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초등학교 소풍 때였나, 그랬을 거예요. 중학교 때는 무슨 산 갔었던 것 같은데, 무슨 산이었는지는 기억 안 나고요.”
“엄청 오래전이네요.”
“그래도 바이킹이랑 회전목마 탔던 건 아직도 기억나요.”
자유이용권은 아니고 몇 가지를 골라 타는 티켓이었다. 평일 낮인데도 사람들이 엄청 많아서 길게 줄을 서서 기다렸었지. 소풍이었지만 언제나처럼 엄마는 도시락을 챙겨 주지 않았고, 모아 둔 비상금으로 동네 분식점에서 김밥 한 줄을 사 와 점심을 대신했던 기억도 난다.
“출발합니다.”
직원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들려왔다.
앉아 있던 바이킹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괘종시계의 추처럼 왔다 갔다 하며 배가 허공으로 떠오른다. 맨 끝자리에 앉은 탓에 가장 위로 올라갔다가 가장 아래로 끌려 내려왔다. 붕붕 거센 바람이 얼굴을 때려 댔다. 오금이 저리고 속이 울렁거린다. 터지는 비명을 내질렀다.
하늘로 튕겨 오르듯 떠오르던 바이킹은 한참 후에야 서서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머리는 봉두난발이 되고 여전히 허공에 떠올라 있는 듯한 부유감이 느껴졌다.
모든 생각이 흩날려 사라졌다.
“하하하하하.”
비명을 내질렀던 입에서 웃음이 터졌다. 가슴을 크게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면서도 웃음을 그치지 못하자, 언제부터였는지 꽉 맞잡고 있던 손을 끌어당기며 이환이 내 얼굴을 살폈다.
“재미있어서 웃는 겁니까, 무서워서 웃는 겁니까.”
무서워서 웃는 건 그냥 실성한 거 아닌가.
“재미있어서요. 지금 속이 뻥 뚫렸어요.”
“의외로 겁이 없네요.”
그러는 이환도 겁을 내는 얼굴은 아니었다. 나처럼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고, 딱히 즐거워하며 웃지도 않았다.
놀이기구 타면서 무표정한 사람이 바로 옆에 있었네.
“새로운 놀이기구가 많이 생겼다는데, 그래도 놀이공원 하면 바이킹인 것 같아요.”
“클래식은 영원한 법이죠.”
“새로운 놀이기구도 타 보고 싶어요.”
“안 될 것 있습니까? 기다릴 필요도 없는데, 전부 다 타요. 이렇게 돌면서 순서대로 하나씩 타 보면 되겠네.”
오로지 나를 위해 존재하는 시간이라고 속삭이는 이환의 목소리에 진짜 환상의 세계에 들어온 기분을 느꼈다.
맞잡은 손을 놓지 않고 우리는 둘만의 놀이공원을 걸었다.
∞ ∞ ∞
“지쳤습니까?”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이환이 물었다.
“네. 안 놀아 봐서 몰랐는데, 노는 것도 힘든 일이었어요.”
내 대답에 이환이 큭큭 웃었다.
이환의 말대로 나는 놀이공원의 거의 모든 놀이기구를 타 보았다.
몇 번이나 하늘로 솟구쳤다 땅으로 꺼지기를 반복했는지 모른다. 공중에서 자유 낙하를 하거나 옆으로 빙글빙글 도는 것도 모자라 위아래로 뒤집어지기도 했다.
산발이 된 머리를 이환이 정리해 주었으나, 빠져나갔던 혼의 절반은 돌아오지 않은 기분이다.
그래도 재미있었지.
몸이 추락하며 심장이 떨어지는 기분을 느끼는 스릴 넘치는 놀이기구도 좋았지만, 아이들이나 탈 법한 범퍼카를 운전하며 여기저기 쿵쿵 박아 대는 것도, 빙글빙글 돌아가는 동물 등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회전목마를 타는 것도 즐거웠다.
나와 이환 둘만을 관객으로 두고 뻥뻥 터지는 폭죽놀이도 구경했고, 퍼레이드처럼 썰매로 꾸민 차 위에 앉아 등장한 산타클로스가 선물로 내 얼굴만 한 롤리팝을 선물로 주기도 했다.
사탕이 그렇게 무거울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졸리지는 않고요?”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이라 이환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직까지 심장이 쿵쿵 뛰어서 잠이 안 와요.”
“그러게요. 지금도 얼굴이 상기되어 있습니다.”
이환의 손이 뺨에 닿았다. 시원함이 느껴졌다. 그제야 내게서 열이 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어디가 아프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흥분, 열기, 쾌감 같은 짙은 감정들이 나도 모르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을 뿐이다.
“해민 씨가 이 정도로 격하게 감정을 표현하는 건 처음이네요. 확실하게 즐긴 것 같아 뿌듯합니다.”
이환의 말처럼, 오늘의 나는 평소의 나답지 않았다.
소리 내어 크게 웃어 보았고, 놀이공원이 떠나갈 정도로 꽥꽥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저게 타고 싶다고 먼저 주장하기도 하고, 이건 한 번 더 타고 싶다고 욕심을 내기도 했다.
“아무 생각 없이, 아무 걱정 없이, 마음 편하게 논 건 처음이었어요.”
돈 걱정을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항상 쫓기듯 느껴지던 시간도 오늘만큼은 여유로웠고,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가 없었으며, 병원에 있는 엄마를 생각하지 않아도 좋았다.
머리를 비우고, 걱정을 내려놓고, 발길 닿는 대로 걸으며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환의 말처럼 나만을 위한 시간이었고, 나만을 위한 장소였다.
“이런 걸 재벌 남친의 클래스라고 한다죠.”
예고 없이 나온 농담에 웃음을 터뜨렸다.
“확실히…… 재벌의 클래스이긴 해요.”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기도 했고, 보석이 박힌 귀금속을 선물 받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감탄하면서도 부담스러운 마음을 느꼈지만, 오늘만큼은 순수하게 놀라기만 했다. 차원이 다른 돈지랄이라 부담감을 느낄 정신이 없는 쪽에 가까웠다.
놀이공원이다. 심지어 땅값 비싼 서울 중심에 있는 놀이공원. 육십 넘은 노인들도, 다섯 살 아래의 아이들도 아는, 이름만 들어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놀이공원. 하루 입장객이 몇천 명은 될 법한 인기 놀이공원.
비록 정상 영업이 끝난 뒤의 시간이라지만, 그 놀이공원을 단독으로 대여하여 마음껏 누비고 다니게 해 준 이환의 스케일이 감탄스러웠다.
“진짜로, 마법과 환상의 세계에 빠진 기분이었어요. 현실성이 없어서 마음껏 즐길 수 있었나 봐요.”
“해민 씨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좋네요. 다음에 또 갑시다.”
“오늘 한 번으로 충분해요. 사람은 현실에서 살아야 하는 법이잖아요.”
언제나 환상 속에서 살 수는 없다. 그건 그냥 미친놈이지.
“사람들은 누구나 마법 같은 일을 꿈꿉니다. 내가 마법을 부리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돈을 좀 투자하면 마법 비슷한 일은 경험시켜 줄 수 있습니다.”
“재벌의 클래스로?”
“네. 재벌의 클래스로.”
“회장님이랑 척져서 재벌가에서 쫓겨나는 거 아니었어요?”
“척지기 전에 많이 챙겨 뒀습니다. 그리고 재벌가에 잔류하든 쫓겨나든 어차피 쓰는 돈은 내 돈이고, 딱히 척지지 않았더라도 아버지는, 아니, 아닙니다.”
이야기가 너무 멀리 갔다며 뒷말을 삼켰으나,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짐작이 갔다.
“부회장님한테 다 줄 거라고요?”
“그렇죠. 그것도 죽기 직전에 물려주시겠죠. 끔찍이 여기는 장남이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것을 나눌 사람은 아닙니다. 아버지에게 후계자는 자신의 사후에도 본인과 SG의 이름이 지워지지 않게, 대대손손 이어지게 만들 분신의 다른 말입니다. 아버지가 살아 있는 시간에는 쓸 일이 없는 스페어죠.”
“자식이고 첫째라서 아끼는 마음은…….”
“그런 가족의 정이 있었다면 장남의 정신병부터 치료했겠죠.”
가족의 정이 있어서 이정을 정신 병원에 집어넣지 못한 게 아닐까.
같은 결과를 보면서도 이환과 나의 판단은 달랐다. 나야 뭐 옆에서 주워듣고 본 것으로 내린 판단이지만, 이환은 같은 집에서 생활하며 내린 판단이니 이환이 맞겠지.
“부회장님도 이상하지만, 회장님도 이상하고 실장님도 이상해요.”
“제가요?”
이정과 회장님이 이상하다는 건 동의하는 건가. 하지만 본인이 이상하다는 말에는 절대 동의할 수 없다는 듯 이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보통 재벌가에서는 자식들끼리 후계자 자리를 놓고 쟁탈전을 벌이지 않아요? 재벌가 왕자의 난이 괜히 있는 소리가 아니잖아요. 자식들 중에서 제일 잘난 자식한테 물려주는 게 맞는데 일찌감치 장남을 후계자로 정해 놓고 오냐오냐하는 회장님도 이상하고, 무보수로 출근해서 열심히 일하셨으면서도 회사에 욕심이 없는 실장님도 이상해요.”
“오, 뭔가 디테일한 의문 제시인데, 이것도 드라마에서 본 겁니까?”
“소설에서도 봤어요.”
휴대폰 메신저 앱과 연동되는 콘텐츠 앱이 있다. 소설과 만화가 올라오는 모바일 플랫폼인데, 가끔 멍하게 앉아 휴식을 취할 때 보기 좋았다. 예전에야 몸이 힘들어서 엉덩이 붙이면 자기 바빴지만, 요즘은 일이 힘들지 않고 휴식 시간도 많아서 가끔 들어가 소설 한두 편씩 읽곤 했다.
“소설에서는 후계자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전쟁을 하던가요?”
“실장님도 읽어 보셨어요?”
“아뇨. 해민 씨가 그런 뉘앙스로 말을 하기에. 뭐, 실제로도 그런 집안이 많습니다. 아버지가 회장님이면 자식들이 다들 한 자리씩 차지하고 싶어 하고, 뭐라도 하나 더 얻어 내고 싶어 하고.”
“역시, 현실도 비슷할 것 같았어요. 그런데 왜 실장님은…….”
“나는 내 성격을 너무 잘 알고, 아버지 성격도 잘 알거든요. 형을 후계자라고 못 박아 놓았지만, 아버지가 물러나는 건 돌아가실 때일 겁니다. 그때까지는 형도 이름뿐인 부회장이죠. 아버지 이름값을 드높이기 위한 회사를 물려받고 싶지도 않고, 그런 회사를 차지하겠다고 아버지 돌아가실 때까지 살살거리기엔 내 비위가 약합니다.”
“그래도 SG 그룹 정도면 비위 좀 맞춰 줘도 이득 아닌가요?”
내 말에 이환이 큭, 하고 웃음을 흘렸다.
“SG가 욕심납니까? 해민 씨를 위해서 확 먹어 버릴까요?”
“회장님이 차남에게는 줄 마음도 없으시다면서요.”
“그래도 자식이니 욕심내면 유산으로 작은 계열사 한두 개는 떨어질 거고. 아버지 돌아가신 뒤에 작업 조금 하면 SG를 조각내는 건 일도 아니고. 그렇게 난도질한 계열사 하나하나 모아서 합치면 그게 SG가 되겠죠. 그 와중에 형이랑 이사 몇 명 검찰청 구경시켜 주면 조각 모음한 SG는 더 단단해지고 내 자리는 더 탄탄해지고.”
급조해서 내뱉은 농담이라기엔 너무 살벌하다. 순식간에 SG가 해체되었다가 합체하고, 이정이 검찰청을 들락거렸다. 이 사람, 이런 상상 몇 번 해 본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