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새어머니가 그동안 뒷조사를 열심히 하셨나 봅니다?”
“…….”
“그런데 뒷조사가 좀 부족했네요. 아버지에게 받은 건 정당히 일한 대가였지, 투자 같은 공돈이 아니었습니다. 이십 년 넘게 같이 사셨으면서 그렇게 아버지를 모르시나. 그만한 돈을 가족이라고 주실 양반입니까?”
“다 받아 놓고 아닌 척하지 마요. 작은오빠 앞으로 되어 있는 땅이랑 건물만 계산해도 몇백억이 넘는다던데. 스무 살이 되기 훨씬 전부터 받아 놓고 무슨 정당히 일한 대가예요.”
“무조건 목소리만 크고 떼를 쓴다고 네 말이 정답이 되지는 않지. 네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인 것도 아니고. 네게 구구절절 설명해 줄 이유도 없지만, 정 궁금하면 아버지께 여쭤보든가. 내가 무엇을 대가로 땅과 건물과 돈을 받을 수 있었는지.”
입술은 웃고 있는데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싸늘했다. 이수희가 그런 이환을 노려보다가 회장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버지! 나도 아버지 자식이잖아요. 저 항상 노력해 왔잖아요. 아버지 실망 안 시키고 자랑스러운 딸이 되도록 노력했잖아요.”
회장님의 차별은 장남을 제외한 모든 자식에게 공평했으나, 이수희는 속사정을 알지 못했기에 이환이 특별한 총애라도 입은 듯 오해했다. 딸이라는 이유로 이수희가 유독 박한 대우를 받긴 했지만, 성차별을 떠나서 어차피 장남을 제외한 나머지 자식들은 다 비슷비슷한 처지임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러니 좋은 혼처 자리 구해 준다지 않느냐.”
“제가 원하는 건 결혼이 아니라고요!”
버럭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난 이수희가 화를 참지 못하고 식당을 나가 버렸다.
한바탕 태풍이 쓸고 간 듯이 난장판이 된 분위기 속에서 조용하고도 빠르게 떡국 그릇을 비웠다. 체할 것 같은 기분을 참아 내고 넘어가지 않는 떡국을 꼭꼭 씹어서 꾸역꾸역 삼켰다.
누구 한 사람이 식사를 끝내면 주변 사람들도 덩달아 속도를 높여 밥을 먹기 마련이다. 비록 지금은 시끄럽지만, 내가 먼저 그릇을 비우면 다들 정신을 차리고 밥을 먹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내 기대와 달리,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양 가정부가 나타나 빈 그릇에 떡국을 리필 해 주었다.
“…….”
시발.
리필 해 주지 말라고.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성질머리 하고는.”
쯧쯧 혀를 찬 회장님의 질책이 사모님에게로 향했다.
“저거, 저 망둥이 같은 성격 고쳐 놔. 잘 가르치고 잘 키워 놓으면 뭐 해. 저런 성격으로는 부끄러워서 어디 내놓을 수가 있나.”
“요즘 애들이 다 그렇죠. 어디 고분고분 부모 말을 듣나요.”
그러면서 은근히 이환을 쳐다보는 시선에 회장님이 크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내가 지적당한 것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조금 기분이 나빠졌다.
밥상 앞에서 뛰쳐나간 사람은 따로 있는데, 왜 가만히 있는 이환을 걸고넘어지지?
이수희가 회장님에게 모진 대접을 받는 것은 안타깝지만, 그렇다고 이환을 방패 삼는 사모님의 행태는 몹시도 얄미웠다.
“저는 실장님이 효자라고 생각합니다.”
뜬금없는 내 발언에 회장님과 사모님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요? 뭐요?
이제까지 회장님의 과한 요구를 다 들어줬는데 뭐 얼마나 고분고분 말을 더 들어줘야 해. 돈을 아무리 준다고 해도 목숨 걸라고 하면, 그걸 누가 해. 간이 어지간하지 않은 이환이나 할 법한 일이다.
회장님이 사모님에게 어디까지 오픈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정과 이환의 사정을 대충 아는 듯했고 이환이 그 대가로 회장님에게 받은 것들도 알고 있는 모양이니까. 이수희처럼 이환이 그냥 공으로 돈을 받아 갔다는 말은 못 하겠지.
돈 줄 테니 이환이 겪었던 일을 당해 보라고 한다면, 사모님은 자기 자식들에게 선뜻 권할 수 있을까.
“환이가 효자였는데, 요즘 불효자가 되고 있지.”
짧은 침묵을 깨고 이정이 불쑥 첨언을 했다.
응, 너는 꺼져.
모든 악의 근원, 불화의 씨앗, 또라이 새끼의 말은 듣고 싶지 않다.
“그렇죠. 내가 좀 효자입니다.”
내 쪽으로 몸을 비틀어 이정을 비스듬히 등진 이환이 생긋 웃으며 내 말에 맞장구를 쳤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나 같았으면 이런 가족들 있는 집에 떡국 먹으러도 안 왔어.
혹시 내가 오겠다고 해서 이환이 어쩔 수 없이 같이 온 건가. 안 오려는 이환을 미리 알고 오게끔 하기 위한 회장님의 수작에 내가 넘어가 버린 건가.
“저보다 효자예요, 실장님은.”
한 달에 한 번, 병원에 처넣은 엄마를 의무적으로 보러 가는 나보다 훨씬 더 효자지. 나였다면 아버지와 거래고 뭐고 일단 이정을 정신 병원에 보냈을 텐데.
“아닙니다. 해민 씨가 더 효자죠.”
“저는 아무리 잘 쳐 줘도 효자에는 속하지 못할 것 같아요. 너무 의무적이라서요.”
“요즘은 그 의무도 안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 정도면 충분히 효자입니다.”
딱히 효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는데.
이환은 칭찬의 의미로 말한 거겠지만, 효자라는 말이 달갑지는 않았다. 효자 소리를 듣고 싶지도 않았고, 효자로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살짝 뾰족해진 기분이 전해졌는지 이환은 그 화제로 더 말을 잇지 않았다. 단지 떡국을 마저 먹으라며 손짓했을 뿐이었다.
“……염병.”
맞은편에 앉아 반강제로 이쪽을 구경하고 있던 이수영이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작게 욕설을 흘리며 만두를 씹었다.
∞ ∞ ∞
“다 먹었으면 일어나지. 손님은 차 한 잔 마시고 가게나.”
차를 꼭 여기서 마실 필요가 있을까. 의도하지 않게 먹게 된 떡국 두 그릇이 위에 보관만 되어 있을 뿐, 아직 소화를 시작하지도 않은 기분인데.
더부룩한 명치를 손으로 쓰다듬고 있자 회장님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나를 바라보았다.
“……?”
왜요? 하는 표정으로 응시하자 쯧쯧 하고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따라와.”
이수희가 기분에 따라서 아빠와 아버지를 혼용하더니, 그게 회장님을 닮은 탓인가 보다. 격식을 차려 ‘이러게나, 저러게나’ 한 게 조금 전인데 대뜸 반말로 명령을 하신다.
기분에 따라 쌍욕도 서슴없이 내뱉는 게 사람이고, 꼭 격식을 차려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이수희에게 한 소리를 했던 회장님이 저러는 모습을 보니, 역시 사람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는 건가 싶고 이런 게 내로남불인가 싶고 그렇다.
“불편하면 그냥 가도 됩니다. 떡국 같이 먹어 줬으면 해민 씨도 할 만큼 했어요.”
딴생각을 하느라 멍하니 앉아 있는 걸 오해했는지 이환이 괜찮다며 내 어깨를 토닥거렸다.
그런데 정말 차 안 마시고 그냥 가도 되는 건가? 회장님이 나를 부른 용건은 차 마시면서 나올 모양인데.
“괜찮아요. 잠깐 딴생각했어요.”
“딴생각할 여유도 있는 거 보니,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 봅니다.”
“그건 아니고요. ……계속 걱정해 주세요. 실장님이 걱정해 주시는 거, 좋아요.”
내 말에 이환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당황한 표정인가.
멍하던 얼굴에 천천히 미소가 피어났다.
“걱정합니다. 항상, 매일, 매시간, 매초마다 하고 있어요. 해민 씨가 사라지지는 않을까, 해민 씨가 편히 잘 지내고 있을까, 해민 씨가 밥은 잘 먹고 있을까, 해민 씨가 숨은 잘 쉬고 있을까.”
“…….”
다 좋은데 숨 쉬는 걱정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숨 못 쉬는 상태라면 그냥 죽은 거잖아. 매시간 매초마다 생존을 걱정할 일이냐고.
하지만 먼저 걱정해 달라고 말한 입장에서 할 말이 없었다. 그냥 그러려니 해야지.
“그럼 얼른 차 마시고 집에 가죠. 새해 첫날을 무의미한 사람들과 무의미하게 보내면 안 되지 않습니까. 사실 해민 씨와 해돋이를 보고 싶었는데, 여기 오느라 새해 첫 해돋이를 놓친 것만으로도 엄청 손해 본 기분입니다.”
매일 뜨는 해를, 고개만 들면 볼 수 있는 해를 새해 첫날이라고 굳이 동해까지 찾아가서 봐야 할 이유를 아직까지 느끼지 못했기에 그리 아쉽지는 않았다. 다만, 회장님의 부름에 응해야겠다는 말을 했을 때 이환이 조금 서운한 표정을 지은 이유가 그래서였구나 깨달았을 뿐이다.
해돋이 엄청 보고 싶으셨나 보다.
“따라오라는데 아직도 앉아 있구나.”
“네, 갑니다.”
혼자 성큼성큼 식당을 나갔던 회장님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돌아와 호통을 쳤다. 이리 오라면 이리 오고 저리 가라면 저리 가는 종놈도 아니고, 회장님한테 월급 받는 직원도 아닌데. 왜 명령을 하고 명령에 따르는 걸 자연스럽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다.
아니꼬운 마음을 삭이며 회장님의 뒤를 따르자, 이환이 그런 내 뒤를 쫓았다.
재촉을 했던 것과 달리 느긋한 걸음으로 식당을 나선 회장님은 거실을 거쳐 긴 복도를 걸어 어떤 문 앞에 섰다. 커다란 미닫이 나무 문을 양옆으로 밀자, 안쪽에 넓은 공간과 그 안에 자리한 사람들이 보였다.
길쭉한 테이블을 감싸듯 양옆으로 놓인 소파에 빼곡히 앉아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날아들었다. 그들은 회장님을 보자 기합이 들어간 군인처럼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회장님, 식사 맛있게 하셨습니까.”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회장님.”
“만수무강하십시오, 회장님.”
중구난방으로 날아드는 인사말이 시끄러울 지경이다. 귀가 따가울 정도로 시끄러운 소음에 가까운데, 나와 달리 회장님의 귀에는 달콤한 노랫소리로 들리는지 허허 웃으며 손을 내젓는다.
“다 같이 늙어 가는 판국에, 집구석에 앉아 자식들 인사나 받을 것이지. 뭐 한다고 꼭두새벽부터 이리로 몰려오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엄청 뿌듯한 얼굴이다. 새해부터 뭐 한다고 몰려왔냐고는 하지만, 저렇게 뿌듯해하는 얼굴을 보면 안 온 사람들은 결코 무시하지 못할 성싶다. 후폭풍이 무서워서라도 와야지, 오지 말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들으면 새해 선물로 권고사직을 받게 되지 않을까.
일개 회사 사원이 회장님 집까지 찾아오지는 않았을 것이고, 저 사람들도 나름대로 그룹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사람일 텐데. 그런데도 새해 첫날마다 회장님 댁에 찾아와 꼬박꼬박 인사를 해야 한다니. 나이를 먹어도 사회생활은 쉬워지지 않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