 다니면 많은 걸 보지 못하는 법이거든.”
땅을 보지 말고 하늘을 봐라.
더러워진 길이 아닌 눈 내리는 하늘을 봐라.
눈이 내리는 길을 걸으면서도 어느 곳을 보느냐의 차이이다. 생각해 보면 언제나 발만 보고 걸었지. 고개를 푹 숙이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던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여사님은 생각의 관점이 다르신 것 같아요.”
“오래 살아서 그래. 나도 이십 대에는 땅만 보고 다녔어요. 발밑에 있는 것, 코앞에 있는 것만 보고 살아도 왜 그리 힘들고 버거운지. 이런 일 저런 일 다 겪으면서 조금씩 비우다 보니 하늘 볼 여유가 생긴 거지.”
지금이 아니라도 언젠가는 하늘을 볼 여유가 생길 거라고 말한 여사님이 나갈 준비를 하겠다며 자리를 뜨셨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코트를 입고 목도리를 돌돌 감으며 나오신 여사님이 물었다.
“저녁에 전골 하신다면서요.”
“혹시 다른 거 먹고 싶은가 해서.”
“전골 좋아요. 따뜻하게.”
“알았어요. 난 좀 천천히 다녀올 테니까, 해민 씨도 차 마시면서 눈 구경해요. 하늘 봐, 하늘.”
굳이 길에 나가 걷지 않아도, 앉아서 하늘을 보라며 웃으신 여사님이 집을 나섰다. 테라스 창 너머로 종종걸음으로 걷는 여사님의 뒷모습이 보였다. 노란 우산이 여사님의 기분을 대변하듯 살랑살랑 흔들렸다.
모과차 한 잔을 더 타 와서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하늘을 보았다. 잿빛 하늘에 작은 흰색 알갱이가 흩날리고 있었다.
여유.
이런 게 여유인가.
따뜻한 실내, 느긋하게 기대어 앉은 소파, 달콤한 차,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게 앉아 있을 수 있는 몇 분의 시간.
생각해 보면 특별한 것은 하나도 없는데. 굳이 이 집이 아니어도 좋고, 이 소파가 아니어도 된다. 여사님이 손수 만든 모과차가 아니라 몇백 원짜리 자판기 커피여도 괜찮다. 그런데도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차 한 잔을 마시며 하늘을 보기가 너무 힘들었다.
음 음음.
출처 모를 허밍을 흥얼거리며 한쪽에 놓아두었던 얇은 숄을 어깨에 걸치고 소파에 옆머리를 기댔다. 손으로 감싼 머그잔은 딱 기분 좋을 정도로 따듯했고, 그 온기는 손바닥에서 몸 전체로 퍼져 나가 노곤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여사님 오시기 전에 청소 끝내야 하는데.”
그런데 지금의 자세에서 손가락 하나 움직이고 싶지가 않다. 마치 가장 편안하고 안락한 최적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기분이다.
삼십 분, 아니, 십오 분. 딱 십 분만 앉아 있자.
스스로와 극적인 타협을 끝내고 그대로 모든 생각을 지웠다. 오로지 잿빛 세상에 떨어지는 눈과 나뿐이다.
그렇게 앉아 있다 잠시 졸기라도 한 모양이다. 퍽, 소리에 놀라며 눈을 떴다. 아슬아슬하게 쥐고 있던 머그잔을 꽉 붙잡았다.
유리창 너머에서 웬 낯선 사내가 눈을 마주치고는 찡긋 윙크를 했다. 그리고 들고 있던 쇠지레로 테라스 유리창을 힘차게 찍었다. 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