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그럴 마음만 생긴다면, 진짜 그대로 실행하실 것 같아요.”
“원하면 언제든 말해요. 아버지 돌아가실 때까지 시간 많이 남았으니까.”
내가 보기에도 그러했다.
이정의 나이가 마흔이라고 했나. 그럼 회장님이 못해도 환갑은 넘으셨다는 이야기이고. 요즘 평균 수명이 한 여든 정도 되려나. 사고만 조심하면 앞으로 한 이십 년은 너끈히 더 사실 테니까, 이환이 왕자의 난을 준비할 시간도 이십 년은 된다는 뜻이다.
“실장님은…….”
가끔 보면 가족애가 소멸한 사람처럼 냉정하게 말을 한다. 누가 봐도 효자라는 말이 나오지 않을, 불효자 같은 면모가 가끔 보이는데. 생각해 보니 엄마가 빨리 죽기를 기도하는 내가 지적할 말은 아닌 듯하여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왜 말을 하려다 맙니까?”
“제 주제에 할 말이…….”
아닌 것 같다고 말을 하려다, 어느새 코앞으로 가까워진 집 앞에 경광등이 번쩍거리는 경찰차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저건 뭘까.
이 새벽에, 여사님도 콘서트를 보고 호텔에서 하루 쉰 뒤에 오신다고 하셔서 비어 있을 집 앞에 왜 경찰차가 서 있는 걸까.
순찰 돌다가 기름이라도 떨어졌나. 아니면 운전하다 다리가 저려서 잠깐 쉬어 가려고 차를 멈췄는데 그게 마침 이환의 집 앞인 걸까.
“실장님, 저기…… 경찰차가 있어요.”
“그러네요.”
반응이 그게 전부야?
놀라거나 놀라거나 놀라야 하지 않아?
죄지은 게 없다고 해도, 내 집 앞에 경찰차가 서 있고 경찰이 서성이고 있으면 무슨 일인가 궁금하고 나쁜 일이 생긴 건 아닌가 걱정되고 그러는 게 일반적인 반응이 아닌가.
내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반응과 다르게 평온한, 과하게 평온한 이환을 보았다. 그는 천천히 속도를 줄여 경찰차의 뒤에 차를 세우고, 문을 열어 밖으로 나갔다.
“추우니까 여기 있어요.”
문을 닫기 전에 그리 말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얌전히 앉아 있기에는 궁금했다. 호기심은 고양이만 죽이지 않는다. 사람도 죽일 정도로 강력한 게 호기심이라는 놈이었다.
얼른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리자, 이환이 살짝 눈 끝을 찡그리더니 코트의 앞을 여미라는 시늉을 했다. 울 100퍼센트 코트라 그냥 걸치고만 있어도 따뜻한데. 버티다가 차 안에 격리될까 싶어 얼른 단추를 채우고 바람이 들어오지 않게 목깃까지 세웠다.
총총거리며 이환의 뒤에 바짝 붙어 걸었다. 밖으로 나온 경호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경찰들이 이환을 돌아보았다.
집주인이 어쩌고 하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무슨 일입니까.”
“무단 침입으로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경찰의 말에 이환이 경호원들을 보았다. 경호원 중 한 명이 다가와 이환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가만히 듣고 있던 이환이 픽,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차에 앉아 있는 저 사람입니까?”
경찰차 뒷좌석에 앉아 있는 남자를 턱으로 가리키며 묻자 경찰이 고개를 끄덕였다.
경찰차 안에 시무룩하게 앉아 있던 남자가 이환을 보고 두 손으로 창문을 두드리며 고함을 질렀다. 입을 벙긋거리며 다급하게 말을 내뱉는데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소리 없는 아우성을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네. 그런데…… 선물을 주러 왔다고 합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선물을 주러 남의 집 담장을 넘어요? 변명이 참신하네.”
“실제로도 훔친 것은 없고, 가방에 선물 상자가 있었습니다.”
“담 넘어서 붙잡혔다면서요. 집에 들어가기도 전이었으니 훔치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한 게 아닙니까. 집이 비어 있을 때를 노렸네요. 계획적이기까지 하고. 아주 죄질이 무거운 놈입니다. 흉기는 들고 있지 않던가요?”
지나가는 개미를 보며 얘는 다리가 여섯 개네, 하는 말투로 이환이 물었다. 한마디로 화가 났다거나 놀랐다거나 걱정스러운 감정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무심한 말투였다.
“아, 예. 흉기는 없었습니다.”
그걸 경찰들도 느꼈는지 이환의 눈치를 보며, 조금 더 자세히 말하면 도둑보다 이환을 더 꺼림칙하게 여기며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연행하시죠. 아침에 변호사 보내겠습니다.”
“변호사요?”
“네. 민사, 형사 다 넣을 겁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도둑이라니, 무서워서 잠을 잘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매년 크리스마스 때마다 오늘 일이 생각나겠군요. 트라우마가 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정신적 피해 보상도 받아야 할까요.”
“…….”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으나 경찰들의 표정으로 속마음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미친놈인가?
뭐 그런 생각을 하고 있겠지.
“이 동네 치안이 좋다는 말도 믿을 게 못 되나 봅니다. 대담하게 담 넘는 도둑도 있고.”
여기서 십 년 넘게 산 사람이 마치 갓 이사 온 사람처럼 한탄했다. 할 말이 많은 얼굴로 꾹꾹 눌러 참은 경찰들이 무단 침입자를 경찰차에 태운 채 사라졌다.
내일 아침에 변호사님이 고생을 하시겠군.
멀어지는 경찰차의 뒤꽁무니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추운데 왜 나와서 서 있습니까. 감기 들기 전에 얼른 들어가죠.”
멍한 얼굴로 서 있노라니 나를 향해 몸을 돌린 이환이 타박했다. 자동차 키를 경호원에게 건넨 이환이 내 어깨를 끌어안고 대문을 넘었다.
“진짜 도둑일까요.”
도둑인지 아닌지는 무단 침입자 본인만 알겠지만, 그냥 그렇게 물었다. 이환의 생각이 궁금해진 탓이었다.
“아닙니다.”
“……네?”
방금까지 도둑이라고 박박 우기며 아침에 변호사까지 보내겠다던 사람이 이환인데, 아니라고?
“형이 보낸 사람일 겁니다.”
“그럼 가방에 들어 있었다던 선물은…….”
“진짜 선물이겠죠. 형이 보낸.”
“아니, 선물을 그냥 정상적인 방법으로 주면 안 돼요? 무슨 선물을 담 넘어서 주려고 그래.”
“산타클로스 역할에 심취해서 그럽니다. 매년 그런 식으로 선물을 남겼거든요. 전문적으로 담 넘고 문 따는 기술을 가진 사람을 고용해서.”
그걸 보통 도둑이라고 하지 않나.
동생 선물 하나 주겠다고 도둑을 고용해서 담을 넘게 만드는 이정의 정신 상태를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걸 시키는 사람이나, 시킨다고 하는 사람이나…….”
“너무 그러지 맙시다. 저 사람도 이정이 말도 안 되는 일을 시켜서 많이 당황했을 겁니다.”
“그래도 결국 한 거잖아요. 매년 그랬다는 건,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는 말이잖아요.”
“일 년에 한 번뿐이고, 특수 아닙니까. 가서 뭘 훔쳐 오라는 요구도 아니고, 한번 해 보니 뒤탈도 없는 듯하고. 보너스 받는다고 생각했겠죠.”
그랬는데 오늘 뒤통수를 맞은 거네. 남의 집 담을 넘고 뭐가 그렇게 억울해서 경찰차 창문을 두드리며 소리를 지르나 했더니. 속사정을 모르는 도둑, 아니, 산타클로스 대역으로서는 억울한 마음이 들 법도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남의 집 담을 막 넘고, 집 안에도 막 들어와도 돼? 그걸 시키는 사람이나 그걸 눈감아 주는 집주인이나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 번 정도는 했어야지. 돈을 얼마나 받았는지는 모르겠으나 남의 집에 무단 침입을 하는 건데, 그렇게 생각 없이 해도 될 일이겠냐고.
“그런데 왜 이번에는…… 신고하신 거예요? 일부러 경호원들한테 잡으라고 하고 집 비우셨던 거죠?”
“이제는 이정의 헛짓거리를 두고 볼 이유가 없으니까요. 심부름 보낸 사람이 잡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많이 속상하겠죠?”
저런, 어쩌나. 하고 이환이 혀를 찼다.
과연 속상해할까.
자기가 한 일은 생각하지 않고, 감히 선물을 보내 줬는데 이런 식으로 일을 망쳐? 하면서 엄청 화를 낼 것 같은데.
이정도 참 웃긴 사람이다. 언제는 나한테 찾아와서 올해는 이환이 나쁜 짓을 많이 해서 산타클로스가 선물을 안 줄지도 모르겠다느니, 이환이 실망할지도 모르겠다느니 하는 개소리를 해 놓고선. 그래도 선물은 용케 보냈다.
결국 자기만족이라는 거지.
이환이 착한 일을 했든 나쁜 일을 했든 애초에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저 산타할아버지가 선물을 놓고 갔다고 착각하는 동생의 동심을 즐기고 싶었던 거다.
그 즐거움을 이환이 깨부쉈으니, 이를 아득바득 갈며 또 찾아오려나.
“부회장님은 정말, 포기를 모르시는 분이네요. 전 이 일이 어떻게 마무리될지 궁금해지기 시작했어요.”
“저도 그렇습니다. 아버지가 장담하신 만큼 형을 잘 타일러야 할 텐데. 마흔 먹은 아들이 아버지 말을 잘 듣는 효자가 아니라서 조금 걱정되네요.”
“……진짜 걱정되세요?”
목소리에 영혼이 없는데? 조금도 걱정되지 않는 말투인데?
“네, 이러다 내가 강경한 방법을 택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강경한 방법은 뭘까.
살짝 궁금해져서 물어보려는데 현관문을 연 이환이 나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집이네요.”
“네, 집입니다.”
반나절 외출을 하고 왔을 뿐인데도 편안하고 아늑했다. 내 집은 아니지만, 내가 머무는 곳이라는 생각만으로도 안정감을 느꼈다.
“마법이 아직 안 풀렸나 봐요.”
“마법?”
“갑자기 몸이 노곤노곤해져요.”
“저런. 실컷 놀았으니 피곤할 만도 하죠. 따뜻한 물로 씻고 잡시다.”
“졸리지는 않고요. 그냥 노곤노곤, 흐물흐물 그래요.”
빳빳하게 말랐다가 물을 머금은 해파리가 이런 느낌일까.
“씻다가 잠드는 거 아닙니까? 씻겨 줄까요?”
나란히 이 층 계단을 오르며 이환이 물었다. 담백한 목소리와 달리 그 내용이 심히 불건전해서 딱 잘라 거절했다. 시무룩한 얼굴을 했지만, 큰 타격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애초에 별 기대도 안 한 듯싶다.
“씻고 내려와요. 크리스마스니 와인 한잔하고 잡시다.”
씻다가 잠들지 말라는 염려와 함께 방문 앞에서 헤어졌다. 방 안으로 들어와 코트를 벗고 잠시 침대에 걸터앉았다.
마법이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비록 신데렐라도 아니고, 자정을 훌쩍 지난 새벽인데다 유리 구두도 호박 마차도 없지만.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앨리스도 아니고, 시계를 든 토끼도 트럼프 병사도 없었지만.
지난 몇 시간 동안 환상 속에 빠진 기분을 느꼈다. 구름을 밟고 허공에 둥실둥실 떠 있는 기분. 커다란 민들레 씨앗을 붙잡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기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