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순식간에 현실로 돌아왔지만, 그렇다고 아쉽다거나 미련이 남지는 않았다.
단 한 번도 현실이 좋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오늘만큼은 현실도 아늑했다. 편안하고, 따뜻했다.
쭉 기지개를 켜며 서서히 피로가 몰려오는 몸을 일으켜 욕실로 향했다. 따뜻한 물로 몸을 적시자 노곤함이 강해졌다. 몇 시간 동안 이리저리 뛰고 돌고 구른 탓에 쌓인 먼지와 땀을 씻어 냈다.
물기를 충분히 닦아 낸 뒤, 여사님이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아침에 주셨던 잠옷을 꺼내 입었다. 보라색처럼 보이기도 하고 회색처럼 보이기도 하는 오묘한 색깔이다. 부들거리는 감촉이 묘하게 간지럽기도 하다.
난생처음 입어 보는 잠옷이 어색해서 괜히 부들거리는 옷감 위를 손으로 몇 번 쓸어 보았다.
이러고 내려가도 되려나.
잠옷은 누워서 잘 때만 입는 옷이 아닌가.
이걸 입고 돌아다녀도 되는 곳은 어디까지일까.
난생처음 입어 본 잠옷의 허용 범위를 알 수 없어서 잠깐 고민했다.
“와인 한 잔 마시고 자자고 했으니까…….”
이대로 내려가도 되겠지.
침실에서만 입는 옷이라면, 자다가 일어나서 물 마시러 내려갈 때마다 잠옷을 갈아입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듯싶었다.
조심조심 일 층으로 내려가자, 이환이 먼저 내려왔는지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 하세요?”
“내려왔습니까. 그 잠옷 입었네요?”
“네. 잠옷 입고 내려와도 되는지 한참 고민했어요.”
“뭐 그런 거로 고민합니까.”
그렇게 말하는 이환은 잠옷 바지에 나이트가운을 대충 걸치고 있었다. 그런 거로 고민 안 하는 사람다운 차림이었다.
생각해 보니 저 사람은 잘 때 속옷 한 장만 입고 잤었지.
“도와 드릴까요?”
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환 너머를 눈짓하며 다가가자, 그가 옆에 챙겨 둔 와인 병과 와인 잔을 손짓했다.
“그러면 이것만 옮겨 줄래요? 금방 나가겠습니다.”
“네.”
보니까 치즈를 썰고 있었다. 안줏거리를 준비하는 모양이다.
와인과 와인 잔을 들고 거실로 나가자, 테이블 위에 놓인 케이크가 보였다. 언제 전원을 켰는지 크리스마스트리의 전구가 반짝거리고, 벽난로 속 장작에는 불이 붙어 있었다.
엄청 부지런히 움직이셨네.
케이크 옆에 와인과 와인 잔을 내려놓고 벽난로 앞에 쭈그리고 앉아 나무 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잠시 멍 때리고 있자 과일과 치즈를 가지고 나오던 이환이 쿡쿡 웃었다.
“신기합니까?”
“네?”
“엄청 집중해서 보고 있길래요.”
집중해서 보고 있는 게 아니라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있었던 건데.
“불 보고 있으니까 뭐랄까, 최면에 걸린 것처럼 멍해졌어요.”
내 의도가 아니었다고 슬며시 변명을 했다.
작게 뻥 소리를 내며 와인을 봉하고 있던 코르크 마개가 빠졌다. 벽난로에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앉게 한 이환이 잔에 와인을 따라 건넸다. 테이블 위에 놓아두었던 케이크와 과일 치즈 안주도 바닥으로 내렸다.
“메리 크리스마스.”
가볍게 잔을 부딪치며 이환이 속삭이듯 말했다.
“실장님도…… 메리 크리스마스요.”
어색하게 따라 인사를 하자 이환의 입술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더워서 그런지 목이 타는 기분이 들어 꿀꺽꿀꺽 와인을 삼켰다. 크, 하고 소리를 내자 이환이 키득거리며 치즈 조각을 내 입에 넣어 주었다.
“와인을 물처럼 마시는 사람은 종종 봤는데, 소주처럼 마시는 사람은 해민 씨가 처음입니다.”
“이게…… 좀 독한 것 같아요.”
“많이 독합니까? 괜찮은 와인이라 해민 씨랑 같이 마시고 싶었는데, 도수가 좀 높았나 보네요. 너무 독하면 다른 거 마십시다.”
좋은 거라서 그런가. 아니면 좋은 거라는 말을 들어서 그런가. 뭔가 좀 깊은 맛과 향이 느껴지는 듯도 했다. 예전에 아르바이트했던 식당 사장님이 오 년 정도 묵힌 놈이라며 한 잔씩 맛보게 해 준 복분자주처럼 독하고 깊은……. 그것과는 좀 다른가.
“괜찮아요. 마실 만해요. 맛있어요.”
“그래도 너무 많이 마시지는 말아요. 저번처럼 병나발 불다가는 금방 취합니다.”
저번이 언제인지는 듣지 않아도 명확했다. 강원도 별장으로 놀러 갔을 때를 떠올리며 눈 끝을 찡그렸다.
“케이크 먹어요.”
포크를 손에 쥐여 준 이환이 잔잔하게 음악을 틀어 놓고, 언제 챙겨 왔는지 커다란 숄을 내 어깨에 걸쳐 주었다.
“실장님……, 저 좀 더운데요.”
사실 많이 더웠다.
보일러가 빵빵하게 돌아가고 있고, 면전에서는 벽난로가 활활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고, 두어 모금 들어간 술로 인해 몸 자체에서도 슬슬 열이 오르는 탓이었다.
“아, 그래요?”
잠옷만 입고 있어서 추울까 봐.
머쓱한 표정으로 변명한 이환이 걸쳐 주었던 숄을 회수해 소파로 던져 버렸다. 그 움직임에 약간의 심술이 섞여 있음을 알아차리고 웃음을 삼켰다.
나는 이환을 위로하는 대신 포크로 케이크를 떠서 그의 입에 대 주었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환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살짝 입술을 벌려 케이크를 삼켰다.
“잊지 못할 크리스마스일 거예요.”
“그렇습니까.”
“전세 낸 영화관과 놀이공원. 누구라도 잊을 수 없을 것 같은데요.”
“다른 누구의 감상보다는 해민 씨의 만족이 내겐 더 중요합니다. 오늘, 괜찮았습니까?”
괜찮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아닌 누구라도 괜찮다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도 무척이나 괜찮았다.
“네. 엄청, 많이 괜찮았어요.”
“다행이네요.”
“크리스마스 새벽에 잡은 도둑도 인상 깊었고.”
“크흠.”
“벽난로가 오랜만에 제 역할을 하는 것도 보고.”
“여사님은 애물단지라고 생각하실 테지만. 해민 씨라도 만족하니 다행입니다.”
순간 여사님의 반응이 상상되어 웃음이 나왔다. 사슴도 치를 떠셨지. 벽난로 청소할 때도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이환의 동심을 지켜 주고 싶었던 여사님이라도 무심결에 나오는 한숨을 감출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앞으로는 벽난로도 사슴도 더는 필요 없겠죠?”
“사슴은 왜요? 사슴 안 좋아합니까?”
벽난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나온 사슴에 이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사님에게 사슴이 애증의 존재라는 사실을 모르기에 나온 반응이었다.
“저 사슴은 해외 유명 조각가의 작품입니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한국 들여올 때까지 보관과 이송 비용이 상당히 들어갔죠.”
“몸값이 비싼 사슴이네요.”
그 사슴에 전구를 돌돌 말아서 크리스마스용 루돌프를 만들다니. 몸값 비싼 사슴의 용도로 정말 괜찮은 건지 의문이 들었다.
“사슴 말고 혹시 다른 동물 좋아합니까?”
“왜요?”
“해민 씨가 좋아하는 동물로 의뢰를 넣을까 해서요.”
“괜찮습니다. 사슴으로 충분할 것 같아요.”
사슴도 치를 떠는데 다른 동물이 오면 여사님이 질색하시지 않을까. 그나마 사슴은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쓰기라도 하지. 다른 동물 조각품은 어떤 용도로 써야 할지도 의문이다.
정중하면서도 단호하게 거절한 뒤, 케이크를 안주 삼아 와인 한 병을 이환과 나눠 마셨다.
“확실히 도수가 높아요.”
열이 오르는 뺨을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서서히 오르는 술기운 때문일까. 어쩌면 얼굴 앞에서 타오르는 불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벽난로가…… 은근히 덥구나.
슬쩍 엉덩이를 뒤로 밀어 벽난로와 거리를 벌렸다.
“피곤해서 술기운이 더 빨리 도는 모양입니다.”
러그 위로 쓰러져 굴러다니는 와인 잔을 집어 든 이환이 빈 와인 병과 케이크 판, 먹다 남긴 안주 접시를 차곡차곡 겹쳐 들었다.
설거지는 내일 해야겠다.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면 안 되지만, 오늘은 크리스마스잖아.
만사가 귀찮아진 마음을 모른 척하며 크리스마스 핑계를 대 본다. 크리스마스라 놀이공원도 전세 내 보고, 크리스마스라 도둑이 담도 넘었는데. 설거지를 하루, 아니, 반나절 미루는 것 정도는 애교 수준에 속하지 않을까.
빈 접시와 와인 잔을 주방으로 옮겨 놓고 온 이환이 내 입안으로 무언가를 쏙 넣어 주었다. 입안에 번지는 차가움에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왜 갑자기…….”
“더워하는 것 같아서요.”
동그란 얼음을 혀로 굴리다가 까드득 씹었다. 단단한 얼음이 부서져 빠르게 녹아내린다.
“이제 올라가서 잘까요? 눈에 졸음이 가득합니다.”
“졸린 거 아니에요. 그냥, 따뜻해서 그래요.”
사실 따뜻하기보다는 뜨거운 것에 가까웠다. 술 때문에 속에서 열이 오르고, 보일러를 얼마나 올려놨는지 엉덩이로도 열이 오르고, 코앞에서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로 인해 얼굴로도 열이 올랐다.
한겨울에 더워 죽겠는 기분이라니. 이전이었으면 호사라고, 복에 겨웠다고 혀를 찼을 텐데. 지금은 다 모르겠고 그냥 더웠다.
“실장님.”
“네, 해민 씨.”
“보일러 좀 내려 주세요. 엉덩이가 뜨거워요.”
“……그럽시다.”
웃음을 참아 내듯 입술을 꾹 다문 이환이 실내 온도를 조절했다.
“감기 걸릴까 봐 온도를 좀 높여 놨는데, 많이 더웠나 봅니다.”
왜 그러셨어요.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 왜 엉덩이를 뜨겁게 만든 거죠.
“많이 더우면 벽난로도 불을 죽일까요?”
“아뇨. 더 구경하고 싶어요.”
덥지만 그래도 보고 싶다. 타닥타닥 나무 타는 소리도 듣기 좋았고, 활활 타오르는 빨간 불길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무념무상의 상태로 몽롱해지는 기분도 좋았다.
“그럼 불편하게 앉아 있지 말고 누워요.”
내 어깨를 감싼 이환이 러그 위로 몸을 밀어 눕혔다. 옆으로 스르륵 쓰러지는 몸에 당황하다가 머리를 단단히 받쳐 주는 팔을 느끼고 편안하게 발을 뻗었다.
이환의 가슴에 등을 맞대고 누워 벽난로를 바라보았다.
은은하게 이어지는 음악 소리와 귓가에서 들리는 나직한 남자의 숨소리가 고막을 간지럽혔다.
두근두근 전해져 오는 심장의 울림을 느끼며 고개를 틀었다. 다부진 턱이 보였다. 그 턱 끝에 살며시 입술을 붙여 눌렀다.
“부회장님이 왜 산타를 포기 못 하는지 조금 이해가 될 것 같아요.”
“이 타이밍에 왜 이정 이야기를 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