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튼 퓨리티 (133)화 (133/172)
  • 133화

    “해민 씨 지금 웃는 건가?”

    “죄송합니다. 너무 참신한 농담을 들은 것 같아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어요.”

    “뭐?”

    “아니, 그렇잖아요.”

    가슴에 손을 올리고 심호흡을 했다. 웃느라 헐떡거리던 숨이 잦아들었다.

    “한탕 하고 뭐 하고 그럴 마음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요. SG에 출근을 하든 말든 그건 실장님 마음이죠. 실장님이랑 제가…… 결혼을 하는 것도 실장님 마음, 아니, 이건 내 의사도 중요하지. 아무튼 우리 둘 마음이고요. 어디에도 부회장님이 끼어들 곳이 없는데, 마치 부회장님 말 한마디면 다 된다는 것처럼 말씀하시는 게 너무 웃겨서요.”

    이환을 손에 쥐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정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었지만, 그래도 듣는 입장에서는 웃겼다. 심지어 속사정을 모두 알고 있기에 이정이 애잔하기까지 했다.

    눈앞의 남자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고 있구나.

    “남들은 아빠 엄마 소꿉놀이할 때, 부회장님은 신 놀이라도 하셨던 거예요? 진짜 신이라도 된 것 같으세요? 부회장님 말 한마디면 세상이 막 들썩들썩하고, 뒤집어졌다 엎어졌다 하기라도 합니까?”

    바보가 된 것은 누구일까. 인형처럼 놀아난 것은 누구일까.

    이정은 그저 힘만 무지막지하게 센 아이였다. 돈 많은 부모를 만나 원하는 모든 것을 손에 쥐니, 그게 마치 제 능력인 양 저만의 세상에 갇혀 만족스러워하는 아이. 몸은 훌쩍 자라 성인이 되었지만, 정신은 성장하지 못해 여전히 어리고 주변을 둘러보지 못하는 아이. 자신이 보고 겪고 생각하는 것만이 전부라고 여기는 아이.

    “해민 씨. 말 가려서 해야지. 아무리 눈에 보이는 것 없이 막 나가는 인생이라지만, 세상 무서울 것 없이 굴다가는 진짜 후회한다?”

    뻗어 나온 손이 내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다가 머리카락을 콱 움켜쥐었다. 그 손을 털어 내려다 머리채가 뽑히는 느낌에 인상을 찌푸렸다.

    “거기까지만 해.”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이정이 고개를 돌렸다. 나 역시 뒤를 돌아보고 싶었으나 붙잡힌 머리채가 그것을 불가능하게 했다.

    “손 놔.”

    “출근했다며. 언제 왔어?”

    “손 놓으라고.”

    뚜벅뚜벅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지척에서 멈추었다. 커다란 손이 내 머리채를 움켜쥐고 있던 이정의 손을 떼어 냈다. 욱신거리는 두피를 손으로 꾹꾹 눌러 마사지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머리 아픕니까?”

    “괜찮아요. 다행히 뽑히지는 않았어요.”

    뽑혔으면 스무 살에 원형 탈모가 생겼겠지. 좋지 않은 상상이었다.

    “호 해 줄까요?”

    말 같지도 않은 말을 지껄이는 이환을 흘겨보면서도 은근슬쩍 그의 몸을 방패 삼아 이정에게서 멀어졌다.

    “내가 너무 늦게 왔습니까.”

    “아뇨. 딱 맞게 등장하셨어요.”

    정말 절묘할 정도로 딱 맞춘 등장이었다. 마치 주인공처럼, 왕자님처럼, 구세주처럼.

    여사님도 계시니 이정이 나를 개 패듯 패지는 않았겠지만, 그래도 한두 대는 맞았을지 모른다. 맞지 않았더라도 머리에 땜빵이 생겼을지 모른다.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전에 적절히 등장해 준 이환이 오늘만큼은 진심으로 고마웠다.

    “우리 환이. 형한테는 아는 척도 안 하고, 해민 씨만 보네?”

    “나가.”

    “환이가 왜 갑자기 이렇게 까칠해졌지? 사람을 가려 사귀었어야 했는데, 너무 격 떨어지는 놈을 붙여 놓은 탓일까.”

    “이정.”

    “형 이름도 막 부르고. 혼나야겠네, 이환.”

    “아버지한테 이야기 못 들었어? 나랑 서해민 근처에서 얼쩡거리지 말라고 분명히 경고했는데. 아버지가 말을 안 했을까, 아니면 네 귓구멍이 막혀서 못 들었을까.”

    “이환! 형 정말 화낸다.”

    흔들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던 이정이 정색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이환을 마주 보았다.

    화난 얼굴의 이정을 마주하면서도 이환은 픽 코웃음을 흘렸다. 그는 휴대폰을 들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는 잠시 기다렸다.

    “지금 내 집에 형이 와 있습니다. 저는 충분히 말씀을 드린 것 같은데, 아버지는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으신 모양이네요. 그냥 끝을 볼까요. 저는 상관없습니다만.”

    제 할 말을 끝낸 이환이 잠시 휴대폰 너머의 목소리를 듣더니 이내 이정에게로 휴대폰을 넘겼다.

    “받아 봐.”

    “누군데.”

    “형을 제일 사랑하는, 아버지.”

    비죽 올라간 입꼬리에 비웃음이 맺혔다. 그 비웃음이 이정을 향한 것인지, 회장님을 향한 것인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왜요.”

    휴대폰을 받아 든 이정이 불퉁하게 말을 내뱉었다. 무슨 말인지 명확하지는 않으나 큰 소리가 광광 울렸다. 회장님이 이정에게 무언가 호통을 치는 모양이다. 이정의 표정이 사탕을 빼앗긴 아이처럼 샐쭉해졌다.

    통화가 끊긴 휴대폰을 티 테이블 위에 쾅 하고 내려놓은 이정이 이환을 노려보았다.

    “얌전히 본인 발로 나갈 건지, 멱살 잡혀 끌려 나갈 건지 선택해.”

    “이환. 네 어리광 받아 주는 것도 끝이다. 형 진심으로 화났어.”

    “알았으니까 나가라고.”

    진심으로 화가 났든 나지 않았든 상관없으니 일단 꺼지라는 이환의 일축에 이정이 나를 바라보았다.

    “해민 씨. 오늘 내가 했던 말을 잘 기억…….”

    “닥치고 나가.”

    무언가 경고를 남기려는 말을 끊으며 이환이 이정의 어깨를 밀쳤다. 이환에 비해 체구가 작을 뿐, 이정도 평균 남성 이상의 체구를 가졌는데도 휘청거렸다.

    오늘따라 이정이 많이 안쓰러웠다.

    “이환!”

    “아버지도 그렇고 형도 그렇고, 경고하는 거 좋아하지? 나도 경고 하나만 한다. 오늘 이후로 해민 씨 찾아오지 마. 전화도 하지 마. 얼굴도 보지 말고 목소리도 듣지 마. 길 가다 마주쳐도 아는 척하지 마.”

    “후회할 거다, 이환.”

    “내 경고, 새겨들어. 신경 거슬리게 곁에서 깔짝깔짝 맴돌지 말고.”

    이정의 넥타이를 바로잡아 준 이환이 그의 어깨에 턱 손을 올리며 얼굴을 마주했다.

    “형. 형의 세상에서 살아. 나 따라서 바깥으로 기어 나오지 말고.”

    “가족을 버리기라도 할 거냐. 저 새끼 따라서 구질구질한 하층민 생활이라도 하려고?”

    이환은 연극으로 이루어진 이정의 세계를 말하는 듯 보였고, 여전히 실상을 알지 못하는 이정은 그것을 알아듣지 못하고 다른 소리를 내뱉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도 대화가 통한다는 건 참 묘하다.

    저번에 어떤 드라마에서 지금과 비슷한 장면을 본 듯한데. 미국인과 한국인이 각각 영어와 한국어로 이야기를 하는데 말이 통하는 마법 같은 장면. 저렇게 대화가 이루어진다고? 하며 놀라워했었는데, 그 놀라운 장면이 현실에서도 충분히 존재할 수 있는 일이었구나 새삼 깨달았다.

    내가 헛생각을 하는 동안, 열이 받은 이정이 거칠게 발을 구르며 계단을 내려갔고 이어 여사님이 배웅하는 목소리와 쾅 하고 현관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도 들렸다.

    “……뭔가 ……폭풍이 왔다 간 기분이에요.”

    “그 폭풍에 휘말린 머리채가 멀쩡한지 좀 봅시다.”

    이환은 이 잡아 주는 원숭이처럼 내 정수리의 머리카락을 살살 헤집었다.

    “여사님 연락받고 오신 거예요?”

    “이정이 대문 통과할 때 이미 연락받았습니다.”

    역시나, 여사님에게 연락을 하라 마라 하기도 전에 경호원들이 먼저 연락을 해 두었던 모양이다.

    “다음부터는 문 열어 주지 말아요.”

    “오늘도 딱히 제가 문을 열어 준 건 아니에요. 그쪽 도련님들이라면 껌뻑 죽는 여사님이 반가워하며 열어 주셨지.”

    “저런.”

    “여사님한테는…… 진실을 알리지 않으실 거예요?”

    “네.”

    “하긴, 여사님이 알게 되면 크게 충격받으시겠죠. 어차피 동네방네 떠들면서 ‘나는 요정을 안 믿는다’ 하고 해명하고 다니실 것도 아니고. 당사자들끼리만 조용히 합의해서 마무리 지으실 것 같았어요.”

    정작 가장 중요한 이정은 그 당사자에서 제외된 상황이지만.

    이정은 끝까지 모르는 상태로 남겨 두려는 건가.

    그게 이환의 뜻인지, 회장님의 뜻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실상을 모르는 이정을 볼 때마다 그가 애잔해지는 건 막을 수가 없었다.

    이것도 내가 이환에게 뒷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지, 아니었으면……, 아니었으면 엄청 속 터졌겠지.

    이정이 뭔데 이환을 그따위로 취급해! 요정 믿는 게 죄야? 요정만 믿을 뿐이지, 나머지는 정상적인 사람이야. 금치산자도 아닌데 왜 자기가 뭐라도 되는 양 이환을 가지고 이래라저래라 난리야.

    이런 생각을 하며 속으로 이환을 두둔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보다 시끄러워질 게 뻔해서 모르시는 게 낫습니다.”

    “……네?”

    “설명을 하려면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해야 하는데 귀찮아요. 여사님이 알게 되면 아버지를 욕하며 내가 안쓰럽고 불쌍하다고 울고불고하실 텐데. 사실 내가 그 정도로 안쓰럽고 불쌍하지는 않습니다.”

    “실장님?”

    “어차피 조금 있으면 은퇴하실 분입니다. 괜히 이쪽 가정사를 알게 되어 속앓이하시는 것보다는 그냥 모르시는 편이 낫습니다.”

    “…….”

    뭐야, 그게.

    결국 설명하기 귀찮고 시끄러워지는 게 싫다는 거잖아.

    여사님이 받을 충격을 생각해서 아무 말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물론 여사님을 걱정하는 마음도 있긴 하겠지만, 아무래도 내 생각보다 그 비중이 조금 작은 듯했다.

    타박하듯 이환의 팔뚝을 툭툭 때리자 두 팔로 나를 꽉 끌어안은 이환이 둥개둥개 몸을 흔들었다.

    “그래도 여사님에게 다음부터 문 열어 주지 말라는 말은 해 둬야겠습니다. 이정이 저리 당당하게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허를 찔렸네요. 내 불찰입니다.”

    어떤 수작을 부릴지만 걱정했는데, 그 걱정이 부질없을 정도로 이정이 당당하게 방문해 대문으로 들어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고. 앞으로 여사님에게도 단단히 당부해 두어야겠다고.

    멀쩡한 내 두피를 두 번, 세 번 확인한 뒤에 조금 안심한 목소리로 이환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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