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튼 퓨리티-143화 (143/172)
  • 143화

    “사모님은 왜 저한테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바람 넣는 겁니다. 원래 옆에서 바람 집어넣는 사람들이 그래요. 한 번에 뭐가 될 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지속적으로 은근히 부채질을 하죠. 처음엔 콧방귀만 뀌던 사람들도 계속 옆에서 부채질을 하면 어느 순간 솔깃할 때가 옵니다.”

    “그럴 거였으면 제가 아니라 실장님하고 친하게 지냈어야 하지 않을까요. 제가 무슨 힘이 있다고.”

    “쭉 같이 살지는 않았지만, 이십오 년을 겪어 오며 내가 그 여자를 파악했듯 그 여자도 나를 파악했어요. 나한테 이도 안 들어간다는 것 정도는 잘 알 테고. 내가 해민 씨에게 약하다는 것도 처음 봤을 때 알아차렸을 겁니다.”

    “……저한테 약하세요?”

    “약합니다. 아주 약해요. 해민 씨 말은 뭐든 들어주고 싶고, 해민 씨가 원하는 건 뭐든 해 주고 싶습니다. 해민 씨가 별을 따 달라고 했으면 우주 비행선을 만들러 갔을 겁니다.”

    돈도 안 되고 먹을 수도 없는 별이 무슨 필요야. 아니다, 운석이 엄청 비싸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데. 그런데 운석하고 별하고는 조금 차이가 있나.

    “어? 어쩐지 솔깃한 표정인데?”

    “……아니에요.”

    “대답이 조금 늦게 나오는데?”

    “아니에요.”

    아니라고, 별 필요 없다고.

    눈을 흘기며 말하자 이환이 낄낄 웃었다.

    “그래도 좀 괘씸하네요. 내가 애지중지하는 사람을 이용하려 하다니. 그쪽 사람들끼리 알아서 지지고 볶고 하라고 얌전히 빠져 줄까 했는데.”

    “실장님, 지금……, 뭐랄까, 엄청 못된 표정? 흉계를 꾸미는 흑막? 그런 얼굴이에요.”

    “아, 못생겨 보입니까?”

    “아뇨. 여전히 잘생기시긴 했는데 무서운 얼굴이에요.”

    “내가 무서울 정도로 잘생겼다는 말을 많이 듣긴 했습니다.”

    “……그러셨구나.”

    영혼이 없는 목소리로 대충 맞장구를 쳐 줬다.

    “그 목소리 뭡니까. 영혼의 울림이 느껴지지 않는데.”

    기막힐 정도로 예민하게 알아차린 이환이 지적했다.

    “영혼이 조금 피곤해서 수면 중이에요.”

    “저런.”

    쯧, 하고 혀를 찬 이환이 속도를 높였다.

    “혹시라도 그 여자가 다시 접근해 온다면, 이야기는 잘 전달했다고 말해요. 아예 안 어울리는 게 좋지만, 마음먹고 접근하면 해민 씨가 피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 그럴 때는 그냥 마음대로 이야기하게 내버려 둬요. 실컷 이야기하고 나면 알아서 가겠지. 말만 많지 딱히 위험한 일은 시도하지 않을 겁니다. 앞뒤 생각 없이 움직이기엔 제 보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서요.”

    “실장님 집안은 엄청 복잡한 것 같아요.”

    “원래 돈이 얽히면 복잡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른 대기업 집안들도 이래요?”

    “의외로 깔끔한 곳도 있고, 같은 배에서 나왔어도 후계자 자리를 놓고 피 터지게 싸우는 집안도 있고, 아버지가 여기저기 씨를 뿌리고 다녀서 자식이 몇 명인지도 모르는 집안도 있죠. 장례식에 돌아가신 회장님 자식이라고 나타난 인물이 한 손으로 부족했다던 모 기업도 있습니다.”

    “와.”

    “돈 때문에 일어나는 모든 문제들이 모여들죠. 복잡하다는 말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냥 더러운 겁니다.”

    심드렁한 목소리로 마무리한 이환이 입을 다물었다. 천천히 속도가 줄어든 차 앞으로 우리의 집이 보였다.

    ∞ ∞ ∞

    커다란 욕조에 반쯤 물을 받아 두고 입욕제를 넣으면 보글보글 거품이 일어난다. 확 하고 퍼지는 향기와 서서히 변하는 수면의 색깔은 마치 마법을 보는 듯하다.

    집에서 거품 목욕이라니, 호강하네.

    “무슨 생각 합니까?”

    욕조의 양 끝에 앉은 탓에 마주 보고 있던 이환이 갸웃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사람이라면 집중력의 한계로 인해 대화를 하다가도 한 번씩 딴생각을 하기 마련인데, 이환은 항상 귀신같이 그 타이밍을 알아차렸다.

    “목욕을 꼭 같이 해야 했을까, 뭐 그런 생각?”

    “새해 첫날이니까요.”

    ‘새해 첫날’이 어디에나 가져다 붙일 수 있는 이유라는 걸 처음 알았다.

    “올 한 해도 해민 씨랑 같이 알콩달콩 잘 살기를 바라며, 새해 첫날을 꼭 붙어 지내는 거죠.”

    “그러시구나.”

    “대답에 진심이 없네요.”

    “진심이라 그래요. 가식적으로 더 열정적인 호응을 해 드릴까요.”

    내 말에 이환이 들고 있던 총을 쐈다. 삐리리 뿌루루 삐리뿌루 요란한 음악 소리와 함께 물고기의 입에서 비눗방울이 두두두두 쏘아져 나왔다. 순식간에 욕실이 비눗방울 천지가 될 정도로 격렬한 연사였다.

    “그런 건 왜 가지고 계신 거예요?”

    허공에 두둥실 떠오른 비눗방울이 코끝에 내려앉으며 퐁 하고 터졌다.

    “언젠가 쓸 일이 있을 것 같아 샀는데, 쓸 일이 없어서 처박아 둔 겁니다.”

    이환이 화풀이를 하듯 물고기 총을 쏘아 댔다. 삐리링 뽀로롱. 비눗방울을 토해 내는 물고기가 힘겨워 보였다.

    “이걸 가지고 노는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서는 욕실에 같이 들어와야 한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사 놓고 아차 했죠. 노인네들처럼 사우나를 즐기는 성격도 아니고, 누구와 같이 목욕하는 취미도 없으니 이걸 어디에 쓰겠습니까.”

    알게 모르게 컨셉 잡기에 실패하고 버려진 아이템이 저것만은 아닐 듯한 예감이 들었다.

    “그런데요.”

    다 좋은데.

    “왜 저는 이거예요?”

    본인은 최신식 버블건이면서, 왜 나는 클래식한 막대기인가.

    막대기 끝의 동그란 부분을 푸 하고 불자 동그란 비눗방울 하나가 퐁 튀어나와 힘없이 욕조 수면으로 다이빙했다.

    파워에서 너무 차이 나는 거 아냐?

    “바꿔 주세요.”

    누구는 손가락만 까닥거리면 비눗방울이 기관총처럼 쏘아져 나오는데, 누구는 입으로 바람을 불어야만 비눗방울이 나온다. 전동 드릴과 손 망치질의 차이만큼이나 기동성과 효율성의 차이를 보였다.

    “안 됩니다.”

    “왜요?”

    “그게 더 귀엽습니다.”

    “……두 번 귀여우려다 숨넘어가게 생겼는데요.”

    입으로 바람 부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알아? 저번에 파티 꾸민다고 입으로 풍선 불었을 때의 악몽이 떠오를 지경이다. 가뜩이나 습기 가득한 욕실에서 반신욕을 하고 있는데 입으로 바람까지 불려니 산소가 부족해서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바꿔 주면 나랑 결혼할래요?”

    “…….”

    버블건과 결혼이 같은 선상에 놓을 수 있는 조건이었나.

    비눗방울을 쏘아 대다 뜬금없이 튀어나온 ‘결혼’이라는 단어에 눈을 끔뻑였다.

    “왜 나랑 결혼 안 한다고 했습니까.”

    이환이 심통 맞은 얼굴로 버블건을 쐈다. 삐리링 뽀로롱 하는 소리가 슬슬 짜증을 유발했다.

    “안 한다고 안 했어요. ‘한다고 안 했다’라고 했지. 애초에 ‘결혼’에 관해서 한 번도 말한 적 없잖아요.”

    “말하지 않아도 은연중에 느낌이라는 게 있잖습니까. 혹시, 내가 프러포즈를 제대로 안 해서 그래요?”

    “프러포즈를 떠나서, 그거에 관한 생각을 아예 안 해 봤다니까요.”

    “급작스러웠나요?”

    아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시나. 당연히 급작스러웠지.

    “네.”

    “그럼 한번 생각해 봐요. 나랑 결혼할래요?”

    “아뇨.”

    “맞네. 안 한다는 거.”

    또다시 삐리리 뿌루루 삐리뽀롱 하는 소리와 함께 비눗방울이 쏟아져 나왔다. 손을 뻗어 버블건을 낚아채고 이환의 손에 플라스틱 막대를 쥐여 주었다.

    “이건 압수예요.”

    “아니, 왜…….”

    “너무 시끄러워요. 결혼하자고 말하면서 삐링뽀롱 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편견입니다. 삐링뽀롱 하면서 청혼할 수도 있지.”

    “시도할 수는 있지만, 성공하지는 못하겠죠.”

    지금처럼.

    내 단호한 대꾸에 이환이 막대 끝부분에 후 하고 바람을 불었다. 비누막이 흔들리다 폭 하고 터졌다.

    거봐. 입으로 불어서 비눗방울 만드는 일이 쉬운 게 아니라니까.

    네 번의 시도 끝에 기어코 비눗방울을 만들어 내 쪽으로 보내는 이환을 비웃어 주었다.

    “해민 씨 그런 표정 처음 봅니다.”

    “…….”

    “새로워서 살짝 두근거렸어요.”

    비웃는 표정에 두근거리는 사람은 취향이 나쁜 거겠지.

    질색하는 얼굴을 보며 웃은 이환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멀뚱히 바라보다 내민 손을 붙잡자, 그가 힘을 주어 내 몸을 끌어당겼다. 거품을 가르며 앞으로 쏠린 몸이 이환의 품에 안착했다.

    “프러포즈는 해민 씨가 결혼해 준다고 하면, 나중에, 날 좋을 때, 해민 씨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할 겁니다.”

    “순서가 바뀐 거 아니에요?”

    프러포즈를 하면 결혼하겠다고 답하는 거 아닌가. 내가 지금까지 프러포즈를 잘못 알고 있었나, 아니면 내가 모르는 프러포즈의 이면에 미리 말을 맞추는 단계가 숨어 있었나.

    “프러포즈했는데 거절당하면 너무 슬프잖아요.”

    그러게. 이것저것 돈 들여서 준비 다 해 놨는데 결국 거절당하면 돈 날리고 쪽팔리고 마음에 상처 입고. 역시나 프러포즈하기 전에 결혼에 관한 합의를 끝내 놓는 게 맞는 듯하다.

    “나랑 결혼합시다, 해민 씨.”

    그런 의미에서.

    “그건 좀…… 생각해 봐야겠어요.”

    역시나 좀 생각을 해 봐야겠다.

    “네?”

    “제가 아직 결혼 생각할 나이가 아니라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거든요. 그리고 결혼은 현실이랬어요. 나 혼자일 때는 아무 데서나 자고, 아무거나 먹고, 돈 없으면 굶고 그랬지만, 결혼해서 같이 굶을 수는 없잖아요. 같이 살 집도 구해야 하고, 먹고살 궁리도 해야 하고. 저는 마음도 그렇지만, 몸도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내가 준비되었으니 괜찮습니다.”

    그건…… 그렇지. 이환은 준비된 사람이지. 특별히 무언가를 준비하지 않아도, 지금 가진 돈으로 먹고 지금 가진 집에서 살아도 된다. 어차피 집을 각각 한 채씩 준비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한 사람만이라도 집을 가지고 있으면 다른 준비가 무슨 필요일까.

    “저는 한 십 년쯤 지나서요, 서른 넘으면, 그때쯤이면 나도 내 앞가림을 하고 있을 테니까. 결혼은 그때에나 한번 생각해 볼 문제라고 여겼거든요. 지금이 아니라요.”

    “십 년 지나면 내 나이가 마흔다섯입니다.”

    “…….”

    “물론 마흔다섯 살의 나는 여전히 잘생기고 멋있겠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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