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나는 왜 자꾸 여기 없어야 할 사람이 있는 것 같고, 그런 기분이 느껴지는 걸까.”
“야, 좀 닥쳐.”
혼잣말의 형태를 띠긴 하지만 목소리를 죽이지 않아 식당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 들을 정도로 크게 이수희가 중얼거렸다. 옆에 앉은 이수영이 이수희의 옆구리를 찌르며 입술을 움직이지 않은 채 작게 목소리를 냈다.
나 저거 알아. 저런 게 복화술이지?
“아버지가 초대한 손님을 두고 밥상머리에서 예의 없이.”
“아버지 손님? 설마 아버지가 초대하신 거예요?”
그녀의 예의 없음을 명백히 비웃는 얼굴로 이환이 중얼거리자 이수희가 휙 고개를 돌려 회장님을 바라보며 진짜냐고 물었다.
“지금부터 아무도 입 열지 마. 숟가락 들어갈 때만 열고 닫아. 새해 첫날 첫 끼부터 왜 이리 시끄럽냐.”
맞다 아니다 확실히 답을 주지는 않았으나 내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묵인하는 회장님의 모습에 이수희가 눈치 빠르게 입을 다물었다. 물론 그녀의 표정은 못마땅함으로 가득했지만.
“아버지, 정말 작은형이랑 저 새끼랑 결…….”
“조용. 입 다물고 식사만 하라고 말한 게 일 분도 지나지 않았다. 아비 말을 무시하는 거냐?”
나를 힐끔거리던 이수영이 무언가를 묻다가 회장님의 지적에 숟가락을 입에 물었다.
회장님, 너무 고압적이시다. 가족끼리 밥 먹으면서 이야기도 할 수 있는 거지. 업무적으로 만난 사람들도 아닌데, 어떻게 입 다물고 밥만 처먹어.
하지만 정말 밥만 먹었다. 회장님의 경고가 무섭기는 무서웠는지, 누구 하나 쩝쩝거리며 먹는 소리조차 내지 않고 조용히 떡국만 떠먹었다.
떡국은…… 맛있네.
그래. 떡국은 맛있었다. 여사님이 끓여 주시는 떡국을 마다하고 새해 첫날부터 굳이 남의 집에서 눈칫밥을 얻어먹을 이유가 있을까 싶었는데, 떡국은 죄가 없었고 맛만 있었다.
회장님 댁 식사를 담당하는 사람의 손맛이 어지간할 리가 없지.
떡을 뜬 숟가락 위에 이환이 김치 한 조각을 올려 주었다. 힐끔 주변 눈치를 보며 얼른 입에 넣자, 그 뒤로 장조림이며 더덕구이 같은 반찬이 번갈아 숟가락 위에 올라왔다.
“만두도 좀 먹어요.”
떡국에 넣지 않고 따로 쪄서 접시에 내어놓은 만두를 개인 접시에 덜어 와 내 앞에 놓아준다. 눈치가 보여서 만두랑 반찬 먹을 생각도 없이 떡국만 퍼먹고 있었음을 눈치챘나 보다.
“실장님도 얼른 드세요.”
작게 속삭이듯 말하자 먹고 있습니다,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새해 아침부터 코앞에서 별 지랄을 다 보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이수희가 씨근덕거리며 눈을 흘겼다.
“이수희.”
“아빠는 만날 나한테만 뭐라고 그래! 저 인간들 하는 꼴을 보라니까요. 내가 저 꼴을 보면서 떡국이 넘어가게 생겼는지.”
회장님의 경고 섞인 부름에 그녀가 숟가락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짜증을 냈다.
회장님이 이수희에게만 뭐라고 한다면 그 이유는 목소리가 크기 때문이 아닐까. 목소리가 크면 타깃이 될 가능성이 높으니까. 목소리가 크면 장땡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게 갑이 아니고 을이 되면 집중 포격을 맞을 위험성만 높아지는 법이다.
안타깝게도 이수희는 을의 입장을 많이 경험하지 못해서 이러한 삶의 이치를 깨닫지 못한 모양이다.
“저 성격을 어찌할까.”
“수희한테만 너무 엄하게 굴지 마세요. 새해 첫날인데.”
“그러니까. 새해 첫날부터 식탁 앞에서 저게 뭔 꼴이냔 말이야. 하나뿐인 딸 성격이 저리 드세서 어디에 써먹어.”
기어코 회장님의 언성이 높아졌다. 옆에서 이수희의 편을 들어 주던 회장 사모님이 찔끔한 표정으로 조용히 들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수희는 내일부터 신부 수업 시켜. 저거 나이가 이제 스물다섯이야. 대학교 졸업하고 일 년 잘 놀았으면 충분하지. 당신은 여편네들이랑 어울려 놀지만 말고 수희 혼처부터 알아봐.”
와, 회장님. 지금 여기서 한 말을 밖에 나가서 하면 바로 사회적 매장일 텐데.
사람의 겉과 속이 다르고, 집 안에서 하는 언행과 집 밖에서 하는 언행이 다르다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한 기업을 이끄는 회장님에게 이런 모습이 있을 줄이야. 주도적인 혁신과 변화를 부르짖던 SG의 기업 이념과 다르게 너무나도 보수적이지 않나.
“아빠!”
“아버지라고 불러라. 제 마음 내킬 때만 아버지고 성질부릴 때는 아빠야?”
“아버지! 저 이제 스물넷, 아니, 스물다섯이에요. 무슨 결혼을 벌써 해요. 작은오빠도 싱글이고, 수영이도 아직이잖아요. 왜 나만…….”
“넌 알파도 아니고 사내도 아니니까. 더 시간 지나면 네 몸값만 떨어진다.”
한 그룹의 총수라는 사람도 몸값이라는 말을 쓰는구나. 저런 말은 나처럼, 내 주변처럼 못 배우고 못 벌어먹는 사람들이나 쓰는 말인 줄 알았는데.
「우리 몸값은 갯값이나 마찬가지야. 일하다 다쳤다고 ‘아이고, 우리 쪽 일을 열심히 하다 다치셨군요.’ 하고 치료비나 줄 것 같아? 사고 내서 재수 없다고 현장에서 쫓아낸다. 억울하다고 어디 가서 하소연도 못 해. 우리 몸은 우리가 잘 챙겨야지. 그러니까 너도 귀찮다고 대충대충 하지 말고, 안전모 꼭 쓰고 벨트 잘 챙기고 그래라.」
건설 현장 일용직자로 흘러 들어갔을 때, 나를 보며 안쓰러워하던 어떤 아저씨가 한 말이다. 자식 먼저 앞세워 보냈다던 그 아저씨는 나를 보며 먼저 간 자식을 떠올리기라도 하는지 옆에서 이것저것 많이 챙겨 주었었다.
내게 안전의 필요성을 구구절절 설명하던 그 아저씨가 정작 현장에서 사고를 당해 다리가 부러진 뒤로는 보지 못했지만. 다리 안에 철심을 박았다던가. 그런 걸 보면 사고는 내가 조심하더라도 온전히 피할 수 없는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사고인가.
“몇 년 더 지나서 어디 재취 자리로 들어가고 싶으면 안 말린다.”
“아버지!”
저건 이수희뿐만 아니라 사모님 기분도 별로일 듯한 발언인데. 그러한 예상처럼 회장님 옆에 앉은 사모님은 지그시 입술을 다물고 싸늘한 표정으로 자신의 밥그릇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차라리 결혼 안 하고 혼자 살래요.”
“네 아비한테 들러붙어서 돈 빼먹으며 살겠다고?”
“저도 일하잖아요. 저도 정당하게 일하고 월급 받는다고요.”
“정당? 네가 내 자식이 아니었으면 입사나 가능했을 것 같으냐. 노력 없이 한 자리 차지해 놓고 당당할 일은 아니지.”
“그럼 오빠들은요? 오빠들 명패에 이름 파서 시작할 때, 저는 신입 사원부터 시작했어요. 노력 없이 한 자리 차지한 건 오빠들이죠.”
“넌 시집 가면 남의 식구 될 사람이다. 남의 집 식구 될 사람에게 회사의 중역 자리를 맡길 수 있나.”
“회사 중역에 있는 사람들이 죄다 아버지 자식들도 아니잖아요. 왜 저한테만 그렇게 박하게 구세요. 내가 베타로, 딸로 태어난 게 내 선택도 아닌데.”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럼 이것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라. 시끄러우니 이제 입 닫고 식사나 마무리하자.”
와. 회장님. 말이 안 통해.
이수희의 말을 들어 보면 나름대로 논리적인 것 같은데, 그러한 논리도 회장님 앞에서는 힘을 쓰지 못했다.
대화 상대가 무시하고, 우기고, 버티고, 모르쇠로 나오면 논리고 뭐고 간에 대화 성립 자체가 불가능하지.
이수희가 조금 불쌍해졌다.
“그럼 작은오빠 자리에 보내 주세요. 이제 작은오빠 출근 안 하잖아요. 건설 제가 맡을게요.”
“네가 공사판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냐. 험한 바닥에서 구르는 놈들 사이에서 벽돌 한 장 안 날라 본 계집이 뭘 하겠다고.”
“오빠도 현장 가서 벽돌 나르지는 않았을 거 아녜요!”
그건 그렇지. 이환이 건설 현장에서 벽돌을 나르지는 않았지.
유독 이수희에게만 엄격한 잣대를, 아니다, 저건 엄격한 잣대도 아니다. 그냥 딸로 태어난 것을 문제 삼고 있으니, 성차별을 엄격한 잣대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수희는 내일부터 회사 책상 빼고 집에서 결혼 준비해라. 수영이는 건설 쪽으로 출근하고.”
“제, 제가요?”
“남자도 없는데 무슨 결혼 준비를 해요! 결혼은 혼자 하나. 그리고 저는 안 된다면서 수영이는 왜요! 제가 여자라는 걸 제외하면 이수영보다 못한 게 뭐가 있다고요.”
갑작스럽게 대화에 등판하게 된 이수영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되물었으나, 곧이어 포격하듯 쏟아지는 이수희의 말에 묻혀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했다. 그는 혼자서 “그건 좀…….” 하고 중얼거렸지만 역시나 관심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수희. 아비 말 끝났다. 시끄럽게 하지 말고 밥 먹어. 회사에는 내가 말해 두마.”
저건 아무리 봐도 배려가 아니었다. 일방적인 강요요, 명령이지.
울음을 참듯이 꾹 다물고 있는 이수희의 턱 끝이 파들거렸다. 열이 오른 목덜미와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정 아버지 회사에 앉혀 놓을 수 없다 싶으시면 투자해 주세요. 저도 나가서 회사 차릴래요.”
밥그릇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이수희가 툭 말을 내뱉었다.
“투자? 투자? 우리 딸이 벌써부터 아비 등골 빼먹을 생각을 하는구나. 지금부터 이러면 결혼해서는 친정 재산을 얼마나 빼먹으려고.”
그녀의 말에 회장님이 질 나쁜 농담이라도 들은 양 허허 웃었다.
“왜요? 그것도 딸이라서 못 해 주세요? 작은오빠 투자 회사 만들 때도 아버지가 돈 대 주셨잖아요. 돈뿐만 아니라 어릴 때부터 땅이며 건물이며 매년 퍼 주셨다면서요.”
“수희야.”
옆에서 사모님이 이수희의 팔을 붙잡으며 급하게 말을 막았으나, 이미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을 식탁 앞에 앉아 있는 모두가 들은 뒤였다.
회장님과 이수희의 말다툼 같은 대화에도 아랑곳없이 느긋하게 떡국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내 숟가락 위에 반찬 올려 주는 데에만 열중하고 있던 이환이 픽 웃음을 흘렸다.
“새어머니가 그동안 뒷조사를 열심히 하셨나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