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역시, 별다른 소득은 없구나.
여기 온 보람도 없이 회장님은 역정만 내고, 덩달아 이환도 화를 내고, 그러다 쫓겨났다.
여기 왜 왔는지, 아니, 떡국은 왜 와서 먹으라고 했는지. 여전히 회장님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화장실에서 급한 볼일을 해결하고, 씻은 손을 대충 바지에 문질러 닦으며 나오는 내 앞을 누군가가 막아섰다.
“어……?”
“쉿.”
내 손목을 붙잡은 사람이 화장실 근처의 방문을 열고 나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왜…… 왜 이러세요.”
이제 집에 가기만 하면 되는데, 왜 갑자기 등장하셔서 납치 및 감금을 시도하시는 거죠?
“시간 없으니 빠르게 말할게요.”
두어 번 이 집에 와서 밥을 먹으며 얼굴을 마주하긴 했지만, 호텔 개관식 때 비상계단에서의 대화 이후로 말을 섞어 본 적이 없는 사모님이었다.
“환이에게 전해요. 나는 손잡을 용의가 있다고.”
“네?”
“이정. 그놈만 치우면 돼. 오해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SG에 욕심 없어요. 우리 애들도 자기 몫이 아니라는 거 잘 알아요. 수희는 딸이라고 어릴 때부터 배제당하며 컸고, 수영이는 애초에 배포가 적어.”
“……무슨 말씀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사모님.”
“회사든 뭐든 다 가져도 괜찮아요. 나는 이정, 그 끔찍한 놈만 사라지면 돼. 더는 그 정신병자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두려워하며 살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 그놈이 지척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쳐. 이정이 무너지면, 그이의 선택지는 환이밖에 없다는 거 알죠? SG가 환이 게 되는 거야. 환이가 유일한 후계자로 남는다면, 그이도 지금처럼 막무가내로 해민 씨를 반대하지 못할 거예요. 서로에게 좋은 일이야.”
그러니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다니까요.
사모님의 기세가 평소와 달라 자라목을 하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환이가 이정 그놈을 맡아 준다면, 회장님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거예요.”
“……처리요?”
질겁한 표정으로 묻자, 사모님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며 오히려 나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수습하겠다고요. 환이나 해민 씨에게 회장님의 화가 돌아갈 일은 없을 거예요.”
“그걸 저한테 말씀하셔도……. 실장님께 직접 말씀하셔야죠.”
“어디에 눈이 있을지 몰라. 이정이라면 환이 주변에 사람을 붙여 놨을 거예요. 내가 갑자기 환이를 만난다면 이상하게 생각하겠지. 오늘밖에 기회가 없었어요. 환이에게 꼭 좀 전해 줘요.”
그리 말을 남긴 사모님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뭐가 왔다 갔나, 하는 기분이다. 방금 사모님이 나타나서 무슨 얘기를 하고 간 건 분명한데, 무슨 말을 들었나 멍하고. 아니, 사모님이랑 진짜로 대화를 했는지도 긴가민가하다.
나, 눈 뜨고 꿈이라도 꿨나.
혼자 텅 빈 공간에 멍하니 서 있다가 문을 열고 나오자, 화장실 앞에서 서성이는 이환의 등이 보였다.
“실장님.”
“해민 씨? 왜 거기서 나옵니까.”
“음……, 복잡한 사정이 있지만 일단 집에 가요.”
“네?”
“얼른요.”
일단 집에 가서 생각을 정리하든 이야기를 전하든 해야 할 듯싶다.
내 재촉에 이환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따로 간다는 인사를 전해야 할 사람도 없어서 조용히 이환의 본가를 나섰다.
차를 타고 거대한 저택의 커다란 대문을 빠져나왔다.
“역시, 영양가는 없었죠?”
“네?”
“오늘 말입니다. 분명 아버지가 영양가 없는 이야기만 하실 거라고 했잖아요. 그래도 해민 씨가 이야기를 들어 보고 싶다고 해서 온 거지만, ‘역시 실장님 말을 들었어야 했구나.’ 하고 속으로 후회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아직 그 반성은 하기 전이거든요.”
큭큭 웃으며 이환의 말에 반박했다.
“조용히 있기에, 시간 낭비했다고 속으로 생각하는 줄 알았는데?”
“뭔가 폭풍에 휩쓸렸다 온 기분이라, 생각을 비우고 마음의 안정을 찾는 중이었어요.”
“아버지가 뭐 특별한 말을 한 것도 아닌데요. 혹시 아버지가 언성을 높여서 놀랐습니까? 가는 길에 청심환이라도 하나 살까요.”
“그게 아니라요.”
아버지를 진상 손님 대하듯 취급하는 이환이 어이없었다. 픽, 하고 실소하며 조수석 의자에 몸을 늘어뜨렸다.
“화장실 다녀오는 길에 사모님이랑 잠깐 이야기했어요.”
“……해민 씨가 나온 방에서 그 여자와 같이 있었던 겁니까?”
“의미가 모호해지는 질문은 하지 마세요.”
둘이 은밀하게 만난 것 같잖아.
은밀하게 만난 건 맞지만, 아무튼 오해할 만한 소리는 하지 말라고.
내 지적에 이환이 웃음 삼키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만나서 뭐 했습니까.”
이환이 짐짓 무게를 잡고 진지한 얼굴로,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지금 질투하고, 오해하고, 화나서 묻는 겁니다. 사실대로 말해요. 그 여자랑 단둘이 만나서 뭐 했습니까.”
“…….”
이환이 어젯밤에 뭘 보고 잤더라. 적당히 볼만한 영화를 찾지 못하고 케이블 채널을 돌리다가 불륜 모큐멘터리를 흥미로워하며 봤지. 뭔가 싸구려 느낌이 나지만 자극적이라고 칭찬 같지 않은 칭찬을 한 기억이 뒤늦게 떠올랐다.
“어허, 왜 대답을 못 합니까.”
“실장님 장단에 맞춰서 이 상황극을 받아 줘야 하나 잠깐 고민했어요.”
“고민만 하지 말고 받아 주지 그랬습니까.”
“그러기엔 사모님이 너무 어머니? 할머니? 연배셔서. 좀 죄송하더라고요.”
내 대꾸에 이환이 아, 하고 짧게 탄식했다.
“생각해 보면 해민 씨에게는 나도 나이가 많은 축에 속하겠죠.”
“……음.”
“말이라도 아니라고 해 주지 않는 겁니까.”
“대신 삼십 대에게는 이십 대에게 없는 완숙미가 있잖아요.”
“완숙미를 원할 거면 육십 대랑 만나야죠.”
“…….”
맞는 말이라 반박하기가 어렵다.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해 입을 다물고 있었더니, 또 반박하지 않는다며 가벼운 타박이 돌아왔다.
“그래서, 그 여자가 무슨 이야기를 지껄였습니까.”
“길게 얘기할 시간도 없고, 사람 눈을 피해서 빠르게 말을 전달하고 싶으셨대요.”
“전달이요?”
“네, 실장님한테요.”
내 말에 이환이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직접 이야기하면 될 일을, 왜 해민 씨한테 이야기합니까.”
“이정 부회장님이 실장님한테 사람 붙여 놨을 거라고. 직접 말을 할 수가 없으셨대요.”
“원래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죠.”
아니, 왜 이렇게 부정적이야. 사모님 이야기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사모님을 별로 안 좋아하시나 봐요.”
“딱히 좋아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 집에 있는 사람들 중 정상인 사람은 한 명도 없거든요. 정상으로 보인다면 그냥 그런 척을 할 뿐입니다.
“부회장님이면 몰라도, 다른 분들은 그냥 성격이 조금 별나신 게 아닐까요.”
“그건 해민 씨가 세상을 너무 아름답게 보는 탓입니다. 모나지 못해서 타인도 모나지 않게 바라보는 거죠.”
이십 년을 살아오면서 세상을 아름답게 본다는 칭찬은 처음이다. 나처럼 세상을 모나게 보는 사람도 없을 텐데.
잠시 신호에 걸려 차를 멈춘 이환이 뽀뽀해도 됩니까? 하고 입술을 들이밀었다.
“안 돼요.”
가까이 다가온 이환의 입술을 손으로 눌러 막았다. 쳇, 하고 혀를 찬 이환이 입술을 누른 손을 붙잡아 손끝에 쪽쪽 입을 맞췄다. 간질간질한 감각에 손가락이 고부라졌다.
“사모님이 전해 달라셨어요. 실장님이랑 손잡을 용의가 있다고.”
“거봐요. 정상 아니라고 했지. 남편도 있는 사람이 자식뻘인 나랑 손을 왜 잡습니까.”
내 손은 해민 씨만 잡을 수 있어요, 라고 장난스럽게 말하는 이환의 어깨를 타박하듯 때렸다. 살짝 힘을 뺀 상태라 아프지 않을 텐데, 이환이 과장되게 아픈 시늉을 했다.
“사모님이요. 엄청 진지해 보였어요.”
“나도 엄청 진지합니다.”
“이정 부회장님만 치우면 된다고. 그런데 손잡자고 하면서 부회장님 치우는 건 실장님이 해 줬으면 하는 것 같았어요. 그러면 회장님은 자기가 맡겠다고, 실장님한테 회장님의 화가 돌아갈 일 없게 하겠대요.”
내 말에 이환이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도 아버지한테 말 한마디 못 하는 사람이 어떻게 책임을 집니까. 아무리 나중 일이라지만 막 던지네요. 그래서, 일단 이정부터 처리해라? 해민 씨를 거쳐서 말하니 그런 개소리도 할 수 있었던 겁니다. 나중에 또 그런 말을 하면 응수하지 말고 그냥 비웃어 줘요.”
재밌는 농담을 들은 사람처럼 웃으면서도 내뱉는 말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대신 회사에는 욕심이 없다고 하시던데요.”
“그걸 말한 것부터 욕심이 있다는 뜻입니다.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주절거린다는 건, 찔리는 게 있다는 뜻이죠.”
하지만 진짜 욕심이 없을 수도 있지 않나.
“이정 부회장님을 무서워하는 듯 보였어요.”
“그 집에서 이십오 년을 버틴 사람입니다. 원래부터 지금의 모습이었을 것 같습니까? 그 여자도 이것저것 다 해 보다 안 되니 숨죽이고 있는 겁니다. 가장 적절한 스탠스를 취하며, 상황을 뒤집을 타이밍이 올 때까지 죽은 듯이 엎드려 기다리고 있는 거죠. 그런 여자 앞에 해민 씨가 나타났으니 얌전히 있을 수가 없었겠죠. 이해합니다.”
“……저만 이해 안 되는 거예요?”
“회사와 재산을 모두 장남이 챙겨 가는 상황을 누가 제일 배 아파할 것 같습니까? 차남일까요, 아니면 가족이면서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계모일까요.”
“……”
“계모에게 자식이 없었다면 모르겠지만, 제 배 아파 낳은 자식이 둘이나 있습니다. 후처 자식 소리 듣는 것도 서글픈데, 베타라고 차별하고, 모든 유산은 장남에게 돌아가게 생겼습니다. 법정 스님도 아니고, 무소유를 누가 좋다고 할까.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길 원하는 게 사람인데.”
“그럼 회사며 회장님 재산이며 다 가지고 싶은데, 이정 부회장님이 있으면 불가능하니까……. 실장님에게 이정 부회장님을 처리하게 만들고, 정작 사모님은 나중에 말을 바꿔서 실장님한테 덤터기 씌울 수도 있다는 뜻이겠네요.”
이환은 대답 대신 웃기만 했다. 사모님의 진심은 알 수 없지만, 말이 말 그대로의 뜻을 품고 있지 않을 수도 있음을 다시금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