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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튼 퓨리티 (134)화 (134/172)
  • 134화

    점심을 차려 주신 여사님은 빠르게 준비하여 외출을 하셨다. 집을 떠나는 여사님의 뒷모습이 묘하게 홀가분해 보였다.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 국민 트로트 가수 송도연의 콘서트가 있는 날이었다.

    꼭 가고 싶은 건 아니지만, 하고 내뱉는 말과 달리 여사님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평소와 달리 화사한 색상의 옷차림도 떠올랐다.

    “팬심은 나이를 가리지 않지.”

    픽 웃으며 식기세척기에서 식기를 꺼내 정리했다.

    “네?”

    냉장고를 뒤적거리며 과일을 꺼내 온 이환이 물었다.

    “여사님이요. 여전히 청춘이시라고요.”

    내 말에 이환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망고 어때요.”

    “좋아요.”

    목요일의 크리스마스이브는 묘하게 여유로웠다.

    오늘은 이환이 출근하지 않는 날. 내일은 크리스마스라 쉬는 날. 모레는 토요일, 글피는 일요일. 쭉 집에 있는 나와 달리, 띄엄띄엄 출근하는 이환에게는 금요일의 크리스마스가 황금 같은 연휴를 가능케 했다. 그래서 이환의 기분이 더 좋아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실장님.”

    “네.”

    칼로 자른 망고를 접시에 담던 이환이 한 조각을 내 입에 넣어 주며 생긋 웃었다.

    그림 같은 얼굴, 조각 같은 미소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잘생긴 미남이 나를 보며 웃는 모습은 여전히 어색하고 조금은 민망하고 살짝 간지러운 기분을 느끼게 했다.

    “저희…… 파티 언제 해요?”

    크리스마스 파티는 정확히 크리스마스 당일이 아닌 크리스마스이브에 한다고 했던가. 그래서 은근히 기다리고 있는데, 이환은 점심을 먹은 뒤에도 외출을 준비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밤에요.”

    “밤이요?”

    “어디 보자. 지금 한 시니까, 좀 쉬다가 씻고 준비해서 여섯 시쯤 나가면 되겠네요.”

    일단 커피에 망고부터 먹고 소화도 좀 시킬 겸 뒹굴거리자는 그의 권유에 정리를 끝낸 식기세척기 문을 닫았다.

    저녁 식사는 평범했다.

    고급 레스토랑이 이제는 별것 아니게 느껴진다는 뜻은 아니다. 여전히 내 주제에는 감히 와 볼 생각도 못 할 곳이지만, 크리스마스이브에 어울리는 특별함이 존재하지는 않았다.

    이환을 따라와 몇 번이고 식사를 한 곳이기에 제법 익숙하게 그가 시켜 주는 코스 요리를 음미하며 배를 채우면서도 살짝 아쉬움을 느꼈다.

    테이블 위에 놓인 크리스마스 장식이나 흘러나오는 잔잔한 캐럴, 직원들이 쓰고 다니는 빨간 산타클로스 모자가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나게 했지만. 역시나 살짝 아쉽다.

    “왜요. 음식이 입에 안 맞습니까?”

    “아뇨. 맛있어요.”

    “맛있는 표정이 아닌데.”

    “맛있어요. 여기서 처음 먹었을 때도 맛있었고, 그 뒤에도 맛있었고, 지금도 맛있어요.”

    매일 여기서 밥을 먹어도 언제나 맛있을 터였다.

    “그럼 어서 먹어요. 잘 먹어야 돌아다닐 힘이 나지.”

    “돌아다녀요? 여기서 파티 하는 게 아니고요?”

    “해민 씨가 크리스마스 파티를 엄청 기대하고 있나 보네요?”

    “……조금요.”

    엄청은 아니고 조금. 사실 조금 많이.

    내 대꾸에 이환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파티 겸 데이트 겸 이벤트입니다.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이 시작이죠.”

    파티 겸 데이트 겸 이벤트라니. 거창하기도 하다. 겸사겸사 같이 하겠다는 건지, 파티도 하고 데이트도 하고 이벤트도 하겠다는 건지. 아리송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물었다.

    “……생일 파티처럼 한곳에서 하는 게 아니고요?”

    “코스별로 준비되어 있습니다. 다음 코스는 영화관 데이트예요.”

    “그다음도 있어요?”

    “당연하죠. 나는 준비된 남자거든요.”

    가슴을 쭉 내밀며 당당하게 말하는 이환의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믿음직스럽다.

    저렇게까지 당당하게 말한다면 믿을 수밖에 없지. 내가 봐 온 이환은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언제나 말한 것 이상을 보여 주는 남자였으니까.

    급격히 입맛이 돌아 허겁지겁 음식을 입에 밀어 넣었다. 조금 전에는 입에 맞지 않나 싶어 걱정하던 이환이 이제는 너무 급히 먹지 말라고 걱정하며 음료를 권했다.

    레스토랑에서 크리스마스 이벤트로 준비한 바이올린의 캐럴 연주까지 느긋하게 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환이 안내하는 대로 끌려가 영화관에서 영화도 보았다.

    캄캄한 상영관, 커다란 스크린, 수없이 많은 빈 의자들.

    마음에 드는 자리를 골라 이환과 나란히 앉아서, 들어오기 전에 샀던 캐러멜 팝콘을 먹으며 영화를 보았다.

    요즘은 집에서 티브이로도 볼 수 있고, 컴퓨터로도 볼 수 있는 게 영화인데. 굳이 영화관까지 와서 볼 이유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조금 있었다. 하지만 난생처음으로 오게 된 영화관에서 나는 커다란 화면과 꽝꽝 울리는 볼륨에 압도되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영화관에 와서 영화를 보는구나.

    팝콘을 먹는 것도 잊을 정도로 영화에 깊게 빠져들었다.

    “재미있었습니까?”

    영화가 끝나고 상영관을 나오며 묻는 이환의 말에 후아, 하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엄청, 재밌었어요.”

    “그런 것 같았습니다. 팝콘 먹는 것도 잊고, 옆에 내가 앉아 있는 것도 잊고 영화만 보던데.”

    “사실…… 저 영화관 와 본 거 처음이에요.”

    “그래요?”

    언제 영화관까지 가서 영화 볼 일이 있었어야지.

    지금까지 내 삶에 문화생활이 끼어들 틈은 조금도 없었다. 여유롭게 영화를 보러 다닐 시간도 없었고 돈도 없었다. 그런 건 하룻밤 숙소, 하루 끼니 걱정 없는 사람들에게나 주어지는 여유였다.

    “막 가슴이 찌르르찌르르? 쾅쾅 울리는 기분이었어요.”

    “소리가 크긴 컸죠.”

    그렇다. 자동차가 쾅쾅 들이박고 폭탄이 터지고 총을 쏠 때마다 내 심장도 덜컹거렸으니까. 소리가 크면 내장이 떨린다는 사실을 몸으로 깨닫게 된 날이었다.

    “액션 영화보다는 로맨스 영화를 볼 걸 그랬나요.”

    “로맨스…… 영화요?”

    “은근슬쩍 손을 잡아도, 해민 씨가 붙잡고 있는 게 팝콘 통인지 내 손인지 신경을 못 쓰더라고요. 아무래도 영화 선택을 잘못했나 보다고 후회했습니다.”

    “그래도 영화는 재미있었어요. 펑펑 터지니까 속이 시원한 기분이고.”

    내 감탄에 이환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재미있었다는 진심이 느껴져서 보람차긴 한데, 손잡을 분위기를 내기에는 영 꽝이었다고. 영화 선택을 잘한 건지 잘못한 건지 모르겠다고. 그리 중얼거리는 이환에게 잘한 선택이었다고 칭찬을 해 주었다.

    시간이 지나는 줄도 몰랐는데 상영 시간이 두 시간이나 되었다. 가뜩이나 겨울의 밤은 빨리 찾아오는데, 시간마저도 늦어져 날이 어두워졌다. 자정에 가까워지는 시간을 확인하고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걸까 생각했다.

    “영화관도 가 보고, 오늘 재미있었어요.”

    기대했던 크리스마스 파티와는 조금 달랐지만, 그래도 재미있었다. 내 인사에 이환이 의미 모를 미소를 지었다.

    “지금부터 더 재미있을 겁니다.”

    “지금부터요? 집에 가는 거 아니에요?”

    “설마요. 겨우 밥 먹고 영화 한 편 봤는데요.”

    본격적인 크리스마스 이벤트는 지금부터 시작이에요.

    속삭이듯 말한 이환은 나를 동화 속 환상의 세계로 인도했다.

    ∞ ∞ ∞

    한 걸음 앞에서 씰룩거리는 빵빵한 엉덩이를 보았다.

    “원래 이렇게 안내해 주는 거예요?”

    놀이공원에 입장하는 우리를 마중 나왔던 마스코트들이 가이드처럼 함께 걷고 있었다. 컨셉인지는 모르겠으나 말은 하지 않고 손동작으로 제스처만 하고 있는데, 쓰고 있는 동물 탈이 웃는 얼굴이라서 친근함을 느끼게 했다.

    내 물음에 이환이 음, 하고 말을 끌었다.

    “지금 이 시간, 이 장소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해민 씨만을 위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돈 주고 고용했다는 뜻이다.

    “돈 많이 쓰셨겠어요.”

    현실적인 내 말에 감동을 기대했던 이환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까 영화관에서요.”

    “네.”

    “상영관에도 사람이 한 명도 없던데, 그곳도 대관하셨던 거예요?”

    “당연하죠.”

    어쩐지 그 넓은 상영관에 우리를 제외하고 다른 사람이 한 명도 없더라. 이상한 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

    “저기 음식 파는 곳 있는데, 뭐 좀 먹을까요?”

    이환의 내 손을 톡 건드리며 물었다.

    “네. 먹을래요.”

    이래저래 생각이 많아졌지만, 일단 눈앞에 보이는 건 먹기로 했다. 오늘 하루 대관했다는 놀이공원을 환불하라고 말할 수도 없으니 그냥 즐겨야지. 일단 먹고 즐기자.

    “저거 먹을래요.”

    “추로스요. 핫도그는요?”

    “두 개 먹어도 돼요?”

    “두 개뿐일까. 전부 다 먹어도 됩니다. 하지만 놀이기구도 타야 하니 한두 개만 골라요. 여기 말고도 음식 파는 곳이 군데군데 있으니까 돌아다니다 먹고 싶을 때 먹으면 됩니다.”

    나는 추로스와 핫도그를 양손에 받아 들었다. 시큼한 케첩이 발린 핫도그와 달콤한 설탕이 뿌려진 추로스를 양손에 쥐고 번갈아 먹으니 두 배로 꿀맛이었다.

    “맛있습니까?”

    “네.”

    “놀이기구도 탈까요?”

    입에 잔뜩 욱여넣은 핫도그를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부터 타고 싶어요?”

    “바이킹이요.”

    “그래요. 바이킹 타러 갑시다.”

    우리의 말에 놀이공원 마스코트들이 이쪽이라며 현란하게 손짓을 했다.

    “진짜 직원들 빼고는 사람이 한 명도 없네요.”

    “놀이공원 운영 시간은 끝났으니까요.”

    “그럼 저희 때문에 연장 근무하는 거예요?”

    “대관비 많이 줬습니다. 그만큼 받아 갈 거예요.”

    역시 돈이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자본주의 사회.

    마스코트들은 우리를 바이킹 앞으로 안내해 주고 손을 흔들었다.

    “가기 전에 사진 찍을까요?”

    “아, 가는 거예요?”

    “네.”

    “그럼 같이 사진 찍어요.”

    내 말에 나와 이환 옆으로 선 마스코트들이 숙련된 자세를 취했다. 뒤따라오던 직원이 익숙하게 카메라를 들었다.

    연거푸 사진을 찍고, 마치 주차장 안내원처럼 하얀 장갑을 낀 손을 크게 흔들며 마스코트들이 떠났다.

    기다림 없이 바로 바이킹의 가장 끝자리에 이환과 나란히 앉았다.

    “와……. 놀이공원 진짜 오랜만이라 좀 떨려요.”

    “언제 왔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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