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좋은 분위기에 나올 이름이 아니라며 이환이 눈살을 찌푸렸다. 손가락으로 찡그린 눈썹 끝을 살살 어루만지며 웃음을 흘렸다.
“오늘 이전에는 몰랐는데, 크리스마스는 뭔가 마법 같아요.”
“그래도 이정을 이해하지는 말아요. 이해할 만한 사람이 못 되니까. 이런 자세로 누워서 이정을 떠올리지도 말고, 나랑 끌어안고 있으면서 이정을 생각하지도 말고.”
“그럼 다른 때는요?”
“다른 시간, 다른 상황에서도 굳이 그런 인간을 생각할 이유가 있습니까?”
“부회장님을 너무 싫어하시는 거 아녜요?”
“싫어하기도 하지만, 일단 지금은 질투하는 겁니다.”
너무나도 당당한 대꾸에 헛웃음이 나왔다.
“나 말고 다른 사람 생각은 하지 말아요.”
어처구니없는 요구에 결국 웃어 버렸다. 타인이 내게 이런 요구를 해 오리라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는데.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상황이라서 더 웃음이 나오나 보다.
“그럼 저는 누구 생각을 해야 하는데요?”
“당연히 내 생각을 해야죠. 나 말고 숨겨 둔 놈이라도 있습니까.”
괜히 뿔난 표정을 지으며 과장되게 으르렁거리는 이환의 뺨을 손으로 감쌌다.
“실장님.”
“…….”
“마법이 풀리기 전에 키스하고 싶어요.”
아침이 다가오고 있거든요.
내 속삭임에 이환이 고개를 숙여 입술을 겹쳤다.
20
[내일 환이랑 넘어오게. 떡국이나 한 그릇 같이 먹도록 하지.]
한 해의 마지막 날, 예상치 못한 사람에게서 문자메시지 한 통을 받았다.
메시지 속에 담긴 의미를 파악해 보려 했으나, 회장님이 무슨 생각이신지 도통 짐작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이환에게 보여 주었다. 고자질하려던 건 아니고 순수하게 회장님의 생각이 궁금한 탓이다.
메시지를 확인한 이환은 괜한 헛짓거리를 한다며 혀를 찼다. 딱히 커다란 의미가 있는 식사 초대는 아니었나 보다.
“하암.”
“졸립니까?”
“평소보다 조금 일찍 일어나서 그런가 봐요.”
새벽 다섯 시를 막 넘긴 시간이었다.
겨울의 아침은 늦게까지 어두워 심리적으로 더 피곤함을 느끼게 만든다.
그래도 예전이었다면 고작 한두 시간 일찍 일어났다고 피곤하다는 말을 내뱉지 않았을 텐데. 이환과 함께 지내며 여섯 시 넘어 일어나는 게 생활화되다 보니 팔자 좋은 소리가 나왔다.
“그냥 집에서 우리끼리 떡국 먹는 게 더 좋았을 텐데요.”
“그래도 회장님이 부르셨으니까요.”
“뭐 얼마나 좋은 사이라고 시키는 대로 다 들어줍니까. 자꾸 해 달라는 대로 해 주면 버릇 나빠집니다.”
음, 이환의 아버지이고 한 회사의 회장님이고를 떠나서.
“노인에게 할 말은 아닌 것 같아요.”
동방예의지국인데, 속마음은 아니더라도 겉으로는 공경하는 척 정도는 해야지.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봤을 때 괜히 이환을 욕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리고 새해 첫날부터 그쪽 사람들 얼굴 보면서 밥이 넘어가겠습니까? 체하겠네.”
“‘그쪽’ 사람들이 제 가족 아니고 실장님 가족이거든요.”
“그러니까요. 가족이라서 내가 제일 잘 압니다. 한 해의 첫날을 투자하여 얼굴 마주하고 밥 먹을 가치가 없는 사람들이에요.”
참 신랄하다.
나도 딱히 화기애애한 식사 자리가 되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회장님의 초대에 기꺼이 이환의 본가로 향하는 이유는, 회장님이 무슨 의도로 그런 초대장을 보내셨을까 궁금했기 때문이다.
역시 호기심이란 한낱 인간이 컨트롤하기엔 너무나도 막강했다.
“식사 자리에서 막 면박을 주시려나요?”
“본인이 초대해 놓고 그러면 너무 없어 보이죠. 아버지가 속마음과는 달리 겉치레를 참 신경 쓰십니다.”
“가 보니 내 의자만 없다거나, 나만 떡국을 안 준다거나, 내 떡국에만 소고기가 없다거나…….”
경우의 수를 하나하나 손꼽아 보고 있자 이환이 웃음을 터뜨렸다.
“혹시라도 소고기가 없으면 내 떡국과 바꿔 줄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아녜요. 그냥…… 조금만 덜어 주세요.”
“그래요. 알겠습니다.”
“소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떡국은 먹지 않겠다는 강경한 의지는 아니고요. 남들 다 소고기 떡국을 먹는데 나만 소고기 없는 떡국을 먹기에는 서러울 것 같아서요.”
“네, 네. 압니다. 당연히 소고기 들어간 떡국을 먹어야죠. 해민 씨는 소고기 먹을 가치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게까지 확대 해석하지는 마시고요.”
내 치졸한 변명을 이환이 크게 긍정해 줘서 약간 민망했다.
이환의 본가에 도착한 것은 다섯 시 반을 조금 넘긴 시간이었다. 아직 회장님 내외가 내려오지 않으셨다며 가정부로 보이는 사람이 나와 이환을 먼저 식당으로 안내했다.
“아직 아무도 안 왔네요.”
“그러게 조금 더 자고 천천히 움직여도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일 분이 오 분 되고, 오 분이 십 분 되는 법이라고요.”
심지어 이환은 일 분이 아니라 십 분부터 시작했다.
십 분만 더 잡시다. 삼십 분만 있다 일어나죠.
한마디로 양심이 없었다. 이러다 회장님 떡국 드실 시간에도 침대에 누워 있게 생겨서 단호하게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여섯 시에 식사하신다고 했으니 곧 오시겠죠.”
내 말에 무게를 실어 주듯, 십 분 정도를 기다리니 이환의 배다른 쌍둥이 동생들이 어기적거리며 식당으로 들어섰다. 하암, 하고 쩍 입을 벌려 하품을 하던 이, 이……, 이환의 여동생인 이 모 씨가 이환과 나란히 앉은 나를 보고 눈을 끔뻑거렸다.
“뭐지? 나 아직 잠이 덜 깼나?”
“뭐가아. 썅, 비켜.”
식당에 들어오다가 멈칫한 여동생의 뒤통수에 코를 박은 남동생이 쌍소리를 내뱉었다.
역시나 남동생 쪽도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한 번 본 사람의, 심지어 통성명도 제대로 나누지 않고 귀동냥으로 들었던 타인의 이름을 기억할 수 있었다면 천재 소리를 듣고 자랐겠지. 단 한 번도 천재 소리를 들어 본 적 없이 자랐기에, 한 번 본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지금의 상황에서도 나는 당당했다.
보통 사람들은 한 번 만난 사람의 이름을 몇 달 뒤까지 기억 못 해. 그러니 내가 정상이지.
“미쳤어? 지난번에는 가족 식사 자리에 끌고 오더니 이제는 새해 첫날부터 당당히 데려와? 진짜 제정신 아니구나?”
“야, 이수희! 너…… 형한테 뭐라는 거냐. 주제도 모르고 따라온 저 새끼 잘못이지, 왜 형한테 버릇없이 굴어!”
“버릇없이? 이게 죽을라고. 니 새끼 버릇이 더 가관이거든?”
이환과 나를 손가락질하며 뒷목 잡는 시늉을 하던 여동생과 제 형이라면 무한 신뢰를 보내는 주제에 나를 향해 이를 드러내던 남동생이 서로 머리채를 잡고 싸우기 직전, 그들의 뒤로 이정과 그의 부인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수희랑 수영이는 새해 첫날부터 활기차구나.”
이수희, 이수영.
뒤늦게 쌍둥이 남매의 이름을 다시 듣게 되었다.
“으, 재수 없는 말투.”
이수영의 머리채를 잡으려고 들어 올렸던 손을 내리며 이수희가 질색하는 얼굴로 몸을 피했다.
“환이랑…… 해민 씨도 왔네.”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며 이정이 조금 싸늘한 말투로 아는 척을 했다. 그런 얼굴로 인사할 거면 그냥 아는 척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네, 안녕하세요. 또 뵙네요.”
“그러게. 해민 씨는 내 말이 말 같지 않은가 봐. 환이는, ……환이는 밥 먹고 형이랑 이야기 좀 할까?”
거의 시비조로 내 인사를 받은 이정이 고개를 돌려 이환에게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환이 모른 척, 못 들은 척, 안 보이는 척 딴청을 피웠다.
“환아? 형 목소리 안 들리나?”
“…….”
“형이랑 대화하기 싫어?”
“…….”
저 정도면 그냥 싫은 게 아니라 아주아주 너무너무 매우 심히 싫다는 수준인데.
하지만 이정은 포기를 모르는 남자였다.
“그러니까 쟤가 왜 여기 있는데!”
“냅 둬. 어차피 아빠 내려오면 끌려 나갈 테니까. 아침부터 떽떽거리는 네 목소리를 들어야겠냐.”
“닥쳐.”
“너나 닥쳐.”
“우리 환이, 형이랑 말 안 할 거야?”
“…….”
“입 닥쳐.”
“너나 입 닥쳐.”
“산타할아버지가 선물 안 줬다고 시무룩한 거야?”
“…….”
“죽는다, 진짜.”
“죽인다, 진짜.”
혼란스러웠다.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았지만, 주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탓에 대화에 끼어들지 않아도 충분히 혼란스러웠다. 이런 상황에서도 평온하게 앉아 있는 이정의 와이프와 돌부처 흉내를 내고 있는 이환의 평정심이 순간 부러워졌다.
어릴 때 명상을 많이 하셨나. 딱 봐도 보통 내공이 아니었다.
“새해부터 시끄럽구나.”
와글와글 시끌벅적한 식당에 묵직한 목소리가 깔렸다. 시장바닥보다 더 시끄럽던 목소리들이 단숨에 사라졌다.
정각 여섯 시에 식당으로 내려온 회장님과 회장 사모님이셨다. 식당 안을 둘러보던 회장님과 시선이 마주쳤다. 순간 꿈틀거린 눈썹이 못마땅한 속내를 표했다.
본인이 불러 놓고 왜 저런 표정이시지.
진짜 올 거라고 생각을 안 하신 건가. 언제 밥 한번 같이 먹자, 라는 한국인의 인사 같은 거였는데 눈치 없이 냉큼 와 버린 건가. 나한테는 그냥 예의상 한 말이었고, 눈치껏 알아서 이환만 보내라는 뜻이었던가.
문자메시지를 받은 어제도, 식사 자리에 참석한 지금도 여전히 회장님의 의중은 미스터리였다.
이러다 진짜 내 떡국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을 느꼈다.
오라고 말은 했지만 진짜 올 줄 몰라서 떡국을 딱 식구 수에 맞게 만들었어요. 이를 어쩌나. 심지어 떡국을 하는 바람에 남는 찬밥도 없네.
그리고 이씨 집안 사람들이 떡국 먹는 걸 멀뚱멀뚱 구경만 시키는 거지.
……이건 너무 나갔나.
다행히 그 정도로 없어 보이는 짓은 하지 않는다는 이환의 말처럼, 얌전히 앉아 있자 떡국이 차례차례 사람들 앞에 놓였다. 당연히 내 앞에도 소고기가 들어간 떡국이 놓였다. 하얗고 노란 고명까지 완벽한 떡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